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사를 보면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은 영국의 해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였다. 그 후 1850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1856년에 알로우호 사건, 1894년 청일전쟁 등을 겪으면서 중국은 서양 문명의 위력을 절감하였다.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며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젖어있던 중국인들은 조국의 무기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이러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서양의 과학문명을 배우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정치혁명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문학 방면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서양의 명작을 번역 소개하여 서양의 합리주의사상을 알리기도 하고, 주로 문언(文言)으로 지어지던 문학작품의 문체를 혁신하여 백화(白話) 즉 회화체로 바꾸자는 문학혁명운동도 일어났다.
<차부뚜어 선생(差不多先生)>을 쓴 후스(胡適:1891~1962)는 문학혁명운동을 일으킨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는 북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북경대학교 총장까지 역임하였다. 이 글에 나오는 차부뚜어 선생은 꼼꼼하거나 정확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대충한다. 심지어 죽음과 삶의 구분조차도 명확히 하지 않고 둘 다 대충 비슷한 것으로 여기며 죽어간다.
결말부분에서 중국인들은 차부뚜어 선생의 이러한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닮아갔고, 중국은 이로 인해서 결국 게으름뱅이 나라가 되었다고 한 것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원만하고 모나지 않아 대인관계나 생활이 무난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사태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여 중요한 때를 놓칠 가능성이 있다는 단점을 가진다. 당시 중국이 처했던 어려운 현실은 바로 이러한 부정적인 면으로 인해 야기되었다고 자성(自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쓰여진 뒤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중국인은 어떠한가? 여전히 차부뚜어 선생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건가? 그동안 파란만장한 변화를 겪어온 중국은 오늘날 마침내 국력의 신장과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아직 후스가 살아있다면 그는 오늘의 중국인에 대해 어떤 글을 쓸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여기에 그 옛날 차부뚜어 선생의 전문을 소개한다. - 편집자 주
차부뚜어 선생(差不多先生) 후스(胡適)
당신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성은 차(差), 이름은 부뚜어(不多)라고.
우리는 중국의 어느 성(省), 어느 현(縣), 어느 촌(村)에서나 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를 본 적이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차부뚜어 선생의 이름은 매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데 이는 그가 전 중국인의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차부뚜어 선생은 눈이 둘이라는 점에서 당신이나 나와 모습이 대충 비슷하다. 하지만 그는 똑똑하게 보질 못한다. 귀가 둘이란 점도 같으나 분명하게 듣질 못한다. 또 코와 입이 달렸지만 냄새와 맛에 대해 그리 민감하지 못하다. 머리가 유난히 작은 것도 아닌데 기억력이 별로 좋지 못하며, 사고력 역시 치밀하지가 못하다. 그는 늘상 이런 말을 한다. “모든 일은 그저 대충 하면 되는 것이지 무얼 그리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누런 설탕을 사러 보냈는데, 그는 흰 설탕을 사 가지고 왔다. 어머니가 그를 꾸짖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했다. “누런 설탕이나 흰 설탕이나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그가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이 “즈리성(直隸省)의 서편은 무슨 성인가?” 하고 그에게 묻자 “샨시(陝西)”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아니다. 그것은 섬서가 아니라 샨시(山西)란다.” 라고 말하자, 그는 “샨시(陝西)나 샨시(山西)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라고 대답하였다.
훗날 그는 환전상에서 회계를 맡아보게 되었다. 물론 쓸 줄도 알고 셈할 줄도 알았으나 늘 정확하지 못하였다. 십(十) 자를 천(千) 자로 쓰고 천을 십으로 쓰곤 했다. 주인은 화가 나서 그를 노상 꾸짖었지만, 그는 다만 멋적게 웃으며 “천은 십 보다 한 획이 많을 뿐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요?” 라며 조심스레 말하였다.
어느 날, 그는 중요한 일로 기차를 타고 상해로 가야 했다. 기차역에 느긋하게 도착했으나 그만 2분이 늦어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멀어져 가는 기차의 연기를 멀거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 떠나는 수밖에 없겠는걸. 오늘 가나 내일 가나 별 차 없으니까. 헌데 철도청은 지나치게 고지식하군. 아니 8시 30분에 떠나나 8시 32분에 떠나나 별 차 없지 않은가 말이야?” 그는 이렇게 중얼대며 천천히 집으로 향했으나 마음속에서는 끝내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어째서 기차가 2분 더 기다려서 그를 태우지 아니했는지.
어느 날, 그가 갑자기 병이 들자, 그의 가족에게 동가(東街)의 왕(汪) 의원을 급히 청해 오게 하였다. 그의 가족은 허둥지둥 나섰으나 갑자기 동가의 왕 의원을 찾아낼 수가 없어 결국 서가(西街)의 수의사인 왕(王) 의원을 청해 오게 되었다. 차부뚜어 선생은 병석에 누워 사람을 잘못 데려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병이 위급한지라 심히 괴로워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생각했다. “왕(王)의원이나 왕(汪)의원이나 의원임에는 별 차 없으니 그냥 진맥을 받도록 하지 뭐.”
수의사인 왕 의원이 침상 곁으로 다가가 가축에게 치료하는 방법으로 차부뚜어 선생을 치료한 지 채 한 시간도 못되어 차부뚜어 선생은 거의 초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운명할 즈음, 차부뚜어 선생은 끊길 듯 말 듯 말을 이어갔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벼..별..차 없어. 모든 일은 다만 대...대...대충 하면 되는 거야. 무...무얼...지...지...지나치게 따지겠는가?” 그는 이 말을 남기고서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 차부뚜어 선생은 매사에 얽매이지 않고 달관했었다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일생동안 편협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았으며 따지고 들지 않았으니 참으로 덕행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후에 법호(法號)를 지어 그를 원통대사(圓通大師)라 일컬었다. 그의 명성은 점점 멀리 퍼져갔고 해가 갈수록 더욱 널리 알려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동을 본받았다. 중국인 모두가 하나같이 차부뚜어 선생을 닮게 되었으나 중국은 이로 인해서 결국 게으름뱅이 나라가 되고 말았단다.
정리 |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