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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제6도로부터 제10도까지를 ‘이상 다섯 개의 그림은 심성에 근원한 것인데, 그 요점은 일상생활에서 힘써 공부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높이는 데에 있습니다.’라고 종합하여 말한다. 이때 5개의 그림의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심학도>이다. 이 도의 앞부분에는 6도 <심통성정도>, 7도 <인설도>가 배치되어 있고, 뒷부분에는 9도 <경재잠도>, 10도 <숙흥야매잠도>가 배치되어 있다. <심통성정도>와 <인설도>의 그림만으로도 이 두 도가 인간의 마음(心)과 본성(性), 감정(情)을 깊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도를 통해서 독자는 퇴계의 성학 공부가 ‘심성에 근원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후반부의 <경재잠도>와 <숙흥야매잠도>의 그림은 ‘일상생활에서 힘써 공부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높이는’ 공부의 요령을 밝히고 있다. 이 그림들이 모두 경이라는 글자를 중심에 두고 그려졌다는 사실에서 ‘공부의 요령’의 핵심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전반부에서 다룬 인간의 심성 이론과 후반부에서 다룬 경 중심의 수양공부론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설명이 바로 <심학도>인 것이다.” -김근호- 마음, 한 몸의 주재 주자학의 수양은 존덕성과 도문학의 두 가지 방법으로 제시된다. 존덕성은 인간의 주관적인 마음을 수양의 대상으로 하고, 도문학은 인간 밖의 객관적인 사물을 수양의 대상으로 한다. 인간의 마음과 인간 밖의 사물이 모두 자연의 이치와 같은 선한 본성임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수양에서 마음은 수양의 주체성이며 사물은 수양의 관계성이다. 나 자신이라는 개인과 개인들이 모인 사회가 모두 수양의 주제라면 주체성과 관계성의 문제는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퇴계 이전의 주자학은 존덕성보다 도문학에 치우쳐왔다. 주자학이 관학이 되고, 정치적 이념의 중심에 있게 되면서 개인의 마음을 닦는 주관적인 수양보다 밖으로 드러나고 보여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수양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곧 자연과 사회의 관계를 파악하고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며 글을 짓고 정책을 활용하는 객관적인 논리성이 중시되어 온 것이다.
퇴계는 이러한 논리성과 성과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의 폐단을 경계하고 마음공부 중심의 심학(心學)을 공고히 했다. <심학도>는 정복심의 <심경부주>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그림인데, 퇴계는 <심경후론>을 저술하여 심경부주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이후 조선 성리학의 연구방향을 마음공부인 존덕성 중심으로 완전히 옮겼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미 유교적 세계관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구조 속에서 마음 바깥의 이치를 찾는 논리성보다 그러한 유교적 세계관 안에서 한 개인의 유교적 가치관을 온전히 세우는 것에 관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기를 추구하는 퇴계의 성학(聖學)은 성학십도의 전체 흐름에서 심학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마음 안의 선한 본성과 마음 밖 사물과의 관계 가운데 나타나는 감정 사이에서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유교수양의 근본 질문에 대한 탐구이다. <심경부주>의 주요명제는 ‘몸의 주재는 마음이고, 마음의 주재는 경이다.’는 문장이다. 마음을 떠나서는 영혼의 깊은 본성을 경험할 수도 없고, 성인의 기상을 실천할 수도 없다. 마음은 심오한 종교성과 현실의 일상성을 동시에 가진 주체이다. 형이상과 형이하 사이에서 마음은 몸을 이끌고 한 시대를 살아간다. 퇴계는 궁극적 관심과 변화로서의 마음공부를 강조했다. 경, 한 마음의 주재 마음은 역동적이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처럼 상황에 따라 마주하는 사물에 따라 흔들릴 때가 많다. 그렇다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도 금방 딴생각이 들고 마음을 고요히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성리학은 이러한 흔들리는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명확한 구분에서부터 마음수양의 방법을 쌓아올린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이익을 추구하는 욕심, 곧 인심(人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선한 본성을 추구하는 도심(道心)이 있기 때문이다. 인심과 도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한 두 가지 마음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한 마음의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면을 의미한다. 곧 도심을 추구할 것인가 인심을 추구할 것인가는 전적인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귀속된다. 고대의 성인들은 이를 중심으로 유교적 심법을 전수해왔다. 곧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성실하게 하여 오직 그 중을 잡으라.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것이다. 성리학은 이러한 심법을 경(敬)이라는 한 글자에 집약했다. 경은 전일하고 집중하고, 항상 깨어있고, 예로써 행하는 의미로까지 확장된다. 경은 결국 인심을 막고 도심으로 흥기하여 사람을 바로 세우는 수양이다. 평소 큰 이익을 좇아 사는 사람은 사소한 도덕적 선택을 경시한다. 그러나 평소 큰 도리를 좇아 사는 사람은 사소한 도덕적 상황을 결코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 경은 모든 상황 속에서 도덕적 의리와 명분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이익이 없을 때에라도, 심지어 죽음의 위기에 처할 상황에서라도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허례허식을 추구한다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세운다는 의미에서의 실천을 의미한다. 몸을 중시하는 시대의 마음공부 오늘날 수많은 매체의 일상적 관심은 먹방과 여행으로 요약된다. 쉼이 부족한 한국의 현실에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보다 그저 지친 하루를 힐링할 몸에 대한 위로가 절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몸에 대한 만족이 반드시 마음과 영혼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는 것은 아니므로 몸에 대한 위로는 더 큰 만족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무한히 발전하게 된다. 그만큼 몸에 집중하면서 몸 이외의 것까지 마음을 두기가 쉽지 않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것은 마음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 상대적인 가치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변하고, 이러한 시류는 결국 이익을 따라 흘러갈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각자의 이익만을 따라 살아간다면 이 사회는 각자도생의 사회가 될 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마음속의 공통분모인 선한 본성을 따라 산다면, 그리고 그러한 선한 본성이 이 자연과 세계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진리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망치는 정치와 경제, 종교와 문화의 여러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진리와 일상 가운데 선한 길을 걷는 참된 마음을 지닌 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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