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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생각나는 인물 6월입니다. 6월이 되면 저절로 생각나는 것이 6․25전쟁입니다. 6월, 6․25전쟁, 그리고 우리의 과제인 중국사역, 셋이 만나는 지점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휴전이 되기 전해 여름에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맹의순 전도사입니다. 6․25전쟁 때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발생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중국군 포로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 거제도에 설치되었던 포로수용소에는 인민군 포로 15만 명과 함께 중국군 포로 2만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맹의순이라는 전도사가 중국군 포로들을 상대로 헌신적인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맹의순 전도사는 정연희(鄭然喜) 선생의 장편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통해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1983년에 초판이 나온 이후 현재까지 백수십 판이 나왔고, 오페라로도 공연이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그의 육필일기 영인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홍성사에 의해 출간되었는데 그 책을 보니 그의 글씨가 매우 단정하고 달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맹의순 전도사는 1926년에 평양에서 태어나서 해방되던 해에 평양공립제2중학교를 졸업했고, 남으로 와서 남대문교회에 출석하며 연희전문(현 연세대)에 입학했다가 다시 조선신학(현 한신대)로 학교를 바꿨습니다. 조선신학 3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서울을 탈출해서 남으로 가다가 대구 북부지역에서 미군에게 잡혔습니다. 미군은 맹의순을 적군으로 오인하여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수용했습니다. 맹의순 전도사는 처음에는 회의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곧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수용소 안에 광야교회를 설립하고 포로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중국군 포로들도 그의 중요한 목회대상이었습니다. 맹의순 전도사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의 지인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맹의순은 광야교회에서 더 일하고 싶어 하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석방이 결정되었습니다. 맹 전도사는 끝까지 변함없는 정성으로 포로들을 보살피던 중에 뇌막염으로 미군병원에 입원했다가 1952년 8월 11일 10시 57분, 석방을 3일 앞두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소설에는 맹 전도사가 늘 그랬듯이 깊은 밤에 중국군 포로 병동에 와서 평화의 미소를 머금고 환자들을 정성껏 보살피며,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 주고, 높은 곳을 바라보시며 다시 한 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고, 중국군 포로들도 그 말을 따라 하고, 그리고 마지막 환자를 씻겨낸 물통과 대야를 들고 일어서다가 쓰러졌습니다. 미국인 의사들이 달려오고 앰뷸런스가 와서 그를 실어가고,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으로 그의 최후가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생명수를 받아 마시기 위해 보내어진 사람들” 맹의순 전도사의 추모예배는 1952년 8월 22일 오후 7시, 부산 보수교회에서 열렸는데 소설에는 중국군 포로들이 ‘거제리 포로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들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온 편지가 소개됩니다. 이 편지는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인이셨던 맹의순 선생이 가시다니. 오늘 밤, 귀 교회에서 우리의 위로자였고, 사랑과 존경의 표적이었던 맹 선생의 추도예배를 드린다기에 우리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서둘러서 이 글월을 드립니다.”라는 말로 시작이 되는데, 다음 대목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중국군들의 편지는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맹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라는 말, 다시 말해 천국에서 그를 다시 만날 소망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맹의순 전도사가 그들에게 마지막 날 밤에 가르쳐준 찬송이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계셔”였습니다. 그때 맹의순 전도사가 석방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찬송을 가르쳐준 것으로 여겨집니다.
6월에 맹의순 전도사를 생각하면서 특히 그와 중국사역을 연결하여 생각하면서 몇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맹의순 전도사는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된 이후 한국교회의 첫 중국선교사가 아니었나’하는 점입니다. ‘가서 선교한 사람’이 아니고 ‘와 있는 사람들’에게 선교했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맹의순 전도사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점이 궁금해집니다. 휴전이 되고 포로들을 송환할 때 그들도 중국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 뒤 중국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졌고, 1960년대 중반에는 문화대혁명의 회오리가 일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가운데에서 어떻게 지냈을 지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6․25전쟁 때 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일에 특히 힘쓴 분이 볼켈(H. Voelkel, 玉鎬烈) 선교사입니다. 그때 전도를 받은 반공포로들 가운데 목회자들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한 기록에는 그 숫자가 500명이라고 나옵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평안북도가 고향인 반공포로 출신 장교가 한 분 있었는데 이 분도 전역을 하고 신학교에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시 이때 복음을 받아들인 중국군 포로들 가운데 교역자가 탄생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그때 중국의 신학교육기관들은 모두 문을 닫아서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북방사역을 위해 힘써야 하는 달 그때는 중국군 포로들이 우리 옆에 있었지만 지금은 재중동포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가운데에서 제2, 제3의 맹의순 전도사가 이어져서,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이 땅에 왔지만 알고 보니 구원의 복음을 들으라고 하나님이 이곳으로 보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맹의순 전도사의 이야기를 적은 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2009년에 ≪Free On The Inside≫라는 제목으로 영문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수익금은 연변과학기술대학 생물화공학부 실험장비 구입으로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영문판 번역자인 최호열 박사(런던한인장로교회 장로)는 미생물학 학자로서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두 학기를 가르친 일이 있는데, 재정 문제로 실험기기가 빈약한 것을 가슴 아파하다가 이 책을 번역하여 미국 콜로라도 Authentic 출판사를 통해 출판하면서 이같이 결정했다고 합니다. 맹의순 전도사는 하늘나라로 가서도 중국사역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품위 있는 말은 아니지만 몹시 놀랐을 때 ‘놀랄 노 자’라는 말을 쓰는데, ‘놀랄 노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뒤에 하나님의 어떤 손길이 숨어 있는지 찾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6월은 ‘중국을 포함한 북방사역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힘써야 하는 달입니다.’라는 말로서 이 달의 발행인 통신을 마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 네이버 캡처 유관지|중국어문선교회 고문, 본지 발행인. 성화감리교회(분당)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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