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지1설명사진.JPG) 일본선교의 성과 1547년경 사비에르는 말라카에서 자신의 선교 후원자 조지 알바레스를 통해 일본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그를 통해 사비에르는 일본인이 우상을 적극 신앙하며 가정에도 불당을 두고 묵주를 사용한다는 점, 불승들이 한자로 기록된 책을 통해 기도와 예불을 올리고 있는 점 등을 알게 되었다. 또한 사비에르는 일본 출신인 요지로(爾次郞)한테서 일본의 풍속과 민정, 그리고 기타 선교에 관련된 정보를 많이 얻었다. 요지로는 말라카에서 사비에르를 만나 세례를 받았으며, 사비에르의 일본선교의 길잡이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1)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는 요지로한테서 얻은 정보는 그가 이후에 일본과 중국에 가서 ‘학술선교’를 펼칠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그는 1949년 1월 12일 로욜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야말로 인도와 동남아시아선교의 현장에서 이슬람교도들 때문에 겪었던 고통은 없을 것이며, 더 많은 영적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사비에르가 일본으로 가서 선교할 계획을 세우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광활한 인도에서도 충분히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이 남아 있는데 굳이 다른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교구를 개척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가는 길은 해적이 창궐하여 대단히 위험하니 일본행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격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사비에르는 말라카에서 고아(Goa)로 복귀하여 각 지역의 교무 후임자를 세워 인계한 다음, 발렌시아 출신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 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 수사 등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였다.2) 이들은 1549년 5월 말 말라카를 경유하여 8월 15일 일본 규슈(九洲)의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27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규슈지방은 사비에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었기에 그들을 통해서도 기독교가 전해지기는 하였겠지만 본격적인 기독교 전파는 그가 도착한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 도착한 뒤 사비에르는 가고시마, 히라도(平戶), 야마구치(山口), 분고(豊後) 사이를 오가며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3) 일본에 도착한 직후 그는 “이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도 선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교도 사람들도 일본인만큼 선천적인 선함을 지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일본선교를 희망적으로 내다보았다.4) 그는 인도에서처럼 거리로 나가 종을 울려 주민들을 모은 뒤 기독교 교리를 강해하였다. 사비에르는 1550년 여름까지 가고시마 요지로의 집에 머물면서 요지로의 형 간지로(勘四郞)의 도움으로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사비에르의 일본 사역의 성과로 1549년 가고시마의 교우가 150여 명, 그 부근에서 영세자가 450여 명이나 되었다. 가고시마에서 처음에는 영주로부터 환대를 받았으나 곧 불교도의 반발과 영주의 냉담한 반응을 받게 되었다.
이후 가고시마 사역은 요지로에게 맡기고 자신은 히라도로 옮겨가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고, 3개월 만에 백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후 히라도 사역은 토레스 신부에게 맡기고 페르난데스 수사와 함께 야마구치로 옮겨 2개월 여 동안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야마구치에서 초기 사비에르의 선교활동은 그다지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사비에르는 1550년 12월 말 수도 미야코(현재의 京都)로 가서 천황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청빈을 실천하고 있던 사비에르의 남루한 외모는 궁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하였고, 헌상품(獻上品)도 지참하지 않았기에 천황을 면대하여 선교 허락을 받으려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551년 3월에 야마구치로 돌아온 그는 그 지역 다이묘(大名)였던 오우치 요시타가(大內義隆)에게 헌상품을 전달하고 환대를 받았다. 화답으로 다이묘가 하사한 보도(寶刀)와 황금 한 상자를 사비에르가 사양하면서 다이묘의 감동을 자아내어 마침내 영지 안에서 포교하는 것을 공인받았다. 8월에 사비에르가 분고로 옮길 때까지 야마구치에서는 5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개종하였다. 분고에서도 사비에르는 먼저 다이묘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鎭)을 만나 환영을 받음으로써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1649년 8월부터 1951년 11월까지 2년 4개월 동안 사비에르의 일본선교의 결과 일본교회가 창설되고 2천여 명의 입교가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중국선교를 주목 하지만 그는 인도에서보다도 이 지역에서의 선교 효과가 더 높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그나마 거둔 선교의 성과는 매력적인 포르투갈 무역의 유치를 염두에 둔 영주들의 호의와 적극 지원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당초 그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영주들 가운데서는 다른 지역에서도 선교를 하려는 그의 태도에 불만을 드러내며 태도를 일변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불교도들의 반발도 있었고, 초라한 복장에 어눌한 말투는 군중들로부터 조롱을 받기 일쑤였다. 또 교토에 가서 직접 천황을 만나 전도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천황이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굳이 만나도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가 일본으로 오기 전에 생각하였던 학술선교를 진행할 길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식인들과 만남을 통해 선교를 하려고 했던 계획도 실행에 옮길 수 없었으며, 회심자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난관에 직면한 사비에르는 자신의 선교 목표와 방식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였다. 먼저, 일본 문화가 중국에 근원을 두고 있으므로 동방선교를 위해서는 선교의 중심을 일본에서 중국으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비에르가 일본에 머물 때 일본인들이 그 이웃 중국의 문학과 철학적 이론에 대해 경탄하고 그것이 전 일본 문화의 본산이라 여기고 있음을 알고 놀랐다. 그가 만난 일본 학자로부터 “당신이 믿는 종교가 참 종교라면 중국에서는 왜 이 종교를 모르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일본을 교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중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552년 1월 29일 사비에르는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가 긴밀해서 종교와 학파 모두가 중국으로부터 전해졌습니다. (……)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가르침을 발전시켜 나가려면 중국이 가장 효과 있는 기지입니다. 일단 중국인이 참 가르침을 믿게 되면 반드시 일본도 현재 갖고 있는 각급 종교 학설과 다른 학파를 포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5) 라고 했다.
그리고 일본인으로부터 “중국을 통치하는 군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백성들이 매우 쉽게 믿을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중국 황제를 만나려는 결심을 하였다. 사비에르가 일본에서 거둔 성공과 좌절은 중국을 향한 그의 염원을 더욱 크게 키워 주었고, 중국선교를 위한 준비를 보다 구체적으로 하게 하였다. 다음, 대규모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지금까지의 선교 방법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학술 연구를 통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선교 효과를 극대화하는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였다. 사비에르는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한테서 중국에는 학자들이 많고 학술 연구를 영광스러운 일로 여기며 학자들이 중요한 지위나 권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국선교를 위해서는 학문적 깊이, 철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각종 난제의 핵심에 대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동시에 중국인들은 천문 현상의 원리에 관심이 많으므로 선교사들은 자연계 현상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할 수 있어야 분명 크게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비에르는 결론적으로 “그들(학식이 높으면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법이 가장 효과 있을 것이다”6)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선교의 중점 대상을 보통의 군중이 아닌 사회적 지위가 높은 문인 학자들로 전환하였고, 강압적 요소로 사람들에게 직접 천주 교리를 선전하고 이식하는 방식 대신 학술 연구와 지식 전수라는 간접적으로 권유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러한 선교정책과 방법상의 중대한 전환은 일본선교에서 얻은 교훈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언어와 문자를 유창하게 사용하느냐 하는 여부가 선교활동의 성패와 안정된 기반 확보 여부를 좌우하는 기본 조건임을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일찍이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사비에르는 언어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라틴어 자모로 십자가, 하느님 등과 같은 타밀어(Tamil語) 독음을 만들어 현지인들에게 전했다. 일본에서도 사비에르는 대화를 나눌 때 먼저 일본어를 라틴어 자모로 음을 표기하여 교리를 전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능숙하지 못했던 그의 언어장벽은 문화적 편차를 극복하는 데에 장애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사비에르는 일본에서 ‘다이니치(大日)’라는 말로 천주를 지칭했다. 그러나 1551년 봄 그가 두 번째로 야마구치로 가기 전에 이미 일본에서는 다이니치가 스스로 있는 자요 우주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이라고 받아들이는 일본인이 더 이상 없음을 알았다. 이후 사비에르는 선교를 하는 과정에서 천주를 말할 때 다이니치라는 지칭을 쓰지 않고 라틴어의 데우스(Deus)를 그대로 음역하여 ‘데우스(デウス)’로 바꾸어 불렀다. 그러나 지금까지 섬겨 온 다이니치를 믿지 말고 이제부터는 진짜 신인 데우스를 믿으라고 하는 사비에르의 설교는 일본인들에게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가 말하는 데우스라는 발음이 일본인들에게 ‘다이우소(大噓)’ 즉 ‘위대한 거짓말’로 받아들여졌고, 그를 따르던 꼬마들은 “다이우소, 다이우소” 큰 소리로 외치면서 놀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사비에르는 선교를 위한 준비에서 언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일본선교에서 한층 더 깊이 인식되었다. 사비에르는 길지 않은 일본선교 기간에 직면한 난관을 통해 이상과 같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미래 선교의 목표, 현지의 사상과 문화 관념을 이용하여 선교한다는 전략 그리고 현지어와 문자를 통한 학술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톨릭선교사들은 포르투갈 점령 지역에 안주하여 포르투갈의 통치력, 군사력, 경제력 차원의 우위에 입각한 형식적인 선교에 그치고 있었다. 사비에르는 이를 뛰어 넘어 포르투갈이 점령하지 않은 새 땅으로 향할 계획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대상이 되는 현지 문화를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타파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그것의 이해를 통해 선교할 필요성을 직시하였다. 아울러 현지어 학습을 통한 현지어 사용의 선교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식을 본격적으로 한 선구적 인물이었다.
미주 1) 안지로라고 표기된다. 안지로는 고향 사람들의 해적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포르투갈 배에 올라 말라카로 왔다. 그는 사비에르로부터 바오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2) 이때 요지로 등 3인의 일본인 개종자와 중국인 마누엘과 말라바르 사람 아마돌도 동행하였다. 3) 사비에르의 일본선교 활동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알베르 주 지음, 박금옥 옮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pp.164-191; 김상근,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pp.211-281; 사와 마사히코, 《일본기독교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8), pp.39-43; 박양자, 《일본 키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 (서울: 도서출판 순교의 맥, 2008. 10), 21-35; 劉小珊, 〈沙勿略早期日本開教活動考述〉 (《文化雜誌》 64, 2007), pp.13-32 등 참조. 4) Francis Xavier, 〈가고시마, 1549년 11월 11일, 고아의 예수회에 보낸 서한〉 (Henry James Coleridge (tr. & ed.), The Life and Letters of St. Francis Xavier, 4th ed., London: Burns & Oates, 1912; 방원일, 〈일본과 기독교의 만남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타자의 인식 -예수회의 초기 일본선교를 중심으로〉, 《종교학연구》 27, 2008, p.163에서 재인용). 5) 方豪, 〈方濟各沙勿略〉 (《中國天主敎史人物傳》 上卷), p.60. 6) 方豪, 〈方濟各沙勿略傳〉 (《中國天主敎史人物傳》 上卷), pp.61-62..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