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십도》에는 우주론과 심성론, 윤리관과 교육론을 망라하는 방대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담겨있다. 제1도에서 제8도까지의 도설들은 각 분야를 효과적으로 요약하여 보여 주면서 동시에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이론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방대한 이론체계는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주자의 고민이 그랬던 것처럼, 퇴계 역시 이 이론체계를 현실에서의 실천으로 귀결시킨다. 성리학적 세계관은 단지 세계를 이러저러한 도식과 구조로 해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덕세계의 참된 모습을 현실세계에 구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현실에 온전히 구현하는 것이 《성학십도》의 궁극 목적이었다. 그래서 <성학십도>의 제6도-제8도에서는 성학을 실현해 갈 주체에 대해 우선 설명하고 있다. 주체는 바로 인간의 영명한 마음이다. 제6도-제8도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마음의 본질을 보존하고 확장함으로써 도덕세계를 스스로 실현해 낼 수 있다. 즉 마음공부를 어떻게 하느냐가 도덕세계를 실현하는 관건인 것이다. 퇴계는 그 관건을 경(敬)이라고 불렀다. 경이란 퇴계가 꿈꾸던 이상세계의 구현을 위한 근본 방안인 것이다. 제9도와 제10도는 경을 실천해 가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제9도〈경재잠〉은 《성학십도》 전체의 이론체계를 몸소 실천하면서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현실에 실현해 갈 구체적 방도를 일러주고 있다.” - 홍성민 경(敬), 성학(聖學)의 시작과 끝
수양은 단순히 이론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 자체의 실천적 근거이자 목표가 되고 수양의 과정 자체가 몸과 마음으로서만 체험할 수 있는 이론의 실존적 과정이다. 공자의 때로부터 유학은 머리로만 생각하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경계해왔다. 삶으로 보여줄 수 없는 지식은 더욱 헛된 명성을 화려하게 덧칠하는 일일 뿐이다. 경이 성학의 시작과 끝이 된다는 말은, 성리학의 수양은 지식에서 출발하지 않고 마음에서 출발하고, 지식을 이룸에서 끝나지 않고 마음을 이룸에서 끝난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마음이란 어려운 살림살이에 학교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소박하게 땅을 일구며 자식들 뒷바라지 해온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순수한 정감 같은 것이다. 경에 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하늘을 두렵고 떨림으로 바라보고, 사람 앞에 겸손하고 성실한 마음가짐,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이 품위 있게 몸가짐의 예의로서 드러나는 사람의 아름다움과 바름을 의미한다.
주자(朱子) 이전의 학자들은 마음이 욕심으로 일어나는 일을 억누르기 위해 고요함(靜)을 강조하였는데, 정이와 이를 중시한 주자에 이르러 정에서 경으로 강조점이 이동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보다 고요할 때나 움직일 때, 모든 상황에서 마음의 주체성을 수양의 중심에 놓고, 나를 벗어나지도 말고 버리거나 회피하지 말고 그대로 내 마음의 중심을 바로 세우라는 의미이다. 마음의 중심이란 종교적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마음을 그대로 품으라는 의미로, 모든 시간에 하늘처럼 살아가라는 수양의 무시간성이기도 하다. 하늘마음으로 살면 내가 만나고 대하는 모든 것이 하늘이 아닌 것이 없다. 이름 없는 꽃도, 작은 아이도, 쇠하고 죽어가는 모든 것도 하늘처럼 아름답고 깊다. 경(敬), 몸과 마음을 잇는 수양
이 세상의 아픔은 모두 사람의 갈등과 다툼에서 비롯된다. 상생을 말하는 정치나 사랑을 말하는 종교도 총이 되고 칼이 될 때가 많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경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말도 될 수 있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황금률도 될 것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면 이 세상은 더 많은 정의와 평화의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사람 위에 하늘이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하늘보다 더 높아지고 하늘처럼 군림하려 할 때 갑질과 같은 지배욕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의 환경과 능력은 평등하지 않게 태어날 수도 있지만 같은 하늘 아래 우리 모두는 서로 기대어 사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진리, 그리고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자연의 이치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등바등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하는 우리의 욕심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경수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마음을 짊어지고 있는 몸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은 무한을 상상하고 영원을 꿈꾸지만 우리의 몸은 유한한 한계 가운데 있다. 마음은 더욱 깊이 고요하게 진전하되 몸은 이 현실을 살고 있다는 진리의 일상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맛있는 것을 더 먹기 위해 몸을 혹사시킬 때가 많고 더 즐거운 놀 거리를 위해 늦게까지 잠 못 이루는 날도 부지기수이다. 몸이 예민해지고 무거워지면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듯이 욕심은 마음의 일일 뿐 아니라 몸의 일이기도 합니다. 감각과 감정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서 경수양은 몸가짐을 매우 중시한다. 경(敬), 바로 나의 주체적 수양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인문학의 열풍이 불어 대중적으로 많은 강의와 서적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새 그것도 상업적인 시장논리로 한정적인 주제와 이야기들이 유통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정말로 우리 삶과 동떨어진 난해한 인문학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논어에서는 인능홍도(人能弘道)라고 했다.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넓힌다는 것이다. 사실 수험생처럼 더 많은 도에 관한 지식들을 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은 더 많은 인식이 우리를 보장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리란 더 단순하고 소박한 것으로써 우리가 처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이고, 우리가 가장 자연스럽게 회복하고 품을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을 벗어난 진리도 없고 가치도 없다. 진리는 사람을 통해서 실현되고 결국 인문학은 더 많이 배워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키우는 일, 그리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일 그 자체이다. 늘 도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이고, 하늘이나 남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가 문제이다. 경은 수양의 대상이나 방법으로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나’의 일이다. 나의 수양이 될 때에만 그것이 진정한 수양이다. 하늘을 의지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쉽고, 남을 탓하고 떠넘기는 것은 쉽지만 진정 나를 수양하는 것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유학 혹은 동양적 수양을 인간의 노력을 의지하는 것으로 폄훼하기도 하지만 나로부터 시작하고 나를 통해 흘러가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유학자들은 잘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것을 이루는 일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진리는 이미 완전하고 보편적으로 이 세계 전체에 충만해 있다. 그러나 사람만이 여전히 흔들리는 존재로 불안하게 서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진리싸움들을 목도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눈에 보이게 이루어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의 수양은 너무나도 큰 무게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