중국 내륙 진출의 좌절 사비에르는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모험적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사비에르는 200크루자도스(cruzados) 어치의 후추를 보수로 이 광주(廣州) 상인에게 주고 시간 약속을 했다. 사비에르는 초조하게 11월 하순까지 기다렸지만 그 중국인 상인은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1552년 11월 13일 사비에르가 고아(Goa)로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는, 내가 중국에 도착될 지 안 될 지 아무 것도 예언할 수 없습니다. 현재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내가 희망한 대로 안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확실히 마귀는 예수회 회원이 중국에 입국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데, 천주의 도우심과 성총으로 마귀는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천주께서는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당신의 종 나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하시었습니다. 천주께서는 마귀의 교만을 누르실 것입니다.1) 라고 불안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사비에르의 중국 내지 진입 희망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충격은 치명적인 것이었고, “쇠약해진 몸에 남아있던 한 가닥 남은 희망마저 홀연히 끊어졌고 몸의 기능은 곧 회복되었으나 영영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다.”2) 사비에르는 수년간의 과로에 지쳐있었을 뿐 아니라 상천도(上川島)에 상륙한 뒤에는 열병까지 걸려 극도로 쇠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중국 진입의 열망으로 버티어 오다가 그 희망마저 깨어지자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의료약품은 부족한데다 황량한 섬에서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다.
사비에르는 1552년 12월 3일 새벽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비에르 유해 곁에는 그가 생전에 너무나도 귀하게 여기던 기념품, 즉 편지지에서 잘라낸 로욜라의 친필 서명 부분, 예수회 가입 당시의 서원문과 다른 교도 두 명의 유해가 함께 놓여졌다. 줄곧 사비에르를 따르던 젊은 중국 신도 안토니오(安多尼)가 사비에르의 관을 묻었다. 두 달 반 뒤인 즉 1553년 2월, 산타크루즈호가 상천도를 떠나려고 할 때 안토니오의 간청으로 사비에르의 시신이 그 배에 실려 인도로 운구되었다. 사비에르의 중국선교 개척의 의의 1542년부터 1552년까지 10년 동안 사비에르는 10만 킬로미터 이상을 맨발로 걸어 다녔고, 어떤 때는 뙤약볕 아래에 어떤 때는 빙판이나 설원 가운데 있기도 했다. 그가 동방으로 건너가 선교한 지 겨우 10년 만에 10여 개국을 다녔으며 30만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에는 ‘아시아선교의 개척자’, ‘동방의 사도’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사비에르는 살아서 중국 대륙을 밟지 못했지만 이후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로부터 동방과 중국선교 사업의 개척자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사비에르는 1619년 10월 25일 로마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복자(福者)의 반열에 올랐고, 1622년 3월 12일 로욜라와 함께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서 성인으로 봉해졌다. 처음 중국 내지로 들어간 예수회 선교사 루지에리는, 그 자신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바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갖고 있던 열정과 유지를 이어받은 것이며, 이를 통해 중국에 들어가 그곳의 인민들을 회심시킬 수 있었다”3)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도 중국선교를 향한 “최초의 발상과 노력을 실천한 것 역시 그였고, 그의 죽음과 장례가 선교의 최후 승리에 이르게 했으니 바로 이런 정황이 그가 창시자요 기초자라는 칭호를 갖는 데손색이 없음을 입증한다”4)라고 하면서 사비에르의 중국선교 개척의 의의를 강조했다. 더욱이 사비에르는 동방으로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호를 구하고 예배하는 대상으로까지 변화했다. 1618년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이 배를 타고 동방으로 오던 선상에서 학질에 걸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는데도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원인을 사비에르의 보호로 돌렸다. 아담 샬이 살아난 것이야말로 사비에르에게 지성으로 기도한 결과 사비에르가 하느님께 도우심을 구하였기 때문이라고 대부분 믿었다고 하며, 아담 샬 일행이 고아에 도착한 뒤 곧 바로 천주께 감사의 미사를 올린 다음 성당에서 영면하고 있는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에게 배례해야 했다고 한다. 
일찍이 중국 상천도에서 사비에르를 매장했었던 무덤은 “뭇 성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명 숭정(崇禎) 12년(1639년) 마카오 신부들이 그의 무덤에 석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동방의 사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일찍이 이곳에 잠시 묻히다”5)라고 기록되었다. 1698년 프레마레(Joseh de Premare) 신부가 중심이 되어 그의 무덤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고, 1700년에는 투르카티(Charles Turcatti) 주교와 란레아티(Johm Lanreati) 신부의 주도로 광동(廣東) 당국의 허가를 받아 상천도에 예수회 수도원을 세우고 기존 성당을 석조로 신축하였다. 사비에르 사후 200여 년 동안 상천도에 와서 사비에르 무덤에 참배하는 서방 각국 선교사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사비에르가 중국 본토에 발을 딛지는 못하였지만 중국으로 들어가서 중국 황제를 만나 선교의 문을 열고자 했던 것은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견지한 적응주의 선교전략의 실천을 향한 선구적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는 광주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상천도에서 중국을 왕래하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중국 상인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중국행을 준비하였던 것 자체가 예수회 최초의 중국선교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주 1) Epistolae S. Fracisci Xaverii, 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Jesu, Vol. 67, T.11, p.520(서양자, 《중국천주교회사》, p.111에서 재인용). 2) [法]費賴之 著, 馮承鈞 譯, 《方濟各沙勿略》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p.5. 3)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下冊 (《利瑪竇全集》 4, 臺北: 光啓出版社·輔仁大學出版社 聯合發行, 1986. 9), p.426. 4) 何高濟 等 譯, 《利瑪竇中國札記》 上冊, p.127. 5) [프]費賴之 著, 馮承鈞 譯, 《方濟各沙勿略》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p.7. 마카오는 1555년 포르투갈 상인들의 상주가 허용되었다.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