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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코르비노 주교의 중국 파견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쓴 여행기인 《동방견문록》은 유럽 세계에 중국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여행기는 원의 수도 대도(大都) 등 중국에서의 견문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중국과 로마천주교가 교류하는 데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1265년 마르코 폴로 부친과 숙부는 원의 수도 대도에 도착하여 쿠빌라이를 알현하였고, 쿠빌라이는 그리스도교도와 로마 교황에 대해 물은 후, “교황이 그리스도교 교리에 밝고 7예(藝)에 능통한 100인을 파견해 달라.”1) 라는 내용을 포함한 서신을 교황에게 전하게 하였다.
1269년 고향으로 돌아온 폴로의 부친과 삼촌은 새 교황의 즉위를 기다리다가 마르코 폴로와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1271년 새로 즉위한 교황 그레고리 10세(Gregory Ⅹ, 1271-1276)를 2명의 도미니크회 선교사를 함께 가도록 했으나 이들은 전쟁 발생의 염려 등으로 인해 도중에 유럽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교황의 중국선교는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지오반니 몬테 코르비노(Giovanni da Monte Corvino, 1247-1328)의 중국행이 있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몬테 코르비노는 1247년 이탈리아 남부 로벨라(Rovella)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에 가서 선교하였다. 당시 서아시아를 지배한 몽골의 일칸국 사신으로 1285년 로마 교황청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289년 7월 그는 교황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Ⅳ, 1288-1292년 재위)가 동방의 모든 주교(主敎)와 국왕에게 보내는 서신을 받고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일칸국의 수도 타브리즈(Tabriz)를 출발하여 1291년 인도 서남부 마일라푸르(Mailapur)에 도착하였고, 그곳의 성 토마스성당에서 13개월 동안 체류하였다. 그와 동행하였던 니콜라우스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국을 향한 그는 1년 후 1293년 중국 동남부 항구도시 천주(泉州)에 상륙하였고, 1294년 7월 마침내 대도에 도착하였으나, 같은 해 쿠빌라이가 죽어 성종(成宗)을 배알하고 교황의 친서를 전하였다. 몬테 코르비노는 비록 원나라 황제를 천주교 신자로 귀의시키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대도에서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몬테 코르비노의 중국선교 로마 천주교의 중국에서의 선교는 몬테 코르비노로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몬테 코르비노는 중국에 도착해서 2년 뒤 경교를 믿고 있던 옹구트부(汪古部)의 교치친왕(喬治親王) 고리기스(闊里吉斯)를 천주교로 개종시켰다. 고리기스의 개종으로 전체 옹구트부도 모두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고리기스는 그의 사저를 기부하여 천주당을 건립했으며, 친히 교당의 편액에 이름을 붙여 ‘로마교당(羅馬敎堂)’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리기스가 죽은 뒤 그 아들 술안(術安)이 부족들을 이끌고 다시 경교로 되돌아갔다.
처음 5년여 기간 동안 몬테 코르비노는 경교도들로부터 반대와 모함을 받았으나 10년 이상의 노력을 통해 대도에서 선교활동의 성과를 크게 올리게 되었다. 그는 대도에 성당 두 곳을 건축했는데, 1305년 도성 부근에 건축한 교당은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는 또한 고리기스의 요청으로 《신약전서(新約全書)》, 〈시편(詩篇)〉 뿐만 아니라 라틴 예절, 기도문 등을 몽골어로 번역하였다. 몬테 코르비노는 또한 7-11세의 아동 40명을 받아들여 희랍어, 라틴문, 찬송가를 가르쳤으며, 교리 교육을 하고 세례도 베풀었다.
교황 클레망 5세(Clemente Ⅴ, 1305-1314 재위)는 독일 국적의 선교사 아놀드 콜로그네(Arnold Cologne)를 파견하여 몬테 코르비노의 교무를 돕도록 하였는데, 아놀드는 사역을 시작한지 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1306년 몬테 코르비노는 3통의 편지를 써서 대도에서의 교무를 보고했고, 1307년 7월 23일 교황은 그를 대도 총주교로 임명하고, 그에게 동방 각성과 각 조교구(助敎區)의 조교(助敎), 교사(敎士) 등 사역 인력을 임명할 수 있게 하였다. 뒤에 몬테 코르비노의 요청으로 교황은 제라도(Gerardo Albuni), 페르그리노(Pergrino da Castello), 안드레아(Andrea da Perugia, 安德烈), 니콜라(Nicola da Baniia), 울릭(Ulric von Seyfredsdor), 구글리엘루모(Guglielumo da Villanova), 안드레우키(Andreucci di Assisi) 등 7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그를 돕게 했다. 이들 중 4명은 중국으로 가던 중 인도에서 죽었고, 나머지 3명이 1313년 대도에 도착하였다. 페르그리노와 안드레아는 수도 대도에서 사역하였고, 제라도는 천주의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
제라도는 재직 기간 중 한 사람의 부유한 아르메니아 부인의 기증으로 교당을 건축하였으며, 1318년 제라도가 죽은 뒤 페르그리노가 천주의 제2대 주교가 되었다. 페르그리노가 1323년 죽은 뒤 안드레아가 제3대 천주의 주교가 되어 1326년까지 사역하면서 교당 하나를 추가 건축하였다. 안드레아 주교의 묘비가 현재 천주해외교통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교황이 파견한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오도릭(Odoric de Pordenone)이 1322년 천주에 도착하였고, 대도에 도착한 후 몬테 코르비노의 사역을 3년간 도왔다. 오도릭이 남긴 《동유록(東游錄)》에는 황제를 배알한 내용을 비롯하여 몬테 코르비노와 함께 사역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대도의 대주교 몬테 코르비노는 1328년 81세의 고령으로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북경에서 선교를 주재하면서 6천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몬테 코르비노 사망 5년 뒤 교황 지오반니 12세(Giovanni Ⅻ, 1316-1334 재위)는 비로소 그 소식을 알고 니콜라스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부임 중 세상을 떠나 중국에 도착하지 못하면서 중국천주교회는 지도자가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1336년 원 순제(順帝)는 16명의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안드레아 페루기아를 단장으로 하고, 부사로는 윌리암(William of Nassio, 有威廉)과 토가이(Thogay, 土該) 등이 맡았다. 1338년 이 사절단은 아비뇽에 도착하여 교황 베네딕트 12세(Benidict Ⅻ, 1334-1342 재위)를 알현하고, 서찰과 예물을 올렸으며, 중국에 주교를 속히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은 1338년 12월 마릭뇰리(Giovanni dei Marignolli)와 4명의 프란시스코 수도회 선교사가 이끄는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아비뇽을 떠나 다음해 나폴리에 도착하고, 1342년 7월 원나라 수도에 도착하였다. 50인이 출발하였으나 중국에 도착한 인원은 32인이었다. 순제는 수도 자인전(慈仁殿)에서 그들을 접견하였다. 마릭뇰리가 가져온 예물 중에 기이한 말 한 필이 있었는데, “길이가 1장 1척 3촌, 높이는 6척 4촌으로 몸체는 순흑색이며, 뒤의 두 발굽은 백색이었다.”2) 이 말은 조정을 놀라게 하여 당시 조정의 신하와 묵객들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그 일을 기록하였다. 마릭뇰리는 이미 원나라의 정국이 불안하고 국력이 기울고 있음을 깨닫고 조기 귀환을 결심하였다. 1346년 그는 천주에서 배를 타고 말라카, 실론, 예루살렘을 거쳐 유럽으로 돌아갔으며, 1352년 아비뇽에 도착하여 교황 이노센트 6세Innocent Ⅵ(1352-1363 재위)에게 복명하였다. 마릭뇰리가 귀국한 뒤 전체 중국천주교회는 다시 주교가 없게 되고, 교무도 점차 이완되었다. 또한 당시의 천주교도는 대부분이 몽골인과 색목인이었기에, 명이 건국되자 중원을 떠나 천주교도 마치 썰물처럼 퇴조하게 되었다.
미주 1) 마르코 폴로(채희순 역), 동방견문록 (학원출판공사, 1987), 13-14쪽. 2) 《元史》 卷40, 〈順帝本紀〉.
사진 | https://blog.naver.com/gustnr2603/90170206596 (2018. 8.2) 김종건 | 문학박사(중국사), 한동대학교 글로벌리더십학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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