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사랑한다면 중국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중국을 제대로 알려면 정치와 경제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오늘의 중국은 우리가 알던 중국과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세계의 공장이던 나라는 이제 전기차·배터리·인공지능·반도체 분야의 강국을 꿈꾼다. 그러나 같은 나라의 다른 편에서는 5년째 이어지는 부동산 침체와 지방정부 부채, 얼어붙은 소비,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청년 실업이 사람들의 삶을 짓누른다. 시진핑(習近平) 시대에 들어서는 국가안보와 산업정책,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역할이 경제 전반에서 한층 커졌다.
이 변화는 성장률이나 미중 경쟁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가족, 직업, 성공에 관한 생각, 미래에 대한 불안과 소망까지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선교를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질문의 순서가 필요하다. “중국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 먼저 “지금 중국은 어떤 나라가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중국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래 지켜본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어렵다고 느낀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인가, 자본주의 국가인가? 공산당이 이끄는 나라에 왜 억만장자가 있는가? 국유기업이 그토록 중요한데 알리바바와 텐센트, BYD 같은 민간기업은 어떻게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는가? 시장이 있는데 국가는 왜 그렇게 깊이 개입하는가? 선교의 자리에서는 질문이 하나 더 붙는다. 이 모든 것이 왜 중국선교와 관계가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 중국의 정치와 경제를 읽는 일은 제도를 공부하는 일이 아니다. 그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욕망, 성공과 좌절,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읽는 일이다. 중국선교 역시 바깥에서 복음을 ‘전달’하는 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중국교회가 중국 사회 안에서 어떤 몫을 감당할 수 있는지 묻는 일이며, 그러려면 그 사회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아야 한다.
이 글은 마오쩌둥(毛澤東)에서 시진핑까지, 대약진에서 전기차까지 이어지는 짧은 지도다. 그리고 그 지도의 끝에서 가장 직접적인 정치 현실, 곧 종교정책과 교회의 자리를 함께 살펴본다.
첫 번째 질문 – 시장의 방향을 누가 정하는가 중국 경제를 설명할 때 흔히 GDP 성장률과 수출액, 부동산 가격, 전기차 판매량부터 꺼낸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중국 경제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시장인가, 기업인가, 소비자인가, 정부인가, 아니면 공산당인가?
중국에 시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격이 있고 경쟁이 있고 주식시장이 있다. 세계적인 기업가가 등장했고, 수많은 사람이 시장을 통해 부를 쌓았다. 그러나 이 시장은 서구의 시장경제와 같지 않다. 국유기업은 여전히 핵심 자리를 차지하고, 금융과 토지, 인프라, 전략산업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도 크다. 그래서 “시장경제냐 계획경제냐”라는 이분법은 중국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렇게 묻는 편이 더 정확하다. “중국은 시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 시장의 방향은 누가 정하는가?”
중국의 공식 명칭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다. 2024년 7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3중전회)도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국유경제를 강화하고 민간경제를 지원하겠다는 방향을 함께 내놓았다. 시장과 국가는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결합한 관계다. 다만 그 결합에서 방향타를 쥔 쪽은 당이다. 필자는 이것을 “당이 방향을 정하고, 시장이 속도를 낸다”라고 요약하고 싶다. 이 요약이 옳은지는 지난 70여 년의 역사가 보여 준다.
마오쩌둥의 중국 - 경제보다 혁명이 먼저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을 때 중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산업화와 식량 증산이라는 거대한 과제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에게 경제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다. 경제는 혁명을 이어 가는 도구였다.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이 그 정점이다. 농촌에는 인민공사가 들어서 집단농업이 강화되었고, 마을마다 ‘뒷마당 용광로’를 세워 철강을 생산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여기서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 하나가 무너졌다. 인센티브다.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그 결과가 연결될 때 일할 이유를 얻는다. 생산의 몫이 노력과 끊어지면 생산성은 떨어진다.
더 깊은 문제는 정보였다. 중앙정부는 현장을 다 알 수 없다. 농민이 얼마나 거두었는지, 공장이 실제로 얼마나 만들 수 있는지는 현장이 가장 잘 안다. 그런데 정치적 분위기가 나쁜 소식의 보고를 허락하지 않으면 숫자는 부풀려진다. 1959년 루산(廬山)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가 대약진의 문제를 지적했다가 도리어 숙청당한 일이 대표적이다. 그 뒤로 현장의 목소리는 더 조용해졌고, 정책은 더 크게 어긋났다. 1959년부터 1961년 무렵 중국 곳곳에서 대기근이 일어났다. 희생자는 연구자에 따라 1,500만 명에서 4,000만 명 이상까지 추정이 갈릴 만큼, 그 규모조차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대약진은 경제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행동과 정보의 문제임을 보여 준 비극이었다. 여기에는 기독교적 인간관과 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 인간은 명령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자유의지와 책임 그리고 욕구와 관계를 지닌 존재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고 말한다(창 1:27).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력이 아니고, 농민은 생산단위가 아니며, 소비자는 구매력이 아니다. 모든 경제의 한가운데에는 사람이 있다.
덩샤오핑(鄧小平) - “고양이가 검든 희든” 1978년은 중국 현대사의 분기점이다. 그해 말 열린 제11기 3중전회에서 당의 중심이 계급투쟁에서 경제건설로 옮겨 갔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貓白貓論)’, 곧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말은 이 실용주의를 상징한다. 중요한 것은 정책이 이념적으로 얼마나 순수한가가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가였다.
개혁은 농촌에서 시작되었다. 농가가 일정한 몫을 국가에 내고 나머지를 자기 몫으로 삼는 생산청부책임제가 퍼지면서 농민에게 일할 이유가 돌아왔다. 도시에서는 기업개혁이 이루어졌고 외국인 투자가 허용되었다. 1980년에는 선전(深圳)을 비롯한 경제특구가 지정되었다. 작은 어촌이던 선전은 오늘날 세계적인 제조업과 기술혁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에 중국 개혁의 독특한 방식이 있다. 먼저 실험하고, 성공하면 넓힌다. 흔히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다(摸着石頭過河)”라고 표현되는 방식이다. 농촌에서, 특구에서, 일부 산업에서 시험한 뒤 성공한 것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다만 이 개혁이 정치적 개방을 뜻한 적은 없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당은 경제개혁의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치체제의 근간은 더욱 단단히 지켰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길을 확정했다. 개혁개방을 단순히 “자본주의의 수용”이라 부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은 시장을 받아들였지만 국가의 역할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가 시장이 움직일 공간을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도로와 항만을 놓고,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전력을 공급하고, 외국 기업을 불러들였다. 이렇게 네 가지 힘이 결합했다. 시장, 국가, 세계화 그리고 투자다.
‘세계의 공장’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중국의 성장에는 세계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막대한 노동력만으로는 세계의 공장이 될 수 없다. 외국자본이 들어오고, 기술이 이전되고, 공장과 항만과 도로가 이어지고, 세계시장으로 수출할 길이 열려야 한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은 이 흐름에 가속을 붙였다. 세계의 기업들이 중국을 생산기지로 삼았고, 중국산 제품이 세계의 시장으로 쏟아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수억 명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갔다. 오늘날 농민공(農民工)은 약 3억 명에 이른다. 도시화가 진행되고 중산층이 자랐다. 중국의 성공은 중국만의 성공이 아니었다. 서구의 자본과 기술, 아시아의 부품과 공급망, 중국의 노동력과 제조 능력, 세계 소비자의 수요가 만난 세계화의 성공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에는 대가가 따른다. 수출과 투자에 기대어 자란 경제는 소비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쉽다. 투자가 지나치면 과잉생산과 부채가 쌓인다. 그 가장 큰 사례가 부동산이다.
부동산 - 집 한 채가 경제 전체가 되다 중국에서 부동산은 단순한 주거 문제가 아니었다. 지방정부의 재정, 금융, 가계의 자산이 모두 부동산에 묶여 있었다. 지방정부는 토지사용권을 팔아 재정을 마련하고 그 돈으로 도시 인프라를 지었다. 개발회사는 토지를 사서 아파트를 지었고, 은행은 대출을 내주었고, 가계는 집을 샀다. 집값이 오르는 동안 이 순환은 성장을 밀어 올렸다.
“토지 → 지방정부 → 부동산 → 금융 → 가계 → 소비·투자 → 성장”.
문제는 집값이 꺾일 때 이 순환이 거꾸로 돈다는 것이다. 2020년 당국이 개발업체의 부채를 조이는 이른바 ‘세 개의 레드라인’을 내놓자 헝다(恒大) 같은 대형 개발사가 흔들렸다. 헝다는 2021년 말 디폴트에 빠진 끝에 2024년 1월 홍콩 법원의 청산 명령을 받았다. 개발회사가 어려워지자 건설이 줄고, 지방정부는 토지 수입이 마르고, 가계는 자산가치가 줄어 지갑을 닫았다. 중국 국가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부동산 개발투자는 2025년 한 해 17.2% 줄었고, 2026년에도 1~8월 누계로 20% 가까이 줄어드는 흐름이다.
통계 뒤에는 사람이 있다. 많은 중국 가정에 집은 결혼의 조건이었고 자녀 교육의 발판이었으며 노후의 안전판이었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은 경제학으로는 자산 가격의 변화지만, 한 가정에는 삶의 안정과 자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성경이 토지와 집, 빚과 노동, 가난과 부를 끊임없이 사람의 삶과 공동체의 문제로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희년 규례는 토지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사람은 그 땅의 나그네요 청지기라고 선언한다(레 25:23). 집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앞에서 교회가 건넬 말이 있다면, 그것은 통계의 해설이 아니라 그 두려움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윈(馬云)과 알리바바 - 시장의 힘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개혁개방은 거대한 민간기업을 낳았다. 알리바바와 마윈(馬雲)은 그 상징이다. 알리바바는 전자상거래에서 출발해 금융과 데이터, 플랫폼 경제를 하나로 엮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국 정치·경제의 핵심 질문이 나온다. 민간기업이 너무 커지면 어떻게 되는가?
2020년 10월 마윈이 금융 규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직후 앤트그룹의 상장이 중단되었고, 이어 플랫폼 기업 전반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이를 두고 “정부가 기업을 억눌렀다”라고만 해석하면 절반만 본 것이다. 플랫폼 독점, 금융 리스크, 데이터, 소비자 보호, 국가안보가 한꺼번에 얽혀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남는다. 중국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기업도 국가의 정치적 목표와 무관하게 움직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뒤다. 규제가 민간의 투자 의욕을 꺾었다는 우려가 커지자 2025년 2월 시진핑 주석은 민영기업인 좌담회를 열었고, 그 자리에 마윈도 나란히 앉았다. 같은 해 5월에는 민영경제촉진법이 시행되었다. 당국은 민영기업이 GDP의 60% 이상, 도시 고용의 80% 이상을 담당한다고 강조한다. 국가는 민간을 통제하려 하면서도, 민간의 신뢰 없이는 성장할 수 없음을 안다. 이 긴장이 오늘 중국 정치·경제의 한 축이다.
공동부유 - 부를 만드는 데서 부를 나누는 데로 개혁개방은 엄청난 부를 만들었지만 격차도 함께 키웠다. 지역 간, 도농 간, 계층 간, 자산 간 격차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2021년 8월부터 ‘공동부유(共同富裕)’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를 “모두 똑같이 나누자”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소득격차 완화와 중산층 확대, 공공서비스, 사회 안정이 함께 담긴 개념이다.
여기서 기독교적 관점이 흥미롭게 겹친다. 성경은 부 자체를 악이라 하지 않는다. 다만 부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경고한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질문은 그 부를 어떻게 쓰느냐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마 6:24). 성경의 경제윤리는 평등주의도 아니고 시장만능주의도 아니다. 재산권을 존중하면서도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공동체가 돌보라고 명한다(신 24:19–21). 그러므로 공동부유를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딱지로만 판단하기보다, 성장과 분배,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책임 사이의 오래된 질문으로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시진핑 – 당이 이끄는 경제, 안보가 된 경제 시진핑 시대를 읽는 열쇠는 ‘당의 영도’와 ‘국가안보’ 두 가지다. 2012년 말 당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은 2018년 헌법을 고쳐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을 없앴고, 2022년 제20차 당대회에서 세 번째 임기를 열었다. 2017년 제19차 당대회 무렵부터는 “당정군민학(黨政軍民學),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라는 구호가 강조되었다. 경제도 예외가 아니다. 당이 방향을 정하고 시장이 속도를 낸다는 원칙이 정치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이다.
국가안보의 무게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경제와 안보를 어느 정도 나누어 생각할 수 있었다. 이제는 반도체, 인공지능, 배터리, 전기차, 통신, 희토류, 데이터 그리고 우주산업이 모두 안보의 문제다. 미중 무역 갈등은 관세에서 시작해 기술 경쟁으로 번졌고, 공급망이 곧 안보가 되었다.
2026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승인한 제15차 5개년 규획(2026~2030)은 이 방향을 그대로 보여 준다. 과학기술 자립자강(自立自强)과 ‘신품질 생산력(新質生産力)’ 육성, 현대화된 산업체계 그리고 내수 확대와 소비 진작이 핵심이다. 덩샤오핑 시대의 질문이 “어떻게 더 빨리 성장할 것인가”였다면, 오늘의 질문은 “어떻게 성장하면서 동시에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할 것인가”로 옮겨 왔다.
BYD와 전기차 - 새로운 성장모델, 오래된 역설 전기차는 중국의 새 경제전략을 보여 주는 창이다. BYD를 비롯한 중국 전기차 기업이 빠르게 성장한 배경에는 하나의 요인이 아니라 여러 요인이 있다. 거대한 내수시장, 배터리 산업, 전자부품 공급망, 제조업 기반, 충전 인프라, 정부 정책, 기업 간 치열한 경쟁 그리고 기술혁신이 함께 작용했다. 전기차는 배터리와 반도체, 소프트웨어, AI, 통신 그리고 제조업이 만나는 산업이어서 미래 제조업의 주도권과 직결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설이 있다. 국가가 산업을 밀면 투자가 몰리고 생산능력이 커진다. 모든 기업이 같은 산업에 뛰어들면 공급이 수요를 넘어선다. 가격 전쟁이 벌어지고 수익성이 무너진다. 중국에서는 이런 출혈경쟁을 ‘네이쥐안(內卷)’이라 부르고, 당국도 2025년부터 과당경쟁을 바로잡겠다며 나섰다. 산업정책에는 언제나 두 얼굴이 있다. 성공하면 산업 경쟁력이 되고, 실패하면 과잉생산이 된다.
중국인은 왜 돈을 쓰지 않는가 중국 경제의 또 다른 난제는 소비다. 정부는 내수 확대를 외치지만 가계(家計)는 지갑을 열지 않는다. 가계소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기준 약 40%로, 주요국과 비교해 현저히 낮다. 2026년 상반기 소비재 소매판매 증가율은 1.3%에 그쳤다(같은 기간 서비스 소매판매는 5.3% 증가). 가전·자동차 보상판매(이구환신, 以舊換新) 보조금이 수요를 앞당겨 쓴 뒤 그 효과가 꺼진 탓이다.
왜일까. 집값 하락으로 자산이 줄었고, 16~24세 청년실업률(학생 제외)은 2025년 12월 16.5%에 이르렀다. 교육비와 의료비, 노후에 대한 불안이 크고, 농민공은 호구(戶口) 제도 때문에 도시에서 일해도 공공서비스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인구는 2022년부터 줄기 시작했다. 사람은 미래가 불안하면 쓰기보다 모은다. 저축이 늘면 소비가 줄고, 기업 매출이 줄어 투자와 고용이 위축되며, 고용이 불안해진 가계는 다시 저축을 늘린다. 경제는 숫자의 순환이기 이전에 기대와 신뢰의 순환이다.
여기서 성경의 샬롬이 다시 떠오른다.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에 그치지 않고, 삶의 질서가 온전하고 공동체가 안정되어 사람이 미래를 소망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미래를 믿을 수 있어야 소비하고, 기업이 미래를 믿어야 투자하며, 청년이 미래를 믿어야 결혼하고, 가정이 미래를 믿어야 아이를 낳는다. 경제의 핵심에는 결국 신뢰가 있다.
2026년 중국경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성장률이 떨어졌다”라는 말만으로는 오늘의 중국을 설명할 수 없다. 2025년 중국 GDP는 공식적으로 5.0% 성장해 ‘5% 안팎’이라는 목표를 채웠다. 다만 분기별로는 1분기 5.4%에서 4분기 4.5%로 꾸준히 둔화했다. 2026년 정부 목표는 4.5~5%로 낮춰 잡았고, 상반기 실적은 4.7%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6년 7월 전망에서 올해 성장률을 4.6%로, 세계은행은 4.4%로 보았다. 핵심 지표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표 수치 시점·출처 GDP 성장률 5.0% (4분기 4.5%) 2025년 · 국가통계국 GDP 성장률 4.7% (정부 목표 4.5~5%) 2026년 상반기 · 국가통계국 성장률 전망(2026) IMF 4.6% / 세계은행 4.4% 2026년 7월 발표 부동산 개발투자 −17.2% (2025) / 약 −20% (2026년 1~8월) 국가통계국 집계 소비재 소매판매 +1.3% (서비스 소매 +5.3%) 2026년 상반기 · 국가통계국 가계소비 비중 GDP의 약 40% 2024년 기준 청년실업률(16~24세) 16.5% (학생 제외) 2025년 12월 ※ 위 수치는 2026년 9월 30일 기준 공개 자료를 정리한 것.
표가 보여 주는 것은 두 얼굴의 경제다. 한쪽에서는 첨단 제조업과 수출이 성장을 떠받치고, 다른 쪽에서는 소비와 부동산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진짜 질문은 성장률 숫자 하나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성장할 것인가”다. 과거의 공식은 ‘부동산 + 인프라 + 투자 + 수출’이었다. 새 공식은 ‘소비 + 서비스 + 생산성 + 첨단기술 + 고부가가치 제조업’이다.
그러나 이 전환은 쉽지 않다. 부동산을 줄이면 투자가 줄고, 투자가 줄면 성장률이 내려간다. 수출을 늘리면 미국·유럽과의 통상 마찰이 커지고, 첨단산업을 밀면 과잉생산의 위험이 따른다. 소비를 살리려면 가계의 불안을 덜어야 하고, 그러려면 지방정부 부채와 사회보장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중국은 지금 성장모델 전환의 한복판에 있다.
정치의 문 앞에 선 교회 – 종교정책 읽기 중국선교에 있어 가장 직접적인 정치 변수는 종교정책이다. 그런데 앞서 던진 질문, “방향은 누가 정하는가”는 경제만이 아니라 종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중국 헌법 제36조는 종교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다만 그 보호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에 한정되며, 무엇이 정상인지를 정하는 쪽은 국가다. 2016년 시진핑 주석이 전국종교공작회의에서 ‘종교중국화(宗敎中國化)’를 강조한 이래 이 원칙은 점점 구체적인 제도로 굳어졌다. 2018년에는 개정 종교사무조례가 시행되었고 국가종교사무국이 당의 통일전선공작부 아래로 편입되었다. 2022년에는 온라인 종교정보서비스를 허가제로 관리하는 규정이 시행되었다. 미성년자에 대한 종교교육에도 제한이 가해지고 있다.
공식 등록된 삼자교회(三自敎會)와 등록하지 않은 가정교회의 경계도 예민한 문제다. 2018년 중국 정부는 개신교 신자를 약 3,800만 명이라 밝혔지만, 등록되지 않은 신자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는 추정이 있고 그 추정치는 크게 엇갈린다. 2018년 9월 베이징 시온교회가 폐쇄되었고, 2025년 10월에는 시온교회 진밍르(金明日) 목사를 포함한 지도자와 성도 다수가 구금되었다. 금 목사는 2026년 7월 석방되어 미국으로 갔다. 국제 인권단체는 2026년 상반기 여러 도시에서 ‘불법’ 종교활동을 신고하도록 장려하거나 포상하는 조치가 도입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 현실을 하나의 색으로 칠해서는 안 된다. 중국 정부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공식적으로 말한다. 단속의 강도는 지역과 시기, 교회의 성격에 따라 크게 다르다. 수많은 신자는 예배와 기도, 이웃 섬김을 이어 가며 평범하게 신앙을 지켜 간다.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은 중국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지의 성도와 사역자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그들과 지혜롭게 동행하기 위해서다.
경제와 종교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보인다. 경제에서는 시장의 방향을, 종교에서는 교회의 방향을 당과 국가가 정하겠다는 원칙이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중국교회가 왜 그토록 조심스러운지, 왜 어떤 교회는 갈등을 감수하고 어떤 교회는 제도 안에서 길을 찾는지 읽어 낼 수 없다.
중국교회가 감당할 새로운 역할 중국 경제가 변하면 중국교회의 선교적 역할도 달라진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제조업 중심 사회에서 첨단기술 사회로 이동하면서 중국인의 삶이 바뀌었다. 청년의 고민이, 가족관계가, 직업관과 돈과 성공에 관한 생각이 달라졌다. 복음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메시지에 그치지 않는다. 복음은 오늘의 삶에서 인간이 누구이며 돈과 권력과 성공이 무엇인지,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하나님 앞에서 경제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영혼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향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디에 설 수 있는가. 필자는 세 가지를 꼽고 싶다.
첫째, 일터와 가정이라는 일상의 자리다. 정직하게 경영하려는 기업가, 과로와 실직 사이에 선 직장인, 집값 하락과 대출 부담에 시달리는 가정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신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 주는 제자도다. 정치적 공간이 좁은 시기에도 상대적으로 열려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증언의 자리다.
둘째, 이웃을 돌보는 자리다. 도시로 떠난 부모를 기다리는 농촌의 아이들, 도시 안의 농민공 가정, 홀로 남은 노인, 일자리를 잃은 청년이 있다. 가난한 이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성경의 명령(신 24장)은 어떤 제도 아래에서도 교회의 본질적인 언어다.
셋째, 청년의 질문 앞이다. 중국 청년들은 ‘내권’이라 불리는 소모적인 경쟁에 지쳐 가고, 일부는 아예 경쟁을 내려놓는 ‘탕핑(躺平)’으로 반응한다. 성공의 사다리가 좁아진 세대에게 교회는 성공보다 큰 삶의 목적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에게 주어지는 쉼의 약속을 전할 수 있다(마 11:28).
이 모든 일의 주체는 중국교회다. 바깥에서 온 사람은 지시자가 아니라 동반자이며, 가르치는 자이기 전에 배우는 자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중국을 아는 일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국교회가 고려해 볼 원칙은 네 가지다.
첫째, 안전을 먼저 생각한다. 현지 성도와 사역자의 신원, 장소, 활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선의로 올린 사진 한 장, 보고 한 줄이 누군가에게 큰 위험이 될 수 있다.
둘째, 이식하지 않고 동행한다. 한국식 프로그램과 모델을 들여오기보다 현지교회가 스스로 정한 필요에 귀를 기울인다.
셋째, 정확한 정보로 기도한다. 막연한 기도 대신 집값 하락에 흔들리는 가정, 취업을 앞둔 청년, 구금된 성도와 그 가족 그리고 현지 사역자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한다.
넷째, 낭만과 공포를 모두 경계한다. 출처가 불분명한 극적인 이야기는 확인한 뒤에 나눈다. 과장된 낙관도, 과장된 공포도 중국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중국을 바라보는 세 가지 균형
중국을 이해할 때 선교적 관점에서 세 가지 균형이 필요하다.
첫째, 두려움과 낭만 사이의 균형이다. 중국의 정치체제와 경제정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 전체를 하나의 부정적 이미지로 묶어서는 안 된다. 그곳에는 정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청년, 기업가와 농민, 학생, 교회, 수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을 정치체제와 동일시할 수 없다.
둘째, 성장과 사람 사이의 균형이다. 중국의 성장은 놀라운 성취다. 그러나 GDP가 오른다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숫자 뒤에는 장시간 노동과 주거비, 교육비, 청년 취업, 노후, 가족의 해체, 도농 격차가 있다. 기독교는 성장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그 성장은 사람을 위한 것인가?”
셋째, 중국과 하나님 나라를 혼동하지 않는 균형이다. 중국을 사랑하되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성공을 존중할 수는 있어도 정치권력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서구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또한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떤 국가도, 어떤 경제체제도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복음 그 자체도 아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는 불완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끊임없이 성찰되어야 한다.
경제 너머에 사람이 있다 중국 경제를 공부하다 보면 숫자가 쌓인다. GDP는 몇 퍼센트인가, 집값은 얼마나 떨어졌는가, 전기차는 몇 대 팔렸는가. 숫자를 따라가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다. 그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공장에서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가 있다. 도시로 이동한 농민공이 있다. 자녀 교육을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부모가 있다. 집값 하락을 보며 미래를 걱정하는 가정이 있다. 취업을 위해 경쟁하는 청년이 있고, 성공했지만 그 성공의 의미를 다시 묻는 기업가가 있다. 그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숫자로 보지 않으셨다. 사마리아 여인을 한 사람으로 만나셨고, 삭개오를 이름으로 부르셨으며, 갈릴리의 어부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로 세우셨다. 중국을 ‘선교 대상국’이라는 하나의 범주로만 보면 중국인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들이 어떤 경제 속에서 살아가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꿈꾸는지, 왜 안정과 가족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자녀 교육에 그렇게 많은 것을 쏟는지 알아야 한다.
중국의 정치체제도, 경제모델도, 세계질서도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과 진리, 사랑에 관한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선교를 위해 중국의 정치와 경제와 사회를 공부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공부다.
우리가 중국을 연구하는 이유는 중국을 판단하거나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중국교회가 진리와 사랑, 정의와 섬김, 정직과 소망의 공동체로 중국 사회 안에 서도록 돕기 위해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듯이, 그런 공동체가 세워진다면 경제가 아무리 빨리 변하고 정치 환경이 달라져도 복음의 증언은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질 것이다.
“변화하는 중국에서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중국을 아는 것은 중국을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다. 그 사랑이야말로 앞으로 중국선교를 위한 가장 좋은 나침반이 될 것이다. ♣
♣사진 출처 | ♣백석 | 중국 사역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