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중국을 주께로」에서,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한 분이 선교사들이 보모(保姆: 아이를 돌보는 일을 주로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요리, 청소 등을 도와주는 가정부를 의미함 - 편집자 주)를 채용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보모를 쓰지 말자는 주장을 한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그 글을 읽으며 많은 부분에 공감하면서도, 일의 효율성이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중국에 사는 부인 선교사들에게 보모 때문에 겪은 이야기 좀 해보라고 한다면, 아마 현지에서 오래 산 분일수록 이야기 보따리가 봇물 터지듯 줄줄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우리들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현지인 보모이다. 특히 내가 사는 지역은 대부분 남자들이 밥하고, 빨래하고, 여자들은 마작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보니, 남의 집에 와서 고분고분하며 열심히 일하는 여성을 찾는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아이가 어리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보모와 함께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경우라면 문화와 습관, 생각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다. 보모와 전쟁 우리 가정은 다른 중국어권에서 사역하다가 1997년 중국에 온지 얼마 안되어 보모를 채용했다. 이 지역 치안이 불안하다 보니 아직 어린 아이들을 밖에 내보내기도 안심이 안되었고, 내게 주어진 일도 있다 보니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래서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 여성들을 보모로 썼다. 그런데 이들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너무 다른데다가, 직장 생활도 해보지 않았고 그 동안 신앙의 형제 자매들 속에서만 활동해왔던 나로서는 사람을 부리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 것도 끔찍하게 아껴도 남의 것은 아까운 줄 모르고 막 쓰고, 내 것과 네 것의 구별도 없고, 한 가지 일 끝나면 시골에서 문화생활을 못 해본 한을 푸는지, TV 보고 목욕하고 머리 감는 것이 그들의 일과였다. 그리고 다른 중국 가정보다 보수를 더 주고 집에 갈 때도 차비며 요것 저것 싸주지만 더 주지 않는다고 불평했고, 정해진 휴가가 있는데도 아무 때나 집에 갔다 오겠다고 우겨대고, 걸핏하면 나가겠다고 위협한다. 더구나 습관적인 거짓말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모두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중국에서 보모를 채용해본 분들이라면 최소한 몇 가지는 공감할 것이다. 아마 그 정도면 아주 괜찮은 정도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새로 보모가 오면,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임으로서 그에게 복음을 알게 하려고 인내하며 친절히 대했다. 그러나 곧 그것을 이용하여 저들의 행동은 위에서 열거한 내용들로 더욱 더 대담하게 진행되어 갔다. 결국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의 나와 그들은 자주 마찰을 일으켰고, 그래서 6개월만에 서너 명의 보모가 우리 집을 거쳐갔다. 며칠 일하다가 나가는 보모들을 보내며 우리 집 아이들은 그래도 정이 들어서, 세 아이가 함께 찍은 사진을 한 장 주며 자기들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속상함은 한층 더해 갔다. 그래서 보모를 다시 구하지 않고 나 혼자 일을 하는데,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점점 일이 겹치고 피곤하다 보니 식구들에게 짜증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당시 큰 아이는 중국인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고, 두 아이는 각각 다른 유치원에 다녔는데, 자전거를 이용해서 데려다 주고 데려왔다. 그렇게 학교와 유치원을 하루에 8번씩 왔다 갔다 해야 했다(초등학교와 유치원 시간이 다른데다, 점심시간에는 아이들이 집에 와서 밥을 먹고 다시 학교에 간다). 은혜와 만남 이럴 즈음에 16살 된 한 아이가 우리 집에 왔다. 이 아이는 중국의 인구정책의 희생자였다. 가난한 가정의 둘째로 태어나서 부모가 벌금을 못 내자(정부의 정책상 한 자녀 이상 출산할 경우 벌금 등 불이익이 가해짐 – 편집자 주), 호적도 없이 양부모인 이모 집에서 살았는데, 양부모 딸이 시집갈 때 따라가서 집안 일을 도우며 살다가, 어찌 어찌하여 도망치다시피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불우하게 자라서 그런지 스무 살도 넘어 보였다. 호적도 없는 데다 그 집에서 혹시라도 자기를 찾을까 두려워하길래, 이름을 ‘恩慧(은혜)’ 라고 지어주었는데, 본인도 아주 좋아했다.
그렇게 해서 은혜는 우리 식구가 되었다. 호적이 없어서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데 글을 읽을 줄 알아 성경책도 잘 읽었다. 한동안 예배시간이면 자기 설움에 북받쳐 울곤 했지만, 점점 우는 횟수가 줄어갔다. 그리고 잘 웃고 즐겁게 생활했다. 나는 갈 데 없는 이 아이를 우리 식구라 생각하고, 집안 일도 시키기 보다는 뭐든지 같이 했다. 우리 아이들도 그 애를 잘 따랐다. 오랜만에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뭔가 또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은혜가 우리 집 식구라고 하지만, 어디까지가 가족이고, 보모이어야 하는지, 나는 그 애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갖기 시작했다. 은혜도 마찬가지였다. 은혜는 과일을 깎아 놓아도 가장 맛있고 좋은 것만 골라 먹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언니, 밥 더 줘.” 하면, “네가 해,” 라고 쏘아 부치기 시작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점심식사 후 평상시에는 형제들에게 “주일날은 봉사니까 같이 설거지하자”고 했는데, 내가 채기지 못해서 어쩌다 혼자 설거지라도 하는 날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래서 나는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해가며 일을 시켰다.
나는 영리한 은혜가 신앙이 잘 자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키보드를 틈나는 대로 가르쳤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배우고자 했는데,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한 아이가 잘 따라 올 리가 만무하였다. 열을 내가며 가르치다 결국 포기했다.
그래도 나는 은혜가 우리 집에서 3~4년 잘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주의 일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은혜가 시골 친구 집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더니 친구 엄마의 소개로 스물 셋 된 시골 청년을 알게 되었고,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귀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청년은 자기가 동네 높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 은혜의 호적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다. 이것만으로도 지금까지 호적이 없어 사람 대접 못 받고 살아온 은혜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나는 극구 말렸다. “네가 시골에서 살아보지 않아서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래. 그리고 신앙인이 아닌 사람하고 사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야. 호적은 돈이 있으며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그것 때문에 결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 결혼도 스무 살이 넘어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 좀 더 있다가 해라.” 수없이 붙잡고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러나 은혜는 시골에만 한번 갔다 오면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그 사람은 외국인인데 우리를 어떻게 이해한다고 그 사람들 말을 듣느냐, 거짓말 안하고 어떻게 험한 세상을 먹고 사느냐, 너는 점점 왜 바보가 되어 가느냐∙∙∙.” 대충 이런 이야기를 듣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은혜는 시골에 가서 이틀을 그 청년과 밤을 지내고 왔다. 그리고는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우는 소리를 하며 나에게 그 일을 고백했다. 내가 하도 기가 막혀 하니까 오히려 히히대며 웃고 있었다. 순간, 나는 속이 확 뒤집혔다. 1년 동안이나 열을 내가며 가르친 것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화가 나서 소리를 막 질렀다. 내가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을 안 그 청년은 은혜에게 우리 집에서 일하지 말라고 종용하였고, 은혜는 그를 따라 우리 집에서 나가 버렸다. 치유하시는 하나님 은혜가 떠난 이후, 다시 ‘보모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거의 매일 오전에 학교 수업에 참석해야 했는데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나는 보모들에게 지극히 사무적이 되어 갔다. 사무적으로 일을 가르쳤고, 부당하게 요구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일들이 생기면 몇 번 가르치다가 미련 없이 내보냈다. 그러니 1주일마다 보모가 바뀌었다. 그전에도 그랬듯이 일한 삯은 원래의 계약보다 더 주어서 내보냈다.
그러던 중 열 일곱 살짜리 시골 아이가 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긴 하는데, 처음 왔으면서도 내게 한 마디도 묻는 것이 없었다. 생활방식이 다르다 보니 내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짜증스럽게 몇 번 이야기 하다가 그 아이도 내보냈다. 나는 이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나는 이들과 싸우러 온 사람인가, 사랑하고 섬기러 온 사람인가? 나는 분명 실패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조용히 엎드렸다.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저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할 대 너도 무척 마음이 속상했지? 나도 네가 내게 묻지 않고 네 마음대로 할 때 그렇단다.”
그랬다. 나는 지금까지 보모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보다는, 내 마음대로 해 보려고 좌충우돌하고 있었고, 사역에 있어서도 그 분께 여쭤보기 보다는 내 나름대로 열심을 내고 있었다. 나는 은혜에게도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어쩌면 그 영혼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잘 부려먹기 위해 내가 원하는 사고로 바꾸어 보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네가 하는 일이 하나님 일’ 이라는 미명 아래∙∙∙’ 그리고 그 아이의 마음을 이래하려고 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못 미친다고 채찍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혜가 집을 나간지 두 달쯤 되는 어느 날, 은혜가 돌아왔다. 그 동안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일했는데 늘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어 매일 짜증만 났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달았다고 했다. 그런데 은혜가 나가 있는 동안 결혼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걸었던 기대가 이미 무너져 버렸기에, 난 그저 일 잘 도와 주는 것으로 족하기로 했다. 그 전처럼 그 아이의 개인적인 일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는 그저 보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의 이런 마음은 그 아이의 실수에 쉽게 화를 내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또 회개하고, 또 그렇게 반복하고∙∙∙.
그 즈음에 한국에서 출판된 치유에 관한 책들을 접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 내 영혼은 많은 상처로 아파하고 있었고, 그 상처는 모두 보모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 조용히 엎드렸다. 예수님은 상처로 아파하는 나를 치료하기 위해 오셨고, 또 그분은 버림받은 인생을 살아온 은혜를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마음 속으로 은근히 저들을 무시하며 살았던가! 그 날이 오면, 그 분 앞에 같이 서야 할 사람들인데∙∙∙.
은혜는 결혼한 이후 가난에 찌든 시댁 살림 걱정까지 떠맡게 되어, 스트레스로 피부에 심한 가려움증이 생겼는데 병원에 가도 낫지 않았다. 나는 은혜를 조용히 불렀다. “네 피부병은 스트레스 탓인 것 같으니까 함께 기도하자.” 그리고 은혜를 학대했던 양부모와 죽이고 싶도록 미운 친부모를 하나님 앞에서 용서하자고 했다. 나는 가엾은 은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먼저 은혜에게 용서를 빌어라.”
못난 자존심이 마음 한 구석에서 나를 확 끌어 당기고 있었지만, 나는 즉각 순종했다. “나의 모난 성격 때문에 네게 상처 준 것을 용서해라. 그리고 너의 양부모와 친부모를 용서해라.” 은혜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를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얼른 양부모에게 전화하고, 생부모 전화번호도 물어 봐서 연락해라.” 은혜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몸의 가려움증도 서서히 없어졌다.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많은 보모들을 통하여 나의 교만과 아픈 상처들을 드러내고 치유하시며 나를 만들어 가고 계셨던 것이다. “보모요? 모시고 살아야 돼요.”
부엌에서 일하면서 부르는 은혜의 찬송소리는 날로 높아갔다. 이제 거짓말하는 습관도 고쳐졌다. 그녀의 남편도 지난 번 이곳에 왔을 때, 우리 부부가 전도해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이곳에서 함께 신앙생활 잘하다가 지금은 남쪽에서 돈을 벌고 있다. 그녀의 시어머니도 며느리의 전도로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요즘 큰아이가 동양화를 배우러 가는데 은혜를 함께 보내 주었더니 더욱 신이나 있다. 은혜를 본 다른 분들이 말한다. “은혜를 참 잘 키우셨네요. 보모 신앙 키워 주고 일 시키는 것 쉽지 않은데∙∙∙.”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심 부끄럽다.
은혜의 덜렁대는 성격이 빚어낸 작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속출하고 잇다. 유리컵은 우리 집에서 이제 흔적도 없어진 지 오래고, 새로 맞춘 지 두달도 안 된 식탁 유리도 깨져 스크치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 쓰고 있다. 그러나 은혜가 우리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든든하다. 그리고 내게는 하나님께서 또 다른 사역들을 열어 주셨다.
문화가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음식이 다른 가정에서 자신의 일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하는 은혜가 바로 진정한 선교사가 아닐까? 그러나 나는 내가 아직도 ‘성숙’ 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잘 알기에 은혜가 가장 두렵다. 내가 가장 쉽게 죄 지을 수 잇는 가까운 사람이기에.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된 사모님들이 보모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호소한다.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보모요? 모시고 살아야 돼요.” 이 말은 또한 나에게 하는 경고이기도 하다.
강드보라 / 중국 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