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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3 통권 188호     필자 : 김종건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경교(景敎)의 중국 전래

경교의 기원
중국 당(唐)나라가 통일제국을 이루어 번영하는 기간에 기독교의 분파 중 하나인 경교가 중국에 전입되어 크게 번창하였다. 경교는 5세기 초 신학적 논쟁으로 대립하던 안티오키아파와 알렉산드리아파 사이의 갈등이 파문으로 이어지면서 로마제국을 벗어나 기독교의 독립 분파를 이룬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ism)에 대하여 중국에서 불리던 이름이다.

 

 당시 안티오키아파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면서 마리아의 신모설을 용납하지 않았고, 알렉산드리아파는 마리아의 신모설을 고수하면서 갈등을 벌이고 있던 중 428년 공석이 된 교부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마침내 안티오키아파의 지도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 - 451)가 교부로 임명되자 알렉산드리아파의 지도자 키릴루스(Cyrilus, ? - 444)는 네스토리우를 반대하는 내용을 첨부하여 동로마 황제에게 파문청원서를 제출하였다. 
 

431년 에페수스(Ephesus)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파는 상대 대표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에 대한 파문을 가결하였고, 뒤늦게 도착한 네스토리우스파 대표들이 이를 항의하고 회의를 다시 열어 주도자들에 대한 파문을 의결하자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2세가 두 지도자 모두에게 소요 야기의 책임을 물어 감독직에서 파문하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네스토리우스는 파문을 당한 뒤 에페수스감옥 투옥을 거쳐 아라비아로 유배되었고 다시 아프리카로 보내졌다가 451년에 사망하였다.1) 네스토리우스가 파문을 당한 뒤 그 추종자들은 페르시아로 옮겨 5세기 말 독립교회로 출범하여 사산조 페르시아 황실의 후원을 받는 동안에는 서아시아를 기반으로 교세를 결집하였으나 6세기에 들어서면서 황제로부터 지원을 잃게 되면서 인도와 중국으로 교회의 중심을 이동하게 되었다.
 

《경교의 중국 전입과 발전》
중국 당왕조(618 - 907)는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한 수왕조(隋, 581 - 618)의 뒤를 이은 통일제국이다. 두 번째 황제 태종(太宗, 626-649 재위) 이세민(李世民)의 치세에 동아시아 전역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면서 대외 관계에 있어서도 포용적 정책을 취하게 되었고 이후 동서 문화 교류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 환경 속에 당대(唐代)에는 미리 전입되어 있던 조로아스터교뿐만 아니라 마니교와 이슬람교도 새로 전파되어 들어와 민간에 크게 퍼져 나갔으며 경교도 중국에서 본격 기독교회사를 열었다.
 

명말 희종(喜宗) 천계(天啓) 5년(1625년) 중국 서안(西安) 교외에서 비석 하나가 발견되었다. 비석의 머리 제액(題額)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큰 글자 9자가 3행으로 쓰여 있다. 비문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병송(大秦景敎流行中國碑幷頌)>이라는 표제 하에 32행(매행 62자) 1900여 한자로 되어 있으며, 중국에 경교가 전래된 경위와 이후 번성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관련된 경교 성직자에 대한 내용은 좌우 아래쪽과 하단에 한자와 시리아문자로 병기 추가되어 있다.

이 비는 경교도 경정(景淨)이 비문을 짓고 여수엄(呂秀嚴)의 글씨로 당 덕종(德宗) 건중(建中) 2년(781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비석은 귀부 포함한 높이가 약 300cm, 비신의 폭이 약 100cm, 두께가 약 28cm이며, 머리의 제액 상단에는 십자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비는 현재 서안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에 옮겨 보관되고 있다. 


이 비문에 따르면 경교라는 이름이 “참된 길은 신묘하여 이름하기 어려우나 그 효용이 밝게 나타나므로 경교라 칭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약 24선지의 예언, 삼위일체의 교리, 천국 8복, 구속사업, 27권의 경전, 7일 마다 예배 등 경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하에 이어지는 이 비문의 내용에 따라 경교가 중국에 전입되어 발전을 보이는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 

 

 

비문에서는 전입 상황에 관하여 “대진(大秦)의 아라본(Alopen, 阿羅本)이라는 덕 있는 인물이 진리의 경전을 가지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정관 9년 당나라 장안(長安)성에 도착하였고, 당 황제 태종이 재상 방현령(房玄齡)에게 명하여 장안 서쪽 교외로 나가서 그들을 국빈으로 영접하게 하였다”라고 한다. 여기서 정관 9년은 635년이고, 대진국이라 함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의미한다. 아라본은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라비아로부터 이슬람제국이 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중 외교적 목적으로 중국으로 파견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황제가 미리 역관까지 준비하여 아라본 일행을 마중한 것에 근거하여 미리 중국에 들어와서 활동하던 경교 관련 인물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데 이 역시 설득력을 갖고 있다.
 

태종은 정관 12년(638)에 조서를 내려 “대진국의 숭고한 아라본이 멀리서 가져와서 조정에 바쳐 올린 경전과 성상을 살펴보니 그 가르침이 기묘하면서도 자연스럽고 (···) 그 설명이 간단 명료하므로 이 도의 원리대로 살면 세상 염려를 잊을 수 있고 물질과 인간관계를 바르게 할 수 있기에 이 도를 온 천하에 실행함이 가하여 장안 의녕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를 건축하여 경승(景僧) 21인을 상주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에 온 경교 사절단을 외교적 관례에 따라 공식으로 맞이한 데 그치지 않고 이 사절단에 속한 경교 성직자들이 수도 장안에 상주하면서 교리를 전파할 수 있게, 사원을 지을 수 있도록 지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태종은 이 대진사 벽에 황제의 초상을 걸게 하였는데, 이로써 경교는 황제의 공인 하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고종(高宗, 650 - 683 재위) 때에는 전국 각 주(州)에 경교 회당을 세우게 하고 아라본을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에 봉함으로써 경교가 전국 10도(道)에 퍼져나가고 회당마다 백성들이 가득하게 되었다.
 

고종 말년에 불교도들에 의해 경교 공격이 있었으나 현종(玄宗, 713 - 756 재위) 연간에는 황제가 영국(寧國) 등 친왕 다섯을 보내어 예배하게 하였고, 뒤에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보내어 황제 5위의 상을 교당에 안치하게 하였으며, 현종 후기 천보(天寶) 3년(744년)에는 길화(佶和) 등 경교 성직자 17명을 흥경궁(興慶宮)으로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는 등 경교의 부흥을 지원하였다. 안록산의 난(755 - 763) 진압을 이끌었던 곽자의(郭子儀)의 부장(副將) 가운데 경교도였던 이사(伊斯)가 있었는데, 그는 종군 중에 장안과 낙양 수복 등 큰 공을 세웠고, 녹봉과 하사금으로 구제활동을 전개함과 더불어 경교 회당 건축과 경교 성직자 후원에 전력을 기울였다.
 

숙종(肅宗, 757 - 762 재위) 때는 영무군(靈武郡) 등 5개 군에 경교 회당을 세웠고, 대종(代宗, 763 - 779 재위)은 성탄절에 특사품을 하사하여 경교에 대해 예우를 갖추었으며, 덕종(德宗, 780 - 805 재위) 즉위 초인 781년에 황제의 후원 하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경교는 635년 알로폰이 당의 수도 장안에 도착한 이후 718년 경교비가 세워지기까지 150여 년 동안 융성하였고, 당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가 대표적 외래종교로서 ‘삼이교(三夷敎)’라 불리어졌다. 이 경교비에 대해서는 일부 연구자들이 비문의 시리아어가 후대의 것이라는 논거에 따라 후대에 다시 제작되면서 시리아문이 하단에 추가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1625년 처음 경교비가 발견되었을 때 서안 대진사를 방문하여 확인한 예수회 신부 알바로 세메도(Alvaro Semedo, 德昭)는 회고록에서 재제작의 가능성을 부정한 바 있다. 이 비석이 당 덕종 연간에 제작된 원본인지 이후 특정 필요에 의해 추가 제작되었든지 당 초·중기 중국에서 기독교의 분파인 경교가 성행하였음은 분명히 보여주는 자료이다. 
 

당대에 경교가 중국에서 성행하였음은 《당회요(唐會要)》 49卷(권)의 “페르시아의 경교는 대진에서 나왔으며, 전파되어 와서 오랫동안 중국에 유행되어, 이에 교당을 세워 이로 인해 이름을 정하였는데, 사람들에게 드러내려면 반드시 그 근본을 고찰해야 하므로 양경(兩京)의 파사사를 마땅히 대진사로 고쳐야 하고, 천하의 제부군(諸府郡)의 교당도 이에 준한다.”라고 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또 돈황(燉煌)에서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 《일신론(一神論)》, 《선원지본경(宣元至本經)》, 《대성통진귀법찬(大聖通眞歸法贊)》,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 《삼위몽도찬(三威蒙度贊)》, 《존경(尊經)》 등 경교 문헌 7종이 발굴 보고되고 있다는 점과 현재 파리박물관에 보관 중인 경교문헌 《존경》에 <한문경교경전서목(漢文景敎經典書目)>으로 모두 30여 종이 수록되어 있다3)는 점도 당대 중국에서 경교가 성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교파 갈등 중 교회의 거점을 동방으로 옮기게 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경교가 중국에 전입한 것은 아라본이 장안에 도착한 것으로만 보아도 635년이 되며, 그의 도착 이전에 이미 경교 관련 인물들이 중국으로 진입하였을 개연성이 큰 만큼 중국에서 기독교회사의 시작은 그 이전까지 소급하여 올라갈 수 있다. 당대 중국에서 경교는 당중기까지는 적어도 황제의 적극적 지원 또는 우호적 후원 하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주요 외래 종교로서 성행하였다.

 

 

 

미주              
1) 이상 경교 기원에 관해서는 이관숙, 《중국기독교사》, 56-59쪽 참조.
2) 비문의 전문과 번역문은 이관숙, 《중국기독교사》, 67-75쪽 참조. 여기에 오류가 몇 군데 있으므로 이는 탁본 원문을 근거하여 바로잡음.
3) 安可佳, 《國天主敎簡史》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1), 10-11쪽.






 

김종건 | 문학박사(중국사), 한동대학교 글로벌리더십학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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