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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20 통권 83호     필자 : 강인규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근대 중국 교회의 문서선교

지난 한 학기 동안 강의, 번역과 행정 등의 바쁜 일정으로  2회에 걸쳐 글을 실리지 못하여, 먼저 독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깊은 사과를 드린다. 이번 회에는 근대 중국 교회의 출판사업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중국 선교에 있어 전도, 출판, 학교, 의료와 구제사업 등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어서, 중국 교회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이다.
 

중국 선교에 있어서 출판사업은 더욱 중요한 부분이었다. 근대 중국 정부는 선교를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공개적으로 선교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서 선교는 비밀리에 진행할 수 있었고, 독자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광범하고 정확히 교리를 전달할 수 있었으며, 또 선교사들은 중국 지식인들이 독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어서, 선교 초기부터 문서선교는 선교사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긴 선교 방법이었고, 또한 당시 환경의 제한 속에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선교 방법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문서 선교는 중국 선교 초기부터 활발하였다.
 

본인은 이번 호에 모리슨의 중국 도착부터 아편전쟁 전까지(1807∼1843), 아편전쟁
이후부터 중국의 문호가 전면적으로 개방되는 시기까지(1843∼1860), 그리고 청국이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는 시기까지(1860∼1911),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근대 중국의 문서 선교에 관하여 간단히 토론하도록 하겠다.
 

아편전쟁 전의 문서선교(1807∼1843)
런던선교회(L. M. S.)의 로버트. 모리슨이 천신만고 끝에 근대 중국선교의 문을 열어, 중국은 당의 경교 이후 네 번째의 복음의 여파가 밀려오게 되었다. 다행히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채용되어, 광주에서 활동할 수 있었지만, 그 후에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청의 금교정책으로 중국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6년 후 런던회 소속의 밀네(米憐Milne, 1785∼1822)가 중국으로 들어와 모리슨의 중국선교를 협조하고자 하였다. 모리슨은 " 항하외방전도회(恒河外方傳道會)"를 조직하여 앞으로의 선교 중심을 남양군도에 거주하는 화교들을 주요한 대상으로 하고, 장차 중국을 향해 전도하고자 하였다.

밀네는 말레시아의 마륙갑(馬六甲)에 선교기지를 설치하였는데, 인쇄소와 중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영화서원을 건립하여, 중국선교의 주요한 기지로 활용하였다. 그 후에 계속하여 영. 미선교사들이 중국선교에 참여하여, 싱가폴, 자카르타 등 다른 지역들을 개척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한 인물들은 메더스트(麥都思 Rev.Walter H.Medhurst, 1796∼1857), 구츠라프(郭士立, Rev. Charles G tzlaff, 1827∼), 아빌((雅裨理, Rev. David Abeel, 1804∼1846) 등이었다.  "중국총보"의 통계에 의하면,  1842년 이전에 런던회, 화란전도회, 미부회, 미국침례전도회, 미국성공회, 미남침례회, 영국교회전도회 등의 선교 단체들이 모두 61명의 선교사들을 중국에 파송하였는데, 그들의 주요한 선교활동 무대는 마륙갑, 싱가폴, 자카르타와 마카오 등지였다.

1842년 이전에 선교사들이 중문 서적을 출판한 지역은 모두 7개 지역이었고, 그 종류는 모두 138종이었다. 그 지역과 종류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마륙갑(43종), 자카르타(31종), 싱가폴(42종), 광주(7종), 마카오(6종), 빙랑여(1종), 방콕(1종)과 미상(7종)이었다. 위의 통계에서 이 시기의 문서선교는 마륙갑, 자카르타와 싱가폴의 세 지역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륙갑은 1817년, 밀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선교기지로, 초기 선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선교기지였다. 자카르타는 메더스트가 1821년에 설립하였다. 1822년 밀네가 사망한 후 자카르타는 런던선교회의 중국선교 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42년까지, 31종의 중문서적을 출판하였는데, 메더스트 혼자서 28종을 출판하는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싱가폴은 "중국익지회, (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Useful Knowledge in China, 中國益智會)"에 의해 1834년 11월 29일 설립되었다. 그 주요한 목적은 서양의 과학서적과 예술과 사회과학 서적들을 출판하여, 중국인의 지혜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문서선교로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성경의 번역이었다. 모리슨은 1813년 신약성경을 번역 출판하였고, 1819년 구약 성경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1823년에 이를 출판하였는데, 그 이름을 "신천성서"라 명명하였다. 물론 이는 인도의 마시만(Joshua Marshman)보다 일년 늦게 출판되었지만, 실제 중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최초의 중국어 성경이었다.

이 시기에 마륙갑, 자카르타와 싱가폴 등지에서 출판된 138종의 각종 서적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성경, 찬송가, 교리, 전도, 종교 인물전기, 종교 역사 등 종교적인 출판물이 106종에 이르러, 전체의 76%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세계 역사, 지리, 정치, 경제방면의 서적들은 겨우 32종으로, 전체의 24%를 차지하였다.

위의 통계에서 볼 때, 초기 선교사들의 문서선교의 중점은 서구 과학문명을 소개하기보다는 선교를 위한 기독교의 교리 소개에 치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비교적 유명한 종교 서적들로는, 모리슨이 편집한 신도론, 속구세총설진본, 문답천주예수구법, 양심신시, 연중매일조만기도서식, 고성봉신천계시도가훈, 기도문찬신시와 밀네가 편집한 기도진법주석,성서절주십이훈, 장원양우상론, 고금성사기집, 상제성교공회문,  메더스트가 편집한 신천십조성계주석, 예수속죄지론, 신리총론, 복음조화 그리고 구츠라프가 편집한 상제진교전, 구세주언행전전, 정교안위, 예수신적지전 등의 소책자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선교사들의 문서선교는 기독교 교리의 소개가 중점이었지만, 중국을 서방세계에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먼저 중국 고전을 번역하였는데, 마시만은 1809년 논어를 출판하였고, 모리슨은 1812년 삼자경과 대학을 출판하였으며, 가대위는 1828년 사서역주를 출판하였다. 두 번째로는 중국 역사와 현황을 소개하였는데, 주요한 것으로는 모리슨이 1817년에 저술한 중국일별, 그리고 1824년 중국 역사와 현황을 소개한 부자대화, 1834년 구츠라프가 쓴 중국사강, 1838년 메더스트는 중국을 출판하여, 중국 국가와 풍경 등을 소개하였다. 그 밖에 중국 언어와 문자 방면에도 많은 업적이 있었다. 1814년 마시만이 쓴 중국언법, 모리슨의 중국어법,1815), 중문회화와 단구(1816), 화영자전(1822), 메더스트의 복건토화자전(1832)과 중.·조·일어대조, 1842)」, 그리고 구츠라프가 쓴 중문어법지남(1842)」등이 대표적이었다.

그 외에도, 중문 잡지 등을 출판하여, 기독교 교리와 서방세계를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주요한 것으로는 밀네가 마륙갑에서 편집한 찰세속매월통기전(1815∼1821), 메더스트가 자카르타에서 출판한 특선촬요매월기전(1823∼1826), 마륙갑에서 출판한 천하신문(1828∼1829)과 구츠라프가 싱가폴에서 출판한 동서양고매월통기전(1833∼1838)등이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의 문서선교(1843∼1860)
1840년부터 1842년의 중.영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전하여, 영. 미. 불 삼국과 남경조약, 망하조약과 황포조약을 체결하여,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주, 복주, 하문, 영포, 상해 등 5개 항구를 개방하며, 항구 내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또한 교회를 설립하여 종교 활동을 허락하는 등, 중국 근대화의 역사가 피동적으로 그 서막을 열었다.

남경조약에 의해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자, 홍콩의 인구가 대폭 증가하고, 홍콩은 동서교류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각종 선교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어,  중국선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변모하였다. 런던선교회는 마륙갑의 영화서원을 홍콩으로 이전하면서, 인쇄 설비도 함께 옮겨왔다. 1843년 8월부터 9월까지 메더스트를 중심하여, 각 교단의 선교사들이 모리슨의 성경을 수정, 번역하는 회의를 개최하여, 홍콩은 중문 성경인쇄의 중요한 거점으로 발전하였다. 1843년부터 1860년까지 홍콩에서 출판된 서적의 종류는 60종에 달하는데, 종교서적은 부활요지, 창세전주석, 요셉기략, 신약전서주석 등 모두 37종에 이르러 전체 출판물의 61.7%를 차지하였다. 그 외에 교과서, 사전, 연감, 잡지와 서방 과학 문화를 소개하는 책들이 23종으로, 전체 출판물의 38.3%를 차지하였다.

광주는 개항 전에도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던 중요한 활동 무대 중의 하나였다. 아편전쟁 이후 관민의 강력한 반발로 비교적 늦게 개방되었지만, 선교기지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광주에서 출판된 중문서적과 간행물은 모두 42종이었다. 그 중에 종교서적으로는 예수정십자가론, 마태복음전주석, 사도행전주석 등 29종에 달하여, 전체출판물의 69%를 차지하였다. 그 밖의 천문, 지리, 역사, 의학과 과학서적들은 13종으로, 전체의 31%를 차지하였다. 중요한 것으로는 지리약론, 아미리가합중국지략, 천문약론, 박물신편 등이 있었다.

복주와 하문은 복건성의 가장 큰 두개의 도시이며, 역시 남양화교들의 중요한 고향이었다. 개항 이전에 이 도시의 많은 주민들이 남양에 이주하여, 광동계통의 화교와 함께 남양화교들의 2대 주류가 되었다. 그래서 개항 전의 초기 선교사들은 이들에 대한 선교를 중시하여, 복건어를 배우고, 그들 자녀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복건에 오기 전에 그들은 복건말로 전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복주는 1844년 7월 3일에 개항하였다. 복주에서 활동한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계통의 선교사들이었다. 제일 처음 복주에 도착한 선교사는 미국인 존슨(約翰生)이었다. 그는 1833년 동남아지역에 파송되어 싱가폴, 방콕 등에서 활동하다가, 1847년 1월 2일 복주에 도착하여 개척 선교를 시작, 5년 후 1852년 은퇴하여 미국에 돌아갔다. 이 지역에서 문서선교에 가장 활발히 종사했던 선교사는 두리틀(盧公明, Justus Doolittle, 1824∼1880)이었다. 그는 미국 공리회 소속의 선교사로, 1850년에 복주에 취임하여, 28년 동안 복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878년 은퇴하여 미국에 돌아갔다. 1853년에서 1858년까지, 로 선교사는 25종을 출판하여, 초기 복주에서 선교하는 선교사 중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출판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서적은 대부분 종교계통의 서적으로 신십계주석, 예수교소인, 향훈 등이 있었고, 기타 일반서적으로는 천문회답, 화인빈고지고, 권계아편론 등이다. 1860년까지 선교사들이 복주에서 출판한 서적은 모두 42종이었다. 그 중에 종교서적은 26종으로 전체의 61.9%를 차지하였다. 그 밖에 천문, 지리와 풍속류가 16종으로 전체의 38.1%를 차지하였다.

하문은 1843년 11월 2일 개방하였다. 아빌((雅裨理David Abeel, 1804∼1846),분(文惠廉, William Jones Boone, 1811∼1864)이 하문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하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모두 선교지를 떠나야 했다. 초기 하문에서 문서선교에 종사한 선교사는 도티(羅 , Elihu Doty, 1809∼1864),번스(賓威廉, William Chalmers Burns, 1815∼1868),요한(施敦力約翰, John Stronach,1810∼1888)과 알랙산더(施敦力亞歷山大, Alexander Stronach, 1801∼1878) 등이었다. 도티는 미국 선교사로 1844년 하문에 정착하여 하문 방언으로 요한복음서, 향훈13칙(鄕訓13則)을 종교서적을 출판하였다. 번스도 미국 선교사이다. 그는 1847년 홍콩에 도착하였다가, 하문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천로역정과 신시합선을 출판하였다. 요한과 알랙산더는 영국 선교사이며, 형제였다. 하문에서 이 두 형제의 문서선교가 비교적 활발하였다. 요한은 7종의 종교서적을 출판하였고, 알랙산더도 홍콩과 싱가폴 등지에서 인쇄할동을 하다가, 이곳에서는 영화서원을 건립하여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1860년까지 하문에서 출판된 서적은 모두 13종으로, 5개 개방된 항구  중에서 가장 적은 수였다. 그 내용도 대부분 종교서적이었다.

닝보(寧波)는 1844년1월1일 개방하였다. 닝보에서 제일 처음 선교를 개척한 선교사는 미국침신회 소속의 맥고완(瑪高溫, Daniel Jorome MacGowan,1814∼1893)이다. 1843년 중국에 파송되어, 홍콩 등에서 활동하다가 닝보에 전임하였다가 후에 상해로 다시 전임하였다. 닝보에서는 문서선교가 매우 활발히 진행되었다. 미국 장로회 선교사 코울(柯理, Richard Cole)은 인쇄 전문가로 1844년 홍콩과 마카오에서 활동하다가, 1845년 9월 1일 마카오에 있는 장로회 소속의 인쇄설비를 닝보로 이전하여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그 인쇄소의 이름을 화화성경서방(華花聖經書房,The Chinese and American Holy Class Book Establishment)으로 명명하였다. 1860년 이 인쇄소는 상해로 이전하여 미화서관(美華書館)으로 개칭하였다. 화화성경서방은 코울,로리(數理華, James Walter Lowrie, 1856∼1930)와 컬버슨(克陛存, Michael Simpson Culbertson, 1819∼1862) 등 세 명의 미국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로 조성된 위원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코울은 싱가폴에서 사용하였던 활용 연자(鉛字)와 자기 스스로 제조한 새로운 활자들을 사용하여 인쇄 기술을 대폭 혁신하여 인쇄의 질과 속도를 향상시켜, 1860년 이전에 닝보는 상해 다음으로 중요한 문서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1844년에서 1860년까지 선교사들이 닝보에서 출판한 서적은 106종에 이른다. 그 중에 기독교 교리, 역사와 찬송가가 86종으로 전체의 81%를 차지하였고, 천문, 지리, 역사, 경제, 풍속과 도덕류가 20종으로 19%를 차지하였다. 비교적 중요한 서적들로는 일식도설, 항해금침, 지남침, 평안통서, 지구도설과 천문회답 등이 있었다.


 1843년 11월 17일 상해는 정식 개방되었다. 상해는 개방된 5개 항구  중에 제일 북부에 있었고, 양자강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 금후의 동서교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0년의 통계에 의하면 상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이 무려 569명이 되었다. 상해에 제일 처음 선교에 착수한 선교사는 영국 런던회 소속의 메더스트와 록하트( 魏林,William Lockhart, 1811∼1896)였다. 메더스트는 영국에서 인쇄기술을 습득하고, 밀네의 인쇄활동을 돕기 위하여 1817년 동남아에 도착하였다.

그는 자카르타에 인쇄소를 설치하고, 문서선교에 주력하여, 1842년 전에 30여 종의 서적을 출판하였다. 아편전쟁이후 상해가 개방되자, 1843년 12월 중순 록하트와 함께 상해에 부임하여, 23일 방을 임대하여, 자카르타의 인쇄 설비를 상해에 옮겨와 묵해서관(墨海書館,London Missionary Society Press) 을 설립하였다. 의료 선교사인 록하트는 1839년 1월, 광주에 도착하였다. 아편전쟁 후에 메더스트와 함께 상해에 부임하여, 인제의원(仁濟醫院)을 설치하여 의료선교를 전개하였다. 그 외에도 분(文惠廉, William Jones Boone, 1811∼1864), 와일리(偉烈亞力,Alexander Wylie, 1815∼1887), 찰스 밀네(美魏茶,William Charles Milne,1815∼1863), 에드킨스(艾約瑟,Joseph Edkins, 1823∼1905), 뮤어헤드(慕維廉, William Muirhead, 1822~1900) 등 당시 중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선교사들이 다수 상해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에 상해에서 문서선교의 중심은 묵해서관이었다. 묵해서관은 처음에 상해북문에서 사작하였다가 후에 산동로로 이전하였다. 이 지역을 후의 사람들이 메더스트를 기념하여, 맥가권(麥家圈)이라 칭한다. 처음 3년 동안은 메더스트 혼자 고군분투하였다. 처음 3년 간 출판된 17종의 서적 중에 16종을 메더스트 혼자 출판하였다. 1844년에서 1860년까지 묵해서관에서 출판된 서적은 171종에 달한다. 종교서적이 138종으로 80.7%를 차지하였고, 일반 과학, 역사서적들이 33종으로 19.3%를 차지하였다. 이 시기에 상해의 묵해서관의 문서선교 사업은 양과 질에서 기타 다른 5개 항구를 훨씬 능가하여, 당시 중국 문서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1851년 성경을 수정 번역하여, 중국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만아니라 서방의 과학문명 소개에도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육합총담은 상해에서 처음으로 발행된 종합중문 잡지였다. 그 외에도 속기하원본,  담천, 대영국지, 중학 등의 중요한 서적들이 속속 출판되었다. 묵해서관이 언제 폐관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860년 미화서관이 상해로 이전하면서, 묵해서관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전면개방 후의 문서선교(1860~1911)

1860년 영·불연합국이 북경을 함락하여, 청은 영· 불· 미·소 등과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전역을 전면 개방하고,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할 뿐 아니라, 교회와 선교사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것을 보장하였다. 이로써 중국은 전무후무한 새로운 국면에 봉착하고, 중국선교에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화서관(美華書館,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
미화서관의 전신은 닝보의 화화성경서방이었다. 1860년 상해 동문으로 이전하여, 후에 다시 상해의 복경로로 이전하였다. 미화서관의 책임자는 미국 장로회 소속의 갬블(姜別利,William Gamble, ∼1886)이었다. 그는 1858년 닝보에 부임하였다. 그는 상해가 닝보보다 발전의 가능성이 많은 것을 발견하여, 1860년 12월 인쇄소를 상해로 옮겼다. 갬블은 전도중문자막(電鍍中文字模)을 발명하여, 출판계에 새로운 혁신을 가져다주었다. 전도자막은 제조가 편리하고, 빠르며, 글씨가 깨끗하고, 선명하여 청 말에 중국 출판업계에 애용되었고, 심지어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 그는 또 중국의 수많은 한자를 상용(常用), 비용(備用)과 한용(罕用)으로 구분하여 배판 속도를 3배 이상이나 향상시켰다. 미화서관의 설비가 정밀하고, 기술이 진보하여, 묵해서관을 대신하여, 중국 기독교 문서선교의 선봉 역할을 담당하였다. 1890년에서 1895년까지 매년 평균 4천만 페이지를 출판하였고,  1902년에 인쇄소 직원이 2백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13년 화미서관과 합병하여 협화서국이 되었다.
 

익지서회(益智書會,School and Textbook Series Committee)
익지서회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편집한 기독교 교과서를 출판하기 위하여, 1877년 상해에서 조직되었다. 후에 그 이름을 "중국교육회"와 "중국기독교교육회"로 개칭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마틴(丁 良},William Alexander Parsons Martin, 1827∼1916)이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그 위원으로는 메이터(狄考文,Calvin Wilson Mater, 1836∼1908), 윌리암슨(韋廉臣,Alexander Williamson, 1829∼1890),알렌(林樂知,Young John Allen, 1836∼1907), 레츨러(黎力基, Rudolf Lechler, 1824∼1908)와 프라이어(傅蘭雅, John Fryer, 1839∼1928) 등으로 구성되었다. 고과서는 초급과 고급의 두 부류로 나누어 산술, 기하, 대수, 측량, 박물, 천문, 지리, 화학, 지질, 식물, 동물, 심리, 역사, 철학과 언어  등으로, 1890년까지 98종의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익지서회에 출판된 교과서 중 가장 영향력이 많았던 것은 프라이어가 편집한 격치수지(格致須知)와 격물도설(格物圖說)이다. 격치수지는 모두 10권으로, 자연과학, 사회과학, 의약, 각국의 역사와 지리 등을 망라하고 있었다.
 

광학회(廣學會,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for China)
광학회의 전신은 동문서회(同文書會,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Christian and General Knowledge among the Chinese)로 1887년 11월 1일 성립하였다. 광학회의 설립취지는 "동문서회 발기서"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광학회의 설립 목적은 두 가지로,  하나는 비교적 수준 높은 서적들을 중국 지식층에게 보급하고, 또 다른 목적은 천연색 도표의 책들을 중국 가정에 보급하여 읽게 하자는 것이다. 이들 선교사들은 중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 학문을 중요시하고, 학자를 존경하며, 지식층들이 곳곳에 분포하여, 중국을 통치하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진정한 영혼이라고 분석하였다. 비록 지식층의 수가 적기는 하지만,  전 중국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층이어서, 그들에게 기독교 서적과 일반서적들을 보급하여 선교하고자 하였다.

광학회의 설립자는 영국 런던회 소속의 윌리암슨이었지만, 그 외에도 알렌과 뮤어헤드같은 다수의 선교사들과 상인, 외교관, 의사, 변호사들이 참여하여, 첫해에 31명의 회원이 참여하였다. 그 후에 회원수가 계속 늘어서 1905년에는 254명까지 증가하였다. 회원의 대부분이 서양인사들이지만, 소수의 중국인도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광학회의 회장은 세관총무사 하트(赫德,Robert Hart, 1835~1911)가 창립부터 1911년까지 24년 동안 21년 간을 역임하였다. 윌리암슨은 창립초기에 비서장과 총무직을 역임하여, 실제 업무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1890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 리차드(李提摩太, Timothy Richard, 1845~1919)가 계승하여 25년 간 광학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광학회는 70년 동안 활동하다가 1956년 12월 5일, 중화침례교서국, 청년회전국협회 출판부와 중국주일학교협회와 연합하여 중국기독교연합서국으로 개편하였다. 광학회는 70년 동안 중국 기독교 문서선교의 기수로 지대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1900년을 전후하여 중국이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할 때, 서방의 정치제도를 소개하는 등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1910년 이후에는 주로 기독교 서적만을 출판하여, 선교 이외에 다른 영향력은 점점 쇠퇴하여갔다. 그 주요한 이유는 중국인들 중에서 번역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일본어를 통한 번역물들이 대량으로 출판되었으며, 광학회의 정책이 기독교서적 중심으로 활동 범위를 축소하였기 때문이다.
창립부터 1911년까지 광학회가 출판한 서적은 무려 461종에 달한다. 순수한 종교 서적은 138종으로 전체의 29.93%을 차지하고, 비종교 서적은 238종으로 전체의 51.63%을 차지하였다. 종교적 색채가 비교적 농후한 서적이 85종으로 전체의 18.44%를 차지하였다. 주요한 출판물들은 만국공보, 해제화보, 훈몽화보, 성동화보, 중서교회보中西敎會報, 대동보 등의 잡지가 있었다. 그 중에서 만국공보는 광학회의 기관지로 근대 중국 사회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일반서적 중에는 태서신사람요, 중동전기본말과 격물탐원 등의 서적들이 있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모리슨 이래 1911년 청이 멸망하는 시기까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중국 기독교의 문서 선교에 관하여, 간단히 검토하였다. 복잡한 현지의 정치, 사회, 외교적인 변화와 인쇄 기술의 발전으로 중국 기독교의 문서선교도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뜨거운 사명감과 노력으로 문서선교는 날로 발전하여 근대 중국 기독교 선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뿐 아니라 중국의 인쇄 기술을 향상시키고, 새로운 과학과 문명을 소개하여, 중국의 현대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강인규/ 티이완 중위대학(中原大學)교수 중국 교회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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