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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월 8일이 생일인 남편 K 선교사가 만으로 65세가 되었다. 65세는 우리 교단 법에서는 선교사로서 정년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정년과 상관없이 여전히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나의 남편 K 선교사는 13년 동안은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30대 초반에 유학을 다녀와서 대학교수가 될까 선교사로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고는 선교사로 살기로 하였다. 물론 C.C.C맨으로 선교에 대한 도전은 늘 있기도 했었다.
어느 날 청주에 우리가 다니던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부흥 강사님이 나중에 천국가면 “할걸…걸…걸” 하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주님의 뜻에 순종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소리이다. 남편은 그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로 유학 가는 길이 열려 있었는데도 이를 포기하고 대신 선교사로 가기로 결단을 하였다. 오랫동안 ‘난 곳 방언’이라는 선교잡지를 구독하며 기도제목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남편은 GBT(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로 가려고 했었다.
우리는 청주에서 인천으로 올라왔다. 남편은 서울장신 야간 신학과에 학사 편입을 하였다. 낮에는 인천 숭덕여고에서 고3 담임을 하면서 밤에는 신설동까지 가서 공부를 하였다. 나는 아이들 셋을 돌봐야 하니 남편과 같은 학교였지만 낮에 공부하는 성서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편에게 주경야독만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었다. 선교사의 길이 녹록지 않을 것을 아시기에 아주 강한 기도훈련을 시키셨다. 남편은 신설동에 있는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주안에 내려서 아무도 없는 주안장로교회 고등부실에 들어가 새벽 2-3시까지 기도하고 들어오기가 일수였다.
서울장신을 졸업하고 일 년만 목회연구과정을 공부하면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을 때였다. 그러나 남편은 다시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가서 신대원(M.div) 과정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낮에는 하루 종일 인천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까지 가서 밤에 신학을 공부하니 피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번번이 졸다가는 주안역에서 못 내리고 지하철 1호선 종점인 제물포역까지 갔다가 막차가 끊어져서 택시를 타고 돌아오고는 했다. 남편은 2년 동안 신학공부를 한 것으로는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아무래도 신학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했다. 3년이나 더 공부해야 하는 과정을 말이다. 결국 시험준비만 2년을 해야 했고 마흔 살이 되어서야 신대원에 입학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로 나가는 길이 좀 늦어졌다. 목회연구과정을 마치고 바로 선교사로 나갔으면 1992년에 한·중수교가 맺어졌으니 얼마 안 있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목회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장 선교지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3년 과정의 신대원 공부를 마치고, 1년간의 선교훈련(중국어문선교회 4개월, GMTC 6개월, 총회선교훈련 3개월)을 받고서야 1997년 3월, 드디어 대망의 선교지인 C국으로 들어갔다. 올망졸망한 세 아이를 데리고 우리가 도착한 C국의 선교현장은 화장지 하나도 사서 쓰기 어려운 곳이었다. 낙후되고 가난한 성으로 알려진 곳으로 들어간 것이다. 중3과 중2,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인 사춘기 아이들을 데리고 선교지로 간다는 것은 사실 큰 모험이었다. 그래서 어떤 선교단체에서는 우리에게 일 년만 시험적으로 선교지에 들어가서 살아보고 아이들이 잘 적응하면 장기 선교사로 들어가라고 권고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나오지 않는다는 장기 선교사로 살 각오를 하고 들어갔다. 선교지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우리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죽으면 내 뼛가루를 내가 사역하던 선교지의 강변에 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몇 개월 전 C국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정체성은 여전히 C국 선교사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하여튼 우리 가족은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8년을 준비했다.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그렇게 대가를 치러서인지 남편 K 선교사는 끝까지 선교사로 살기를 원했고 늘 그렇게 기도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남편은 내가 공안에게 비자발급 거부를 당해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일 년여의 시간을 홀로 선교지에서 더 머물렀다. 세워진 지 몇 년 안 된 교회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 년 뒤, 남편은 교회의 후임을 세우고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오자 성도가 일백 명 남짓 된다는 경북의 한 지역에서 담임목사 제의가 있었지만 K 선교사는 가지 않기로 하고, 계속해서 국내에서 선교를 하기로 했다. 총회 파송선교사로 남아 있기를 원했지만 교단은 국내에서의 해외선교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우리는 2013년 총회에서 주는 선교 15년 감사패를 받고 사표를 냈다. 그리고 K 선교사는 국제단체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스스로 ‘한국어 교육 선교회’를 설립하고 대표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였다. K 선교사의 사역은 중국인유학생들의 논문 쓰는 것을 도와주고, 그들이 졸업을 하고 본국으로 잘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돕는 과정에서 유학생 전도를 한다. 또 다른 선교단체에서 소개해 오는 기독교인 중국인유학생들에게도 같은 도움을 준다. 벌써 17명의 중국인유학생들이 석·박사 학위를 받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이런 사역을 하는 선교사는 거의 없다. 국어교육학을 전공하고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13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 K 선교사의 달란트가 빛을 보는 것이다. 한국어 교육 선교회는 25개의 중국선교단체들이 모인 중선협(중국선교협의회)의 여러 단체들과도 연계해서 사역을 하고 있다. 우리가 C국에서 추방을 당하지 않았어도 K 선교사는 올 9월에 만 65세가 되었으니 아마 올 12월까지 교단 소속선교사로 사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소속에 연연해하지 않기로 하였다. 남편과 나는 각각 자신이 속한 노회의 전도목사이다. 남편은 한국어 교육 선교회의 대표로, 나는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로서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 사역을 해 나갈 뿐이다. 남편은 평북노회 소속이고, 나는 함해노회 소속이다. 기쁜 소식은 두어 달 전에 노령연금을 신청하라고 남편 이름 앞으로 우편물이 왔다. 아직도 한 교회의 후원에 의지해 사는 K 선교사에게 이십여 만 원은 큰 도움이 된다. 내년 7월 우리가 사는 아파트 앞에 경전철이 개통되면 지하철 요금도 무료가 된다. 이것도 도움이 된다. 대구에 사는 큰딸이 아빠의 생일날 어김없이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이제 오늘부터 지하철 무료시네요. 그 중고차 이제 폐차하세요.” 우리 큰딸은 알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친구이다. 큰딸이 중2 때 선교지에 갔는데, 우유팩을 씻어 말려서 접고 있기에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한국에 가지고 나가서 팔 거라고 하던 친구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알뜰하더니 결혼 11년 만에 자기 집을 장만했다. 자신들의 힘으로 집을 산 것이다. 그런데 큰딸이 우리에게 차를 폐차하라고 하는 것은 차가 없으면 경제적으로도 절약이 되지만, 벌써 열여덟 살이 된 우리 집 황금소돌이(소나타 골드)가 늙어서 고장이 자주 나니 아빠 엄마의 안전이 염려스러워서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딸의 그 문자에 대해 얼른 답장을 보냈다. “어머, 애는 무슨 소리니? 엄마는 아직 65세가 되려면 3년이나 남았다.”라고 했더니, 가족 단톡방에 있던 아들이 ‘키득 키득’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온다. 나는 “막내가 예전에 엄마에게 SM 5 사 준다고 했는데 새 차 사주기까지는 헌차라도 안 버릴 거야. 할머니 병원 모시고 다니려면 차가 필요해”라고 했다. 지난 6월 갓 결혼한 목사 부부인 막내딸이 글쎄 SM 5를 부모인 우리에게 사 줄 형편이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딸이 못해 주면 하나님이 사 주시겠지 하고 믿고 있다. 믿음의 말은 딸이 하고 응답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번에 교회건물 분양도 큰딸의 입을 통해 수년 전에 말하게 한 것이었는데 이번에 응답을 받은 것이니까 말이다. 어떤 직업이든 정년이 되는 것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년퇴직은 누구나 맞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정년 후의 삶을 잘 준비하는가가 그 사람의 정년 후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편 K 선교사는 정년 후의 준비를 잘한 것 같아 보인다. 선교지에서 현지 대학교수로 대학생들을 섬기며 사역했는데 한국에서는 반대로 우리나라로 온 선교지의 대학생들을 상대로 사역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렘 31:13)
나은혜 | 장로회 신학대학교 선교문학 석사, 미국 그레이스신학교 선교학 박사, 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지구촌 은혜 나눔의 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