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현덕손1.JPG) 아세아방송-중국 사역의 주역 대학을 졸업하고 고교 국어교사 생활을 5년 가까이 하다가 1974년 여름에 아세아방송에 교양 PD로 입사했다. 첫 직책은 제작과장이었다. 대학시절에 학교교육방송국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실무국장을 지냈고, 한 민간방송에서 요즘 말로 하면 인턴사원 비슷한 생활을 했던 것을 인정받아 그렇게 된 것이다. 미국의 FEBC를 모체로 하는 아세아방송은 1973년 6월 30일에 개국했는데 필자가 입사할 무렵에 비로소 방송사다운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아세아방송은 그 때의 용어로 ‘공산권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문화공보부에서는 이 방송을 ‘대외방송’으로 분류해서 관리했다.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가 그때는 문화공보부였는데, 지금은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을 관장하고 있지만 그때는 문공부 방송관리국이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아세아방송의 송신소는 처음부터 변함없이 제주도에 있고, 서울 연주소는 을지로 1가에 있다가 1973년 말에 정동에 있었던 CCC빌딩으로 옮겼고(이때 필자가 입사했다), 이듬해 10월에 태평로에 있는 대한일보빌딩 3층으로 옮겨 몇 해를 보내고 1978년 말에 마포 상수동으로 이전했다. 아세아방송 이전에 1956년에 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에 의해 극동방송이 설립되었는데 극동방송은 개국 초기에는 한국어방송 1시간 30분, 영어방송 2시간 30분, 중국어방송 1시간, 몽골어방송 5분씩 송출했다. 극동방송은 처음에는 인천에 연주소와 송신소를 두었는데 중국어방송이 더 효과 있게 중국에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극동방송이 방송설립 허가를 받자 초대 국장인 탐 왓손 선교사(한국 이름 和道善)는 개펄에 주저앉아 중국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한국교회와 중국 사역은 방송을 통해 첫 만남을 큼직하게 기록했다. 이 점은 중국 사역의 역사에서 분명하게, 또 큼직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아세아방송의 개국은 방송을 통한 중국 사역의 양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극동방송의 출력은 50kw였음에 비해 아세아방송은 그 5배인 250kw였다. 그리고 지향성(指向性)과 전리층(电离层)의 반사를 이용해 전파가 먼 거리까지 도달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세아방송은 FEBC가 1957년에 오키나와에 세워 운영하던 대(对) 중국방송인 KSBA가 이 이전해 온 것인데, FEBC의 실무책임자로부터 “이전 후보지를 찾기 위해 항공 정찰 등 여러 방법을 동원했는데 자유진영에서,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도시인 상하이(上海)와 직선으로 제일 가까운 곳이 제주도라는 사실을 알고 제주도를 후보지로 결정했다.”는 말을 들었다. 극동방송이 1970년대 초반에 구원파 파동 등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자 극동방송을 운영하던 팀 선교부는 극동방송을 다른 기관에 양여(让与)하려고 했다. 결국 아세아방송을 세워 운영하고 있던 FEBC가 1977년 1월 1일에 극동방송의 새 주인이 되었다. 공식으로는 ‘공동운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인수였다. 법적으로는 아세아방송이 극동방송을 인수했지만 극동방송이 십여 년 먼저 설립되었고, 수도권을 활동무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극동방송의 인지도가 높았고 나중에는 법인도 극동방송이라는 이름으로 통합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 사역의 주역은 아세아방송이었음이 또한 분명하게, 큼직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극동방송을 듣고 중국에서 편지가 많이 왔다.”고들 했는데 사실은 대부분 아세아방송에 대한 반응이었다. 필자는 아세아방송에 입사한 1974년을 ‘나의 북방선교 원년’으로 잡고 있다. ‘너는 중국 사역 덕분에 목사 직분을 갖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안 돼!’ 그때 한국교회의 중국 사역에 대한 관심은 아주 미미했다. 중국은 미수교국일 뿐 아니라 ‘적성국’이였고, ‘중국’이라고 부를 수 없고 ‘중공’이라고 불러야 할 때였으니 말이다. 방송을 하면서도 ‘이 방송을 중공에서 듣나?’ ‘아니, 중공까지 가기는 하나?’하는 의구심이 있어서 신명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직원들은 한국어방송에 주력하고 있었고 중국어방송은 홍콩 FEBC(远东广播公司)가 대부분 제작하고 아세아방송이나 극동방송은 송출만 담당하는 구조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랬는데 1978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방송에 대한 반응은 편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는데 1969년에서 1978년까지 10년 동안 FEBC가 중국의 청취자로부터 받은 편지는 모두 124통이었다. FEBC 체인스테이션으로 중국방송을 하고 있는 아세아방송, 극동방송, 필리핀 사이판의 방송에 대한 반응을 모두 합한 것이 그랬다. 그런데 1978년 한 해에 53통의 편지가 왔고 1979년에는 무려 10,781통의 편지가 왔다. 아세아방송은 이 사실을 열심히 홍보했다. 당시 교계의 유력한 매체였던 <크리스찬신문>은 이 사실을 1979년 2월 24일자 신문의 머리기사로 보도하면서 제목을 “아세아방송•극동방송 중공지역 청취자 편지 격증 미•중공수교 이후 선교방송에 감사와 기쁨 표시”라고 했다. 이 제목에서 “미•중공수교 이후”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중국 청취자들의 편지가 격증한 것의 주원인은 덩샤오핑(邓小平)의 개방정책이었다. 방송사에서 보도자료를 잘못 제공했기 때문인데 그 때는 이 모양으로 중국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도 이런 보도들은 중국 사역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일들을 널리 그리고 열심히 열리는 역할을 필자가 담당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중국어방송의 프로그램 제작, 편지 수신, 응신은 홍콩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아세아방송은 그 통계자료와 편지 샘플을 받아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거, 집 크게 지어 일부를 전세 놓고 전세 든 사람이 하는 일을 우리 일인 것처럼 떠벌리는 것 아닙니까?’하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1979년 4월부터 재중동포들의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방송에 대한 감사, 이산가족을 찾아달라, 성경을 보내달라, 국어사전을 보내달라, 고향의 발전된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을 보내달라 등 여러 가지였다. 그것을 처리하는 일 역시 필자의 몫이 되었다. 이 여러 가지 일로 1979년은 필자가 중국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해가 되었다. 중국에서 온 편지들은 필자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는, 온갖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생생한 증언들을 접하면서 ‘아, 신앙이란 이렇게 큰 힘을 가진 것인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타콤은 로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카타콤은 잘 아는 것과 같이 초대교회 시절, 성도들이 숨어서 예배를 드리던 지하공동묘지를 말한다. 하나는 실질적인 일인데 목사가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목사가 되려고 했는데 속해 있는 교단에서는 교회를 3년 동안 담임해야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어서 수도권의 농촌교회에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교단정치에 재미를 붙인 분들 때문에 어이없는 일들을 여러 번 겪었다. 한 번은 남한산성 밑에 있는 교인이 12명인 교회에 정식으로 파송을 받아 부임예배를 드리러 갔더니 부임하겠다는 전도사가 셋이 와 있었다. 각 ‘파(派)’에서 하나씩 파송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충격을 받아 한동안은 교회를 떠나 무교회주의 그룹과 가까이 지내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국어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중국 성도들의 신앙에 자극을 받아 다시 목사안수 과정에 들어섰다. 10년이나 뒤늦은 출발이어서 아주 힘들었지만 이겨내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래서 ‘너는 중국 사역 덕분에 목사 직분을 갖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안 돼!’라고 때때로 자신을 일깨우고 한다. 낙수(落穗) 모음 중국 사역을 하는 동안 빚어진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몇을 소개한다. 필자는 중국어를 하지 못한다. 중국에서 온 편지들을 많이 대해서 글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쓰기도 하는데 말은 벙어리이다. 필요한 경우에는 필담(笔谈)을 한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때 선수촌 종교관 관목(馆牧)으로 일하면서 종교관을 찾아온 중국 선수와 임원들에게 이 방법을 여러 번 썼다. 상대방은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말을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는 했다. 더구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는 간자(简字)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상대방이 필자가 쓴 글을 보고 중국어로 뭐라고 하면 얼른 하는 말이 “워 뿌지 쭝국화”였다. 핑계이지만 중국어를 배우려고 할 때 가르치는 분이 성조(声调)를 가지고 겁을 많이 준 것이 이렇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한번은 선교중국어 강좌 개강예배에서 설교를 하면서 이 사실을 고백하고 “나는 군인으로 말하면 총을 쏠 줄 모르는 가짜 군인입니다. 여러분은 명사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더니 그 선교회의 책임자가 “수강생들에게 참 효과적인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기에 ‘이런 것도 은혜인가?’ 한 일도 있었다. 1982년에 재중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제목을 “만주 동포에게”라고 했다. KBS 사회교육국(지금의 한민족방송)에 같은 성격을 가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제목이 “북간도 동포에게”였다. ‘이왕이면 범위를 넓히지 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그 만주란 말 좀 쓰지 않을 수 없습니까?’하는 편지를 여러 통 받았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계속 썼다. 나중에야 ‘만주’는 일본이 세운 괴뢰국가인 만주국과 연결하여 중국에서는 아주 싫어하는 이름이고, 이를 ‘위만(伪满)’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동포는 “내가 선생님을 ‘경성 동포’라고 부른다면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너무나 미안해서 프로그램 제목을 ‘중국동포에게’로 바꿨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때는 ‘중공’이라는 말을 썼는데 재중동포들 가운데는 이 이름을 중국이라고 바꿀 수 없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 요청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때는 정부의 한 기관에서 언론을 심하게 통제할 때였는데 담당 ‘조정관’이 눈을 부라렸다.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부라렸던 눈을 껌벅이며 다른 사람들과 상의를 해보겠다고 하고 돌아가더니 얼마 뒤에 다시 와서 눈감아주겠다고 했다. 이래서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중국’이라는 말을 최초로 공식 사용했다는 비공인 기록을 갖게 되었다. 그 뒤에 이념이나 정치적인 색깔이 있는 표현은 될 수 있는 대로 삼가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먼 땅 좋은 기별”, “나의 살던 고향은”, “사랑의 가교” 등 여러 가지로 바뀌어 갔다. 1984년에 <중공의 기독교정책>이라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한 일이 있었다. 조나단 차오(赵天恩) 목사(소천)가 이끄는 중국교회연구센터(CCRC)가 발행한 <中共对基督教政策>을 편역한 것인데, 대만의 기독교인 교포 세 분이 초역을 하고 필자가 검토와 윤문작업을 맡았다. 원본에 ‘신의종(信义宗)’이라는 말과 ‘범제강(梵帝纲)’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의 뜻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원문 그대로 원고에 넣어서 인쇄소에 보냈다. 인쇄기가 돌아갈 무렵에야 그것이 ‘루터교’와 ‘바티칸’이라는 것을 알고 급히 인쇄소로 달려가 인쇄기를 멈추고 활자를 갈아넣은 수정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활판인쇄를 할 때라 이런 일이 가능했다. 이 책은 지금 도서관에서도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찾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은 ‘신의종’, 어떤 것은 ‘루터교’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중국교회에 대한 지식이 이 정도였다. 《하. 기. 영.》 중국 사역에 대해 많이 말하다 보니 여러 중국 사역단체들과 교제를 갖게 되고 중국 사역을 주제로 한 설교나 강연도 많이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신학교육기관에서 강의도 했다. 참 어설픈 강의였지만 그 교실을 통해 중국 사역자가 된 분들도 여럿 있다. 한•중수교 이전 중국 방문이 아주 어려울 때 중국땅을 밟을 수도 있었다. 1989년 겨울이었고 중국 동북지역이 목적지였는데, 홍콩에 가서 복잡한 절차를 밟아 별지 비자를 ‘사서’ 상하이를 통해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베이징(北京)을 통하지 않은 것은 하루 전에 중국에 들어간 미국 국적 목사님으로부터 ‘내가 가지고 들어가려던 찬송가자동반주기 열 대 때문에 베이징공항에서 큰 말썽이 일어났으니 조심해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름 위를 날던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자 중국의 벌판과 농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중국!’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1997년에 방송사를 떠나 목회를 하고 있는데 전부터 교제하고 있던 중국 사역단체의 방문을 받았다. 그 단체에서 발행하고 있는 중국 사역 전문지의 발행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자격미달도 유분수이어야 맡지요!” 펄쩍 뛰었으나 간청을 이기지 못하고 수락했다. 전파매체를 통한 중국 사역에 활자매체를 통한 사역이 이어져서 오늘에 이르며 매체선교 44년의 연륜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선교(정주선교)의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하나님이 내 그릇의 크기를 아시고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2007년은 최초의 선교사 모리손이 중국땅을 밟은 것을 기준으로 해서 중국교회의 역사 200년이 되는 해였다. 이것을 기념해서 그 전문지의 ‘발행인 통신’에 썼던 글들을 모아 조그만 책자를 하나 발간했다. 책의 제목을 <하. 기. 영.>이라고 했다. 특이한 제목이었는데 ‘하’는 하나님, ‘기’는 기도, ‘영’은 성령을 줄인 말이다. 그래서 각 글자의 뒤에 줄임말을 뜻하는 마침표를 찍었다. 모리손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갈 때 선원들이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조로 말을 걸자 “나는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에서 ‘하’를, 허드손 테일러의 “발 대신 무릎으로!”에서 ‘기’를, 조나단 고프트가 “오직 나의 영으로”(슥 4:6)에 의지해서 부흥운동을 한 것에서 ‘영’을 따와 합성한 것인데, 이 세 글자가 중국 사역의 열쇠가 되는 말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부족하기만 한 사람이 중국 사역에 반세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택하심이고, 동역자들의 기도 덕분이며, 성령의 인도라고 굳게, 굳게 믿고 있다.
현덕손|제주극동방송 초대본부장, 북방선교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