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1616~1911)은 삼번의 난(1673~1681)과 대만의 정씨 세력을 제압(1683)함으로써 마침내 중국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족들은 스스로 최고의 문화 민족임을 자부하는 강한 중화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 수준이 낮은 만주족 청이 중국 대륙을 통치하는 데는 실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청은 팔기제라는 군사조직도 조직이지만, 한족 지식인을 회유하기도 하고 또 한편 억압하는 강경책을 쓰면서, 이른바 교묘한 ‘당근’과 ‘채찍’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여러 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가 중국을 지배하는 데에 100년을 넘기지 못하였지만, 청은 250여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변발 강요 만주 땅에서 일어난 청조는 중국 본토에 진출하자 무력에 더하여 그들 고유의 풍속인 변발(辯髮)을 강요하는 공포를 전역에 불러일으켰다. ‘변발’은 ‘치발(薙髮)’ 이라고도 불리는 북방 민족 고유의 풍습으로, 남성들이 뒷머리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앞머리의 머리카락을 깎고, 남은 머리카락을 꼬마 묶어 뒤로 길게 늘어뜨리는 머리형으로, 청에 복종하지 않는 데에 대한 강한 억압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중국인이 오랑캐 풍속이라 하여 오랫동안 경멸하여 오던 것인데, 청이 중국인의 자존심을 꺾으며 강제하였다. 전국 각지에 “유두불류발, 유발불류두(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이라 하여, ‘머리(頭)’를 남기려는 자는 머리카락(髮)’을 남기지 말고, ‘머리카락(髮)’을 남기려는 자는 ‘머리(頭)’를 남기지 말라는 포고문을 내려 철저히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인들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우리의 몸과 털과 피부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라 하여 감히 머리카락 하나라도 손상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변발령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강남 지식인들의 저항이 강하였는데, 청은 이러한 반항을 철저히 탄압하여 서양인들이 ‘돼지 꼬리’라 비웃던 이 풍습을 중국 땅에 곧 정착시키고 말았다.
계속된 문자의 옥 청은 중국 통치의 실권을 확보하고, 특히 한인 지주 지식인의 협력을 얻어 덕치주의를 내세우면서 정치의 안정을 꾀하였다. 거기에 강희(康熙, 1661~1722), 옹정(雍正, 1722~1735), 건륭제(乾隆帝, 1735~1795)는 황제 개인적인 정치적 자질도 겸비하고 있어 사회가 안정되었다고 사가들은 평가한다. 그러나 명군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은 다수의 한족을 중심으로 한 피 정복민과 넓은 판도를 지배하기 위하여 그 배후에 ‘문자의 옥’ 곧 냉혹한 필화사건을 계속 일으켜 사상을 탄압하고 전제정치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중국 역사상 사상 탄압이나 문자의 옥은 대부분 통일 왕조에 보이는 현상으로, 그 가운데에서도 역사상 유명한 것은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운 진시황제에 의한 탄압과 최후의 왕조인 청대의 탄압이다. 시황제에 의한 분서갱유(焚書坑儒), 강희 ∙ 옹정 ∙ 건륭의 3대 130여 년에 걸쳐 일어난 문자의 옥은 항간의 사서에 반드시 등장한다.
‘문자의 옥’이란 문자가 빌미가 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하는 필화 사건으로, 이러한 예는 물론 청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명 태조가 행한 문자의 옥도 많이 거론되고 있다. 명 태조 때에 문장 때문에 처형당한 학자, 문인이 속출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명 태조(1368~1398) 시기에는 ‘광(光)’자나 ‘독(禿)’자의 상용을 금하였는데, 이것은 빡빡 깎은 머리를 뜻하는 광두(光頭), 대머리를 뜻하는 독두(禿頭)를 의미한 것으로, 그의 과거를 들춰내 비방하는 것이라 하여 금기가 되어 있었다. 또한 홍건족 출신을 나타내는 ‘적(賊)’과 같은 발음의 ‘즉(則)’까지도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명 태조 홍무제는 항주의 교사인 여일기(余一夔)가 축하하는 글 속에 ‘광천하지하 천생성인 위세작칙(光天下之下 天生聖人 爲世作則)’이라 하여 ‘빛나는(光) 하늘(天) 아래에 하늘이 성인을 내어(生) 세상을 위하여 법칙(則)을 만들다’ 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광(光)은 중의 머리를, 생(生)은 중을, 즉(則)은 적(賊)을 빗댄 것이라 하여, 단 이 세 글자 때문에 여일기는 참형을 당했던 것이다. 명 태조는 청년 시절에 황각사에 들어가 삭발하고 승려 생활을 하였고 나중에는 유적 집단에 들어가 활동하였는데, 이것을 지식인들이 비난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자격지심 내지는 피해 망상에서 이러한 문자의 옥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명초의 문자의 옥은 태조 개인적인 성향에서 나온 것으로, 그가 자기의 출신에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그 반동으로 자기의 권위 ∙ 존엄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한 데서 나온 것이니, 이것은 사상 탄압을 위한 청의 문자의 옥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희제의 사상 탄압 청조의 여러 황제들은 한인 지식층들을 적극 회유하는 한편, 이들의 결사나 행동을 금지하고, 반청의 기미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특히 반청에 관한 서적이나 사상에 민감하여 수차례에 걸쳐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서적뿐 아니라 인쇄물이나 문서에서 반청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만 보여도 곧 바로 글쓴이를 조사하여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경우 반청에 대한 직설적인 내용은 없지만,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은연중에 왕조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하여, 또는 풍자적인 시구나 금지된 글자체, 이단적인 표현, 그리고 뜻은 다르나 음이 반청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여 탄압하거나 모반죄로 처벌하였다.
강희제 시대에 대명세(戴名世)라는 문인이 있었다. 그는 강희 44년(1905)에 향시에 합격하고, 1709년에는 2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는 당시 57세로 곧 환갑을 바라보는 노령이었으니, 당시 과거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 시험 지옥이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영예와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그것은 명조 유신의 족적에 관해 『남산집혈유록(南山集孑遺錄』이란 책을 쓴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 책 속에 청조의 연호 대신 ‘영력(永曆)’ 곧 명이 망한 후 남명 정권의 계왕(桂王)이 사용한 연호를 사용하였고, 문장 가운데 ‘대역(大逆)’이란 글자가 곳곳에 들어있다는 죄상으로, 대명세는 여덟 조각으로 찢기는 극형에 처해졌다. 이때의 화는 일족에까지 미쳐, 16세 이상은 사형, 그 이하는 공신의 집안에 끌고 가 노예로 삼는 혹독한 처벌을 받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옹정제의 사상탄압 한족에 대한 사상 탄압은 옹정제 때에도 가혹하게 일어났다. 옹정제 때 유명한 필화 사건은 사사정(査嗣庭)의 ‘유민소지(維民所止)’ 사건이다. 옹정 4년(1726), 강서성의 향시 시험관 사사정이 시경 중의 한 구절인 ‘유민소지(維民所止, 이 백성이 머무른 곳)’를 이용하여 문제를 낸 것이 말썽이 되었다. 문제가 된 ‘유민소지’의 ‘유(維)’자는 옹정(雍正)의 ‘雍’자의 머리를 떼어낸 것이고, ‘지(止)’자는 ‘정(正)’자의 윗머리를 자른 것이니, 결국 유민소지라는 말은 옹정의 목을 자른다는 뜻이며, 나아가 청조에 반기를 들려는 의도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단정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숙소에 있는 짐 속에서 비판적인 내용이 담긴 일기가 발견되었다. 그 결과 그는 감옥에 갇혀 끝내 옥사하고 말았으며, 일족이 모두 투옥되는 참화를 입었다.
당시 만주족을 비방하고 한족의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 문자의 옥에 걸려들었다. 심지어 실수로 잘 못 쓴 글자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러한 사상 탄압은 변발 강요와 함께 한족에 대한 강경책의 대표적인 예가 되고 있다.
옹정제 시대 문자의 옥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사건은 1727년에 있었던 증정(曾靜)의 옥사 사건이다. 증정은 그의 문도 장희(張熙)를 사천성과 섬서성의 총독인 악종기(岳鐘琪)에게 보내어 “당신의 선조가 싸운 여진족 금 나라의 후예인 청나라와 마땅히 싸워야 할 것이 아니냐?”면서 조상인 송대의 악비(岳飛)를 본받아 청조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 그런데 악종기가 이 사실을 옹정제에게 고발하여 사건이 확대되었다. 사건 조사과정에서 증정의 반청 사상은 청초의 저명한 학자 여유량(呂留良)의 화이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이미 수년 전에 죽은 여유량의 묘를 파헤치고, 부자의 관(棺)을 꺼내 목을 잘랐다. 그리고 그의 일족과 관련자들은 각각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되었으며, 그의 저서가 금서로 지정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옹정제는 증정을 심문하여 그 문답 내용을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란 책으로 발간하였다. 황제가 직접 신하와 더불어 이론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지만, 옹정제는 확고한 신념과 자신을 가지고 직접 이론적인 문답을 벌인 것이다. 옹정제는 증정과의 문답에서 화이관(華夷觀)의 역사적 변화와 유가사상의 군신간의 의를 연결시켜 여유량의 화이론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화(華)와 이(夷)’를 중원의 한족과 주변 오랑캐로 구분하는 지리적 ∙ 인종론적 구분 논리를 배격하고, 문화론적 입장을 내세워 만주족도 중국의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엿다. 천하의 군주가 될 수 있는 조건은 화이의 구분이 아니라 덕의 유무에 있는 것으로, 청조는 중국의 문화와 예의 범절에 익숙해 있을 뿐 아니라 천명을 받아 중국에 들어와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들이 이에 순응하여 잘 따르고 있기 때문에, 청은 중국을 다스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옹정제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종래의 화이관을 벗어나 중국의 수많은 소수 민족들을 융화시키고 통일된 청제국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청은 왕도의 보증자 ∙ 실천자로서 새로운 중화인으로 용인되었고, 서양을 오랑캐(洋夷)로 상정함으로써 종래의 화이관에 변화 ∙ 확대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결국 증정은 옹정제에 설파되어 청나라를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사형을 면하였으나 다음의 건륭제 때에 그 역시 사형을 당하였다. 건륭제 때 더욱 격렬해진 문자의 옥 건륭제 때 필화 사건은 더욱 격렬하였다. 최대 문자의 옥은 호중조(湖中藻) 사건이다. 호중조의 시집(詩集)에 불경스러운 내용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일세일월무(一世日月無, 이 세상에 해와 달이 없구나)’라는 시구가 문제가 있었다.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치면 명(明)자가 되는데, 건륭제는 이 시구를 명나라가 멸망한 것을 슬퍼한다는 뜻으로 곡해하였다. 호중조의 또 다른 시구 가운데 ‘일파심장탁청(一把心腸論濁淸, 나의 한줌 의기로 청탁을 논하고 싶구나)’라는 시구가 있었는데, 보통 한시에서는 사성법과 각운법에 맞추기 위하여 ‘청탁’을 때로는 ‘탁정’으로 바꿔 놓는 경우가 있었다. 호중조가 ‘탁정’이라고 쓴 것도 사성법과 각운을 맞추기 위함이었는데, 건륭제는 이것을 ‘탁한 청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건륭 20년(1755)에 호중조를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호아(壺兒, 항아리)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호아(胡兒, 오랑캐)와 통한다고 하여 처벌하였는데, 이처럼 청조를 이민족이라고 지적한 문자나 어구에 대해서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유를 달아 처형하였다.
강희 ∙ 옹정 ∙ 건륭 3대에 있었던 문자의 옥을 비교해 보면, 후대로 갈수록 빈도와 규모가 확대되었고, 규제나 처벌의 강도도 점차 높아졌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강희제 재위 61년 동안 모두 10건에 불과하였던 문자의 옥이 옹정제의 13년 간에는 거의 20건에 이르렀고, 건륭제 63년 통치 기간에는 무려 130건 이상이 되었는데, 이렇게 후대로 갈수록 많아지게 된 것은 그만큼 반만 사상이나 작품을 철저히 색출하고, 연루자의 범위도 하위층까지 확대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탄압과 공포 위에서 이룩된 번영 청조는 종래 화이사상을 가지고 한민족의 사상으로만 강조하는 사고 방식에 대해서 문자의 옥을 가지고 철저히 탄압하였다. 특히 강희 ∙ 옹정 ∙ 건륭제는 문자의 옥을 통해 한인 사대부의 반청 사상과 황권에 위협되는 세력을 견제하고 전제적 통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따라 청대의 금서는 538종, 13,800여 권에 이르렀는데, 이들 도서의 대부분은 중화사상에 바탕을 둔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 탄압은 황제나 조정에 대해 소신 있게 정책을 건의 비판하는 사대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그 결과 자연히 학문 전반을 위축시켰으며, 그 대신 고증학의 발달을 가져오는 동기가 되었다.
그렇기에 강희 ∙ 옹정 ∙ 건륭제는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사고전서 편찬 등 큰 문화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분서갱유를 단행한 진시황제와 함께 문화의 파괴자라는 비평을 역사가들로부터 받고 있다. 실로 강희 옹정 건륭 3대를 ‘황금시대’요 ‘성세(盛世)’라고 말해지기도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상 탄압과 공포 위에 이룩된 번영으로, 진정한 의미의 번영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전성기의 화려한 번영 속에 내재한 이러한 모순은 이후 19세기의 정치 ∙ 사회 ∙ 문화의 이완 현상으로 나타나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가 없게 하였던 것이다.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