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통해1.JPG) 누군가가 “집에 불이 났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챙기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까?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소중한 것이 다르기에 사람마다 답이 다를 것이고 또 시대에 따라서 답이 다를 수도 있다. 통장, 집이나 땅 등의 주요 문서를 먼저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심지어 이전에는 재산 1호를 TV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여러 대답들 중에서 단연 공감을 얻는 답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진첩’이다. 다른 것은 다시 장만할 수 있지만 소중한 추억이 깃든 사진은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생쯤 되는 젊은이들에게 각자의 앨범이 있는가를 물어보면 대부분이 “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태어나서 초등학교 정도까지는 앨범에 사진이 있는데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는 사진이 별로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없는 이유는 2000년 이후 유행한 디지털카메라로 인해 사진을 잘 인화하지 않았다는 점과, 어릴 때는 부모님이 사진을 찍고 정리해주었지만 청소년기 이후로는 찍은 사진을 스스로 정리해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이들의 휴대전화에 각종 사진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은 몇 장 안 되기도 한다. 사진을 찍는 것이 너무 쉽고 흔해서 오히려 사진의 가치를 잘 모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젊은이들은 앞으로 자신의 사진첩에 인생의 명장면이 될 만한 사진을 스스로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누군가가 내 인생의 사진을 찍어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혹 바쁘게 살아오느라 추억할 만한 기록을 못 챙긴 세대라고 하더라도 인생의 명장면을 정리해보는 작업은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문득 “내 인생의 명장면은 언제였던가?”하는 생각과 함께 “어떤 것을 명장면으로 꼽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이른바 ‘명장면’이란 무언가 노력을 해서 이루어낸 기억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진실한 삶을 적극 영위해야 인생의 참맛을 알 수 있듯이, 오랜 노력 끝에 힘들게 이루어낸 순간이야 말로 인생의 명장면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리라.
‘지혜’는 현재 눈앞에 안 보이는 것을 생각해내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도 향후 햇살의 도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당장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각종 상황을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이 지혜의 힘이다. 지혜의 눈으로 보자면 기억나는 인생의 멋진 장면이 나의 삶을 빛나게 해준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순간들 역시 나의 삶을 채워온 소중한 편린(片鳞)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기분 좋은 기억이 명장면일 수도 있지만 생각하기 거북한 순간 역시도 내게 소중한 장면이 되기에 충분하다. 당시는 힘들었지만 실패하거나 어려웠던 순간에서 더 큰 깨달음을 얻었기에 감사했던 경우도 많지 않았던가. 인생의 명장면이 어찌 ‘밝은 날’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었을까!
명대(明代) 문학가 위안홍다오(袁宏道)는 항저우(杭州)의 아름다운 명승지 서호(西湖)를 찾았을 때, 화사하게 만발한 복사꽃과 이를 구경하는 여인들의 분 냄새를 두루 경험한 뒤 다음과 같은 느낌을 서술한 바 있다.
그러나 항저우 사람들의 서호 나들이 시간은 오시(午时, 11-13시), 미시(未时, 13-15시), 신시(申时, 15-17시) 이 세 시(时)에 그친다. 호수가 파랗게 물들고 물안개가 빛깔을 칠하는 신묘함이란 모두 아침 해가 돋거나 석양이 서산에 걸렸을 때가 가장 농염하다. 달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꽃의 자태나 버들의 흔들림, 산의 얼굴이나 물의 생각들, 그것들은 각기 다른 맛을 지니고 있다. 이런 즐거움은 산속의 스님이나 나그네의 차지이니, 어찌 속세의 속물들이 이 즐거움을 알겠는가?
(然杭人游湖, 止午、未、申三时. 其实湖光染翠之工, 山岚设色之妙, 皆在朝日始出, 夕舂未下, 始极其浓媚. 月景尤不可言, 花态柳情, 山容水意, 别是一种趣味. 此乐留与山僧游客受用, 安可为俗士道哉?)
사람들은 서호의 아름답고 환한 모습을 좋아하면서도 이른 아침이나 어스름한 저녁 시간이 주는 남다른 운치는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서호의 자태는 산속 스님 같은 허정한 마음이나 객수에 지친 나그네 같은 심정에 더욱 절경으로 다가온다. 자연은 다채롭고 심오한 정경을 제공하지만 심안으로 볼 줄 아는 지혜가 없다면 그 아름다움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 인생의 명장면을 기억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인생의 순간들을 의미 있게 보고 깨달음을 얻는 지혜도 역시 중요하다. 만약 내 인생의 명장면이 많지 않다고 느껴진다 해도 크게 낙담할 바는 아니니,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부터 만들어 가도 많이 늦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반드시 가능성을 잃어가는 것만은 아니요, 오히려 지혜를 쌓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지혜, 이 지혜를 통해 앞으로도 인생에 대한 기대를 더욱 가져보면 좋겠다.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깊이 있고 따스한 눈으로 주변을 볼 수 있다면 나는 언제나 인생 최고의 명장면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배다니엘 | 남서울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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