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지1.JPG) 2006년 9월 가을. 의지할 곳, 의지할 사람 하나 없었던 낯선 베이징에 유학이란 스타트 총성과 함께 미성년(당시19세)이란 신분으로 베이징어언대학교(北京语言大学) 17동 기숙사를 벗삼아 정착했다. 회상해보면, 한편으론 신나기도, 또 한편으론 외롭고, 막막하고 두렵기도 했었다. 난 그렇게 ‘익숙한’ 고향 땅 포항에서 ‘척박한’ 베이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어린 나이의 나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베이징으로 오기 한 달 전, 한국에서 한어병음만 간신히 익히고 온 터라 모든 것이 생소했다. 한자로 되어 있는 서류, 건물 이름, 표지판, 물건 등 온통 한자, 한자, 한자 천지였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신입생이란 ‘명찰’을 달고 베이징에서의 험난한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때 1학년 1학기 시절을 ‘바보 놀이’ 라 칭하며 가끔 회상하곤 한다. 이유인즉, 모든 수업이 중국어로 진행되었기에. 그야 말로 ‘바보’가 따로 없었다.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지금 무슨 내용의 수업을 하고 있는 건지, 심지어 숙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선생님의 ‘야속한’ 핀잔을 듣기도 했었다. 그 ‘바보’시절의 이런 마음은 중국어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생존해야 했기에. 이 시기를 묵묵히 견뎌내면 언젠가는 말은 트이지 못할지언정 귀는 트일 것이라 믿었다. 수업을 들으며 자는 한이 있어도 나는 교실 두 번째 줄, 중간 자리를 늘 지켰다. 그리고 단어를 꾸준히 외웠다. 혼자 큰 소리로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는 같은 단어인데도 내가 외운 단어와 선생님께서 읽어 주시는 단어가 자꾸 다르게 들렸다. 이상했다.
‘왜 다르게 들릴까?’
고민하며 연구했다. 고민하며 연구한 끝에 단어 외우는 방법을 살짝 바꿔보기로 했다. 전에는 성조 자체만을 외웠고 성조가 몇 성 인지에만 집착했다. 단어의 소리를 무시했던 것이다. 단어가 읽혀지는 그 소리를 모방하고 외워보기로 했다. 중국어에는 리듬이 있다. 성조라는 높낮이 때문에. 그래서 단어와 문장을 읽을 때, ‘이건 노래야!’라고 주입하며 무작정 리듬을 익혀나갔다.
몇 달 후, 웬 일인가! 한 줄기 빛이 내 어두웠던(?) 귀를 밝게 했다! 들리기 시작했다. TV에서 흔히들 ‘어느 순간 귀가 트였어요. 어느 순간 잘 들리기 시작했어요.’ 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들리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폭발적으로 실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말 신이 났다. 기숙사 관리원들, 상점 주인, 식당 종업원 등 주변의 수많은 중국인들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오늘 배운 단어와 문형을 어떻게 해서든 중국인들한테 써(?)먹었다. 특별히 TV 프로그램 시청을 십분 활용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CCTV 뉴스를 틀어 놓고 등교 준비를 했다. 들리든 들리지 않든 말이다. 그리고 내가 꼭 시청하는 만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喜羊羊’ 이었다. 어린이용 만화 프로그램이어서 나의 중국어 실력에 딱 맞았다. 그리고 ‘家有儿女’ 라는 코믹 드라마를 즐겨 시청했다. 시간이 흘러감과 동시에 나의 중국어 실력 또한 나날이 발전했고, 어느 곳을 가든지 두렵지 않았다.
두둥!
나에게도 ‘침체기’ 라는 친구가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더 이상 실력이 향상되지 않고 있었다. 그 무렵 드라마, 영화, 뉴스를 막론하고 모든 TV프로그램의 자막에 의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특히 뉴스 같은 경우는 자막을 보지 않고서는 거의 알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뉴스를 보고, 듣고, 해석하는 학원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자주 나오는 어휘들을 조금씩 익혀나갔다. 아나운서의 비교적 빠른 진행에 길 잃은 어린 양마냥 헤매었지만 집중해서 들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당시 함께 공부했던 친구와 ‘奋斗’라는 영화의 대사를 무작정 외웠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대사가 있는데 ‘越被人嘲笑的梦想,就越有实现的价值(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는 꿈일수록 그 꿈의 실현가치는 더 크다)’ 라는 대사이다. 친구와 경쟁하듯 외웠던 것이 중국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중국어를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중국어의 특별한 문형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익숙한 단어들인데도 불구하고 해석이 되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문장이 꽤 많다. 그 이유는 특별한 의미의 문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把’ 자문과 같은 문형은 따로 외워 두지 않으면 해석이 쉽지 않다. 또한 교과서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중국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들을 익히는 것 또한 중국어 실력을 발전시키는데 큰 힘이 된다. 예를 들면 ‘他不是我的菜’ 라는 말이 있다고 하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는 나의 음식이 아니다’의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그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 라는 의미다. 이처럼 관용 표현을 많이 익혀둔다면 중국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개인적으로 베이징어언대학교에서 출판한 ‘习惯用语’ 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에는 중국 사람들이 비교적 자주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이 많이 수록돼 있다.
중국 유학생활이 길어지면서 베이징은 ‘제2의 고향’이 되어 익숙해져 갔고 편안해졌다. 베이징은 나에게 굉장히 큰 의미가 담긴 곳이다.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됐고, 신앙생활 또한 그곳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1년 전부터 중국교회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 중국교회를 알아보던 중 중관춘(中关村)에 삼자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배를 처음 드리러 간 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설교의 반 이상을 못 알아 들었던 것이다. 한국어 성경을 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중국어 성경은 오죽했으랴. 목사님께서 사용하시는 어휘들은 내가 여태껏 공부했던 영역의 어휘들과 교차되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 예배 시간에 성경 구절을 찾을 때면 참 곤욕스러웠다. 몇 장 몇 절은 잘 들리는데 성경의 어느 부분을 말하는 건지 도저히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중국어 성경책을 한 권 샀다. 사자마자 한국어 성경과 중국어 성경의 목차를 대조해 보았다. ‘신세계’ 였다. 중국어 단어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의 착각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사람은 겸손해야 해. 주일마다 아침에는 중국교회에서 중국어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한인교회 청년부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했다. 중국어로 설교를 듣는 것이 새롭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시간이었지만, 100% 알아 듣지 못하니 답답한 마음이 컸다. 그래서 가끔은 중국어 예배를 드리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최대한 중국어 설교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중국어 예배에 마음을 쏟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한국 땅에 있는 중국인유학생들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나의 작은 소망을 아셨는지 귀국 후 서울로 다시 ‘유학’을 왔을 때 그 길을 열어 주셨다. 중국인유학생 사역에 뜻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중국어 예배부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작게 시작한 중국어 성경공부 모임이 지금의 중국어 예배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시종일관 함께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에서 삼자교회를 다닌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중국인들이 빛 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길 소망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들의 땅, 중국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가 전하며 함께 하나님나라를 세워 나가길 간절히 기도한다.
我爱中国!我爱中国人!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서은지 | 동숭교회 중국어 예배부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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