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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사절 카르피니의 몽골행 몽골제국은 227년 제2대 태종 오고타이(窩闊台, 1229-1241 재위)칸 즉위 후, 1234년 중국 화북(華北)을 지배하고 있던 여진족의 금(金)나라를 멸망시켰고, 1236년 바투(拔都)를 사령관으로 서방원정을 본격화하였다. 그동안 몽골군은 러시아와 폴란드 지역을 넘어 독일 동부지역까지 이르렀고, 그 위세는 1241년 오고타이가 사망하면서 서방원정이 중단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로마교황청과 유럽 각국 군주들은 몽골제국 통치자가 그리스도교를 보호하고 심지어 대칸((大汗)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과 연합하면 유럽 남부를 압박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도 하였다.
1243년 로마교황으로 선출된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 1194 - 1250)와 힘겨루기에서 이긴 이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Ⅳ, 1243? - 1254)는 1244년 말 리용공의회 소집을 공포하여 대외 선교활동을 강화하기로 결정하였다.
리용공의회가 정식으로 개최되기 전인 1245년 3월 교황은 이미 몽골로 파견할 사절로 프란치스코회 지오반니 카르피니(Giovanni de Piano Carpini, 1185?-1252)를 선임하였다. 카르피니는 이탈리아 피아노 카르피니(Piano Carpini, 지금의 della Magione)의 귀족 가정 출신이었고 당시 65세의 노인이었다.
카르피니는 1245년 4월 16일 보헤미아인 스테판과 폴란드인 수사 베네딕트(Benedict)와 더불어 프랑스의 리용을 출발하였다. 다음 해인 1246년 2월 초 러시아의 키에프에 도착하였고, 이후 볼가강 하류 킵차크칸국 수도 사라이에 도착하여 바투를 알현하고 1개월여 체류하였다. 이후 아랄해 북부와 준가르 분지를 거쳐 7월 22일 비로소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도착하였고, 마침 다음 날 열린 몽골제국 제3대 정종(定宗, 재위 1246-1248) 구육(貴由)칸의 즉위식에도 참여하여 교황이 몽골 황제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를 전달하였다.
서신에서 “1245년 3월 교황은 타타르왕과 국민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씁니다. (…) 오늘날은 이 교황이 그 대리인의 계승자로서 타타르왕과 인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카핀 지오바니와 사자 일행을 시켜 이 서신을 전하는 것입니다. (…) 오늘 교황인 내가 하나님의 화평 건설을 받들고 온 인류가 하나님을 외경하고 공동연합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타타르왕을 권면합니다. 다시는 공격하지 마시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1)라고 하여 평화를 위한 연합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구육칸은 11월 17일자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1920년 바티칸고문서관에서 발견)을 위구르어와 페르시아어로 쓰고 옥새를 찍어 카르피니에게 전달하였다. 그 서신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 축복 안에서 로마교황에게 말하노라. 우리는 정을 나누어 본 적도 없는 사이지만 중신들과 교황의 공문을 받았다. 당신들이 화해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화해를 원한다면 속히 황태자와 신하들을 내게로 보낼지어다. (…) 오늘부터 당신이 나의 충실한 신하가 되고 모든 권력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교황과 황태자와 신하들이 다 같이 속히 투항하고 나오라.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진정으로 나와 대적하겠다는 것으로 알 것이다. 그 후의 일들은 내가 예측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아실 것이다.”2)라고 하였다.

교황이 제기한 강화의 요구에 대해 구육칸은 교황이 유럽의 제 왕공을 인솔하여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와서 알현하도록 요구했고, 동시에 구육은 그리스도교에 귀의하는 것을 명확하게 거절하였다.
서신을 받고 귀국길에 오른 카르피니 일행은 이듬해인 1247년 6월 9일 키에프를 경유하여 그해 11월 리용에 도착하여 교황에게 복명하였다. 카르피니는 이후 《몽골행기(Ystoria Mongalorum)》를 써서 몽골에 사신으로 갔던 견문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아쉽게도 구육칸은 1248년 4월 죽음으로써 교황과 구육칸과 추가 왕래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지오반니 카르피니의 몽골 사절 왕래는 십자군전쟁으로 이슬람과 대치 중이던 교황으로서는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고, 몽골제국으로서도 서방원정을 중단한 상태에서 서유럽의 최고 권위자와 평화적인 교류의 문호를 연 것으로서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과정이었다. 양측의 서신에서 모두 하나님의 화평을 거론하였으나 각자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화평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서신 교환이었다. 교황 차원의 사절 파견의 주요 목적이었던 몽골기독교화의 목적은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서방교회의 존재가 몽골 황실에 구체적으로 전해졌다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교황 사절 롬바르디 일행 1247년 교황은 별도로 도미니크회 선교사 롬바르디(Anselme de Lombardi), 시몬 성 퀜틴(Simon de Saint-Quentin), 알베리드(Alberid)와 알렉산더(Alexander)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 사절단은 페르시아 시티엔(Sitens)에서 몽골대장 바이주(拜住)를 만났다. 이들 수사들이 휴대한 교황의 서찰은 그 내용이 구육칸에게 보낸 서찰 내용과 유사하며, 몽골 장령들에게 그리스도교에 귀의하도록 권고하면서, 다시는 서방그리스도교 국가를 정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서찰은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고, 다시 몽골어로 번역되었다.
바이주가 교황에게 회답한 서신은 몽골군대의 정벌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하는 것이며, 교황은 가능하면 빨리 사신을 보내어 수교하라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항복한 자는 생명을 부지할 수 있으나 저항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라는 내용의 칭기즈칸이 서방제국에 대해 항복을 권유한 문서를 첨부하였다.
롬바르디 일행의 사행(使行)은 몽골 수도의 칸을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몽골 서부에 주둔하는 사령관과 만나서 기독교 문제를 함께 거론하였다는 점에서 중국교회사 차원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아울러 이후 서방과 몽골 간 사신 왕래를 가져오는 단서이기도 하다.
프랑스 국왕 사신의 몽골행 1248년 12월 20일 프랑스왕 루이 9세(Louis IX, 재위 1226-1270)는 키프로스섬에서 페르시아 주둔 몽골장군 엘카타이(伊魯迦臺, Elchatay)의 명을 받고 온 두 명의 몽골 사신 다비드(David)와 마르쿠스(Marchus)를 접견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동정을 표현하고, 십자가를 향해 기도하는 사람은 어느 종파에 속하든지 평등하게 대우할 것과 루이왕과 화친을 원하는 문서를 올렸다.
당시 제7차 십자 원정군을 지휘하면서 이집트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루이 9세는 이 문서를 받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에게 관련된 내용을 서신으로 보내고, 동시에 도미니크회 선교사 롱쥐모(Andrew Lonjumeau)가 카르카손(Jean de Carcassonne), 기욤(Guillaume) 등을 인솔하여 다비드, 마르쿠스와 함께 1249년 1월 27일 키프로스를 떠나 몽골로 출발하게 하였다. 몽골에 도착한 이들은 구육칸이 이미 죽은 뒤였으므로 황후 카이미쉬를 알현하고 예물을 올렸으며, 몽골로부터 회신을 받아 유럽으로 귀향하여 복명하였다. 답신에서는 평화를 원한다면 반드시 직접 와서 진공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루이 9세는 회신을 받고 크게 실망하였다.
비록 한 번에 소기의 목적에 이르지 못한 루이 9세였지만 몽골 경내에 다수의 그리스도교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추가 사절을 파견하였다. 루이 9세는 1252년 5월 7일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뤼브릭(Vilgelem de Rubruk(1200? - 1256?)과 이탈리아 국적의 크레몬(Barthelemi de Cremone)을 사절로 파견하였다. 이 사절단에는 고셋(Gosset)이라는 집사와 통역 한 명이 동행하였다. 이 사절단은 로마교황청을 대표한 선교를 중시하였고, 의식적으로 천주교 성직자의 신분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1254년 1월 4일 뤼브릭 일행은 카라코룸에서 몽골 제4대 황제 헌종(憲宗, 재위 1251 - 1259) 몽케(蒙哥)칸을 배알했다. 몽골 대칸과 몽골ㅠ귀족은 어떤 종교도 편애하지 말라는 칭기즈칸의 유훈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뤼브릭의 몽골 거주와 선교를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뤼브릭은 여전히 그의 선교 사명을 잊지 않고 몽케칸을 마지막으로 알현할 때 다시 그의 소망을 진술하였는데, “우리들의 책임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상제의 뜻에 따라 생활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곳에 왔다. 만약 대칸이 허락한다면 우리들은 기꺼이 이곳에 있을 것이다.”3)라고 하였다.
뤼브릭 일행은 선교의 희망을 바로 실현할 수는 없었지만 귀국 후 《동방여행기》를 편찬하여, 몽골 사신으로 다녀온 정황, 몽골의 국정과 생활, 풍속, 몽골 각부와 경내 기타 그리스도교도의 종교생활과 몽골인이 유럽으로부터 포로로 잡아온 프랑스인, 독일인, 헝가리인, 러시아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수록하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몽골 사절 파견은 루이 9세 자신에게는 선교 성과는 물론 외교적 성과도 구체적으로 가져다주지 못하였고 이후 양측은 구체적인 교류 없이 반세기 가까이 지나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이나 국왕이 성직자들을 몽골 황실로 사신으로 파견하여 교류를 하게 된 일련의 과정들은 원대 황실 차원에서 서방 기독교회에 대한 인식의 심화를 가져왔으며, 궁극적으로는 13세기 말 이후 서방 기독교회가 동방선교를 본격 전개하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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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관숙, 《중국기독교회사》 (쿰란출판사, 1995), p.94. 2) 이관숙, 《중국기독교회사》 (쿰란출판사, 1995), p.95. 3) 道森 著, 呂浦 譯, 周良宵 注, 《出使蒙古記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3), p.216; 安可佳, 中國天主敎簡史》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1), p.17 등 참조.
김종건 | 문학박사(중국사), 한동대학교 글로벌리더십학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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