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명최종.JPG) 나의 사명을 깨우쳐 주신 토마스 왕 목사님을 떠나보내며 2018년 벽두부터 북미에서 슬픈 소식이 전해왔다. 근대 화인(华人)선교의 거장이신 토마스 왕(王永信) 목사님께서 2018년 1월 4일 오전 9시 2분, 샌프란시스코의 자택에서 주님 품에 영원히 안기셨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전 세계 화인교회 가운데 삽시간에 전달되었고 저마다 안타까움과 유감을 표하였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화인교회에서는 주님의 충성된 종이셨던 토마스 왕 목사님을 추모하는 예배가 이어지고 있다. 왕 목사님은 1925년 베이징에서 태어나셨고, 1936년(12세) 쏭상제(宋尚节) 목사님의 어느 전도집회에서 결신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셨다. 그 후 왕밍다오(王明道) 선생님의 교회에 참석하셨으며, 신앙생활은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왕밍다오 부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53년(29세)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의 길로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역자로 헌신하셨다. 60년대에 미국 디트로이트의 한 차고 안에서 <中国信徒 月刊> 정기간행물을 창간해서 원고 쓰기와 편집, 그리고 인쇄하는 일까지 다 직접 하셨다. 지금은 발행 부수가 40만 부에 달하는 정기간행물로서 전 세계 화인교회에 전달되고 있다. 또한 70년대에는 ‘세계화인복음사역연락중심(世界华人福音事工联络中心, Chinese Coordination Centre of World Evangelism)’를 기획하시고, 5년에 한 번 전 세계 화인교회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대회인 ‘세계화인복음회의(世界华人福音会议, Chinese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를 시작하셨다. 80년대에 제2회 로잔복음대회의 개최를 담당하셨다. 90년대에 이르러 대사명중심(大使命中心, Great Commission Center International)를 창립하시고 마지막 시간까지 쉼 없이 선교사역에 매진해 오셨다. 토마스 왕 목사님은 비범한 지도자로서 선지자적인 안목을 지닌 분이셨으며, 선교의 개척자요 유능한 실천가이기도 하셨다. 하지만 왕 목사님은 자신은 늘 ‘빚진 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목사님은 설교와 글에도 탁월하신 분이셨고, 큰일을 하시는 분으로서 작은 일이라고 마다하는 법이 없으셨다. 세계화인복음사역연락중심을 세우고자 하실 때 세계 화인교회에서는 100여 개 정도의 교회만이 선교사역에 관심을 표명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약 1,000여 개 이상의 교회가 선교사역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왕 목사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교회를 세우는 등 일생 동안 많은 일을 하시며 5대양 6대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자취를 남기셨다. “중국교회와 한국교회를 연결해 주는 다리의 역할을 사명으로 주신 겁니다” 내가 처음 왕 목사님을 뵌 것은 1975년이었다. 목사님은 1976년 홍콩에서 처음 개최하는 ‘제1회 세계화인복음회의’에 재한 화인교회를 초청하시고자 한성교회를 방문하셨다. 그때 나는 신학교를 막 졸업하고 전도사로서 사역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목사님은 젊은 전도사인 나에게 이 대회에 참석해서 선교의 비전을 받아야 한다고 격려해 주셨다. 1978년 한성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께서 한국을 떠나시게 되었고 그때 교회는 나에게 담임목사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그때부터 한성교회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 왔다. 1978년 ‘중국선교연구원’을 창설하여 한국선교사가 중국선교를 준비하도록 양성하기 시작했다. 1979년 토마스 왕 목사님께서 다시 한국에 오셔서 이곳에 ‘세계화인복음사역연락중심 한국지역위원회’를 세우시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중단 없이 ‘세계화인복음운동’에 참여해 오고 있다. 1980년 한성교회는 80부흥전도(福广) 연합수련회 강사로 왕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다. 수련회를 마치고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며 당시 한국화교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교회 운영이 여러 면에서 어려운 상황을 토로하였다. 왕 목사님은 이때 평생에 잊지 못할 말씀으로 나의 사명을 깨우쳐 주셨다.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으세요! 고생하며 사역하는 거 다 주님이 아실 뿐 아니라 기록하고 계시지요.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유 목사님을 이 자리에 있게 하신 이유도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중국교회와 한국교회를 연결해 주는 다리의 역할을 사명으로 주신 겁니다.” 한성교회는 시대의 필요에 응하여 1984년 ‘띠지투안치(地极团契)’ 1)를 세웠다. 중국에 관심 있는 한국청년들이 중국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고 또 중국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의 단을 쌓기 시작했다. 이 모임이 무르익어 1989년에 ‘중국복음선교회’로 이름을 고치고 선교단체로 공식 출발하였다. 1994년 9월 29일 중국복음선교회 창립 10주년 기념예배 때에 조나단 차오(赵天恩) 박사가 총재로 계신 CMI(中国福音会)의 한국 지부로 전환하여 국제 중국선교단체와 보다 전문적으로 사역을 전개해 나가는 일에 합의하였다. 이때부터 더욱 중국선교 활동에 박차를 가하여 세미나와 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는 기존의 선교회 사역을 더욱더 전문화해서 ‘중국선교사역부, 중국선교사훈련원, 중국교회와선교연구소, 애화도서관’ 4부분으로 나누었다. 이를 통해 중국선교에 비전 있는 한국의 청년들을 훈련하여 중국선교사의 길을 준비하도록 했다. 1992년 중•한수교는 한국선교사들이 중국선교에 나아갈 기회를 열어 주었다. 6-70년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모리슨 선교사의 중국선교 200주년을 기념하는 2007년 무렵, 한국에서 중국선교에 참여하는 복음기구들이 합심하여 ‘중국선교협의회’를 설립하고, 그 해 ‘중국복음선교회’ 주관으로 ‘제1회 선교중국’대회를 열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교회가 ‘중국선교’에서 ‘선교중국’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개념의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중국교회한테 불 같은 시련을 주었는데 하나님은 불 같은 시련 가운데 오히려 중국교회를 부흥시켜 주셨다. 또한 개혁개방시기에 수면 위로 올라온 수많은 중국교회는 전무후무한 성장을 이루었고 중국교회가 선교의 비전을 품고 선교하는 중국으로 나아가는 시기가 되었다. 2월 1일, 이미 더 강화된 중국의 새로운 종교사무조례가 시행이 되었다. 이 일이 중국교회의 미래에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주관하여 주시기만을 기도한다. 모든 일은 주께 달려있기 때문이다.
미주
1) 행 1:8 ‘땅끝’ + 코이노니아의 합성어
유전명 | 旅韩中华基督教 汉城教会, 중국복음선교회 대표 번역 | 최효선•중국복음선교회 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