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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이 연상되는 팔라우로 가다 팔라우(Palau)에 오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대만에서 중국대륙선교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언어습득과 문화적응을 하며 중국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개척교회를 3년 동안 중국인목사님과 협력사역을 하고 있을 때, 지금은 대북한인교회를 은퇴하신 김달훈 목사님께서 총회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하는 선교사를 찾는다며, 팔라우로 가지 않겠냐고 물어오셨다. 그렇지만 당시에 섬기고 있던 교회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동역하던 대만교회의 목사님도 만류하셨다. 하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응답해주셨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지명이어서 지도에서 팔라우가 어디쯤에 있을까 찾아보니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다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뒤져서 그 위치를 겨우 알아냈다. 지금은 어엿한 국가로 지도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종암교회 후원으로 팔라우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처음 팔라우에 발을 디딘 것은 1993년 11월 추수감사절 바로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후원 교회의 장로님, 집사님들과 함께 괌을 거쳐 팔라우에 도착했다. 팔라우에 가까웠다는 기내방송을 듣고 창밖을 내려다보니 오색찬란하게 울렁이는 바다물결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푸른 초장 같은 전경(全景)에 시편 23편의 말씀이 저절로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한없이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양떼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또 다른 한 장면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떼들의 모습이었다. 그때 성령님은 요한복음 21장인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먹이라”라고 베드로한테 말씀하셨던 것처럼 세 번에 걸쳐 내게 들려주셨는데 팔라우에 도착해서 사역을 하면서 그 까닭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이 시간을 돌아보니 한국외항선교회 소속으로 필리핀에서 약 1년 반을, 대만에서 3년 동안 선교 사역을 하다가 이곳에 온 지 18년이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팔라우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이다. 면적은 우리나라 거제도만 하며, 300여 개의 작은 섬들 중에 8개의 유인도가 있다. 이 작은 섬나라에는 전화국, 경찰서, 소방서, 우체국, 병원 등 모든 것이 하나만 있다.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을 연상하게 했다. 열대성기후인 팔라우는 무풍지대이어서 비록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호수처럼 잔잔하다. 이 나라는 1947년 미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고 1986년 자치공화국을 거쳐 1994년 10월 완전독립하고 유엔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되었다. 우리나라와는 1995년 3월 22일 정식 수교를 맺었으며, 역사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강제징용과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와 숨진 한국인을 위한 위령비가 K-B 다리 밑에 건립되어 있다.
또 모계사회였던 팔라우는 점차 부권중심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으며 추장제도가 있어 나라의 제반사는 추장의 동의를 얻어야 할 때도 많다. 정치제도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 대통령제, 상하 양의원제, 16개 주(州)의 주지사가 있다. 생활고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은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독립 전에는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생활을 하다가 독립한 이후에는 미국의 원조가 끊어졌다. 그래서 이들은 자체적으로 관광 상품 등을 개발하여 외부 관광객들을 유치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요즘은 한국인관광객들도 많이 들어오는 편이다.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공산품은 한국보다 2-3배 더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전략적인 측면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중국 대륙에서 들어온 중국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외국인선교사는 대륙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없지만 여기서는 신분노출의 염려도 없고, 이사를 자주 다닐 필요도 없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여기서는 ‘묻지 마 선교’를 해야 해요” 처음 팔라우에서는 한인교회를 섬겼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994년 1월 첫 주부터 중국인교회를 개척하여 중국인 선교도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몇 사람이 모여 기도한 게 계기가 되어 팔라우한인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내가 팔라우에 오기 전까지 여러 명의 목회자들이 팔라우기도처를 거쳐 갔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났으며 오랫동안 사역자가 부재중이어서 얼마 안 되는 성도들은 목자 없는 양이 되어 목회자가 다시 오기를 무척 갈망했다고 한다. 한 성도는 “여기서는 ‘묻지 마 선교’를 해야 해요”라고 했다. 나중에 차츰차츰 알게 된 일이지만 성도들의 대부분은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 해외 도피자이거나 처자식을 두고 딴살림을 차렸거나 성도들 간의 상처로 아주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더욱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운 것은 이 좁은 지역에, 한인(韓人)이라야 스무여 명 남짓인데 한인교회는 두 개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휴양하러 오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대영 장로님께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서둘러 우리가 선교사 파송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한인들 간의 깊은 상처로 인해 우리 교우들은 누구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받을 때도 많았다. 너무 힘들 때면 우리 부부는 예배당 안에서 둘이 부둥켜안고 엉엉 울면서 “하나님 아시지요? 아버지 아시지요?”라고 기도만 했다. 변명도 설명도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이 아시기에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태도로 교우들을 섬겼다. 그 후 전화선을 가설하는 한국회사가 팔라우에 들어왔고 조선족이 한국회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우리 교회는 30여 명이 예배를 드렸다. 오랫동안 말씀으로 먹이고 일대일제자양육을 하며 온 마음을 다해서 섬겼으나 교회가 둘이다 보니 한인 사회는 여전치 시끄러웠다. 그런 와중에 우리 교회는 중국인교회를 개척하고 선교에 힘쓰느라 늘 바빴다. 한인교회 성도들도 중국인선교를 열심히 도와주었다. 나는 우리 교회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선교라는 것을 늘 이야기했는데 얼마 안 되는 성도들은 기쁜 마음으로 중국인들을 섬겨 주었다. 순진한 양처럼 선교에 관심을 갖고 동역한 한인 성도들을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여곡절을 거듭한 한인들이 이제는 하나가 되어 연합해야 할 때임을 깨닫도록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셨다. 어느 날 교회를 떠났던 성도들이 찾아와서 두 교회를 합치자고 간청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은혜가 넘치고 덕을 세우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힘입어 더욱더 선교에 힘썼다. 이로 인하여 한인 사회도 평안해졌고 교회도 부흥하였다. 또 중국인교회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그때 집회 때마다 중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한인목회와 중국인선교에 집중한 우리 부부는 각기 다른 시간에 쓰러졌고 구급차에 실려 가서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위험한 때도 있었다. 한인교회 사역은 주님이 내게 주신 섬김의 훈련을 받는 기간으로 보냈다. 아무리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한마디 변명을 하지 않았다. 오직 눈물의 기도를 주님께 올려드리며 감사함으로 모든 일을 감당하였다. 그 후 총회 선교부의 권고로 팔라우에 온 지 6년 만인 1998년에 1년 동안 안식년을 갖게 되었다. 길거리, 시장, 어디가 되든지 중국인의 목소리만 들리면 달려가다 팔라우에서 중국인선교는 1994년 1월 첫 주(팔라우에 부임한 지 1달 뒤)부터 어른 셋, 어린 아이 두 명, 모두 다섯 명으로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때 팔라우에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봉제공장 2곳과 어선회사가 2곳, 그리고 농장들이 있었고, 꽤 많은 중국인들도 있었다. 우리는 먼저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차근차근 복음을 소개했다. 길거리, 시장, 어디가 되든지 중국인의 목소리만 들리면 달려가서 정겹게 인사를 나누며 집을 알아 두었다가 찾아가서 관심을 보이며 교제를 나누며 사귐을 이어 갔다. 아내는 그 비싸다고 하는 금치(김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찾아가는 곳마다 조금씩 가지고 간 김치를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소위 ‘김치선교’의 시작이었다. 그 후에 중국인들이 말하기를 “김치 얻어먹고 예수를 믿었다”라며 까르르 웃어댔다. 중국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낯선 이국땅에서 서툰 중국어로 외국인이 자기들한테 집요하게 접근하니 수상해서 의심을 많이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계속해서 중국인들을 하나하나 찾아 다녔다. 어떤 중국인 자매는 상하이(上海)대학 영문학과 출신인데 “나는 오직 내 자신만을 믿어요.”라고 했다. 그럴지라도 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자매를 위하여 밤중에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을 족히 달려 예배에 데리고 나왔다. 나중에는 철저하게 예수를 믿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여 팔라우의 복음방송국에 소개를 받고 오랫동안 여기서 섬김의 사역을 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신실한 형제와 결혼을 해서 지금은 미국에서 자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중국인선교를 시작한 첫해에는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耶穌愛你)’라는 주제로 집회 때마다 주제가를 부르고 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주제를 정한 것은 중국에서는 개인의 인권은 '오직 당(黨)을 위해 충성'해야 하는 것으로 배웠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늘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해 말에는 40여 명 이상이 모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택 거실에서 주일 오전과 오후에는 한인예배를, 밤에는 중국인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은 협소한 장소에서 1년 만에 넓은 장소로 이사를 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폐허가 된 넓은 건물을 아주 싼값에 5년 동안 임대해서 개축하여 아주 활발한 중국인선교를 할 수 있게 해주셨다. 중국인선교 2차 연도에는 '우리는 한 가족(我們是一家人)'이라는 주제로 중국인들을 섬겼다. 이때도 주제가를 부르며 집회를 하였는데 이런 주제를 정한 이유는, 중국 동서남북 전역에서 모여든 이들이 수십억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이때에는 중국인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들었다. 사도행전 9:31 하반절의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하신 말씀이 실감났다. 파송교회인 종암교회에서 보내준 버스를 늘 몇 번씩 운행해야 했다. 대만의 싱글 여자 선교사님이 오셔서 잠시 동안 함께 동역을 해주셨다. 3차 연도에는 '가서 제자 삼으라'라는 주제로 "이제는 이 귀한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자"라고 외쳤다. 이때부터는 팔라우에 들어오는 중국인들은 누구나 다 교회를 자기네 집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집회 없는 날도 늘 사람들로 붐볐다. 섬기기를 좋아하는 아내, 김 선교사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늘 그들의 엄마 역할을 충분히 잘 해냈다. 이렇게 믿은 사람들은 보통 2년에서 3년 사이에 모두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러기에 팔라우는 '복음의 모판' 역할을 하고 있다. 믿고 돌아가는 이들은 중국 전역으로 흩어져서 그들의 안 믿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와 부모, 친척들, 친구들,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생생한 간증을 전해오고는 한다. 너무 부족한 우리 부부를 이렇게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변화되는 중국인들의 모습에서 언제나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큰 기쁨으로 지칠 줄 모르고 지난 18년 동안을 팔라우에서 섬길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이홍원 | 팔라우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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