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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0 통권 92호     필자 : 강인규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1920년대의 반기독교(反基督敎) 운동


중국교회는 의화단이라는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그 후 중국교회의 황금시대라고 불릴 만큼 눈부신 부흥을 하게 되었다. 마치 흡족한 봄비가 내린 후 죽순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기쁨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좋은 일이 있으면 궂은일도 있듯이 1922년에서 27년까지 5년여에 걸쳐 중국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반기독교운동이 마치 강한 회오리바람처럼 부흥하는 중국교회위에 세차게 몰아치게 되었다.

시대적 배경

신해혁명(辛亥革命)은 기울어져 가는 중국에 새로운 희망과 힘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혁명이후 군벌의 난립과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야기된 정치적,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이를 검토하는 반성의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검토와 반성의 소리 가운데 신문화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당시 지식인들은 중국이 혼란한 원인을 전통사상인 유교 때문이라고 간주하였는데, 유교가 집권자의 편에서 백성들을 통치자의 노예로 여기는 도구로 전락하였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유교사상은 중국인들을 보수적이며 이기적이고, 겁쟁이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극심한 비난으로 인해 유교사상은 당시의 일반인, 특히 젊은 청년들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사상의 기초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신문화운동은 유교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새로운 학술사상을 도입하여 중국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불과 몇 년 내에 서방 학술 사상을 연구하는 풍토를 신속히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가주의, 실험주의, 경험주의, 실용주의 등은 물론, 서구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등 당시 서방 사회의 새로운 사상들을 적극 연구하고 도입하였다. 비록 각 사상 간의 차이는 컸지만, 이러한 사상들은 구국의 사명감이 강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 서방으로부터 전래된 비기독교 사상들이 당시 중국의 민족주의의 지배아래, 기독교와 교회에 강한 반대와 비판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파리 평화회담에서 중국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자 중국 국내의 학생, 상인계급층에서는 심한 반발과 함께 외교 교섭에 실패한 당국에 대해 격렬한 비난의 여론이 빗발치듯 발표되었다. 특히 세계열강들에 대해 강렬한 회의와 원성의 소리가 가일층 고조되는 가운데 상하이(上海)에서 중국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착취한 일본 기업인들 때문에 일어난 노동자 폭동 등 일련의 사건들이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외국인들은 모두 제국주의자들이라는 판단을 가져왔으며, 이에 상대적으로 형성된 강렬한 민족의식이 강력한 배외사상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생긴 제국주의에 대한 심한 반발과 비판은 서방 제국주의 국가에서 전래된 기독교가 쉽게 공격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되었다.

반기독교운동의 전개 과정

신문화운동이 형성되면서 1919년 오사운동(五四運動)이 발발하기까지, 중국의 학술계와 사상계에 종교에 대한 회의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회의주의는 뚜렷한 사상적인 배경을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모든 종교가 비판과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22년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비판의 대상이 기독교로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베이징(北京) 칭화(清华)대학에서《제11차 세계기독교학생동맹회의(1922. 4. 4~4. 8)》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독일과 러시아 등 세계 30여국 대표 146명과, 중국 각 성(省)의 대표 4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제사회와 종족 문제, 기독교와 사회와 실업계의 개선, 기독교는 어떻게 현대 학생들에게 전도할 것인가? 학교생활의 기독교화, 학생들의 교회에 대한 책임, 어떻게 하면 세계 기독교 학생 동맹회가 세계적인 강력한 단체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회의의 광대한 규모와 대대적인 선전이 뜻밖으로 비기독교 학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3월 9일, 상하이 각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비기독교학생동맹》을 조직하고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선봉이며, 이번 세계기독교학생동맹 대회는 자본주의의 지배경제 회의”라고 비난하였다. 베이징의 지식층과 학술계에서도 이에 적극 호응하여, 《비종교대동맹(1922. 3. 20)》을 조직하고, 역시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비록 그들은 선언문에 비종교라고는 했지만, 그 주요한 내용은 역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들은 특히 기독청년회를 맹렬히 비난하는 한편, 기독교는 과학과 위배되며, 인민들의 사상을 속박하고, 청년들을 마취시키는 독물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4월 9일, 《세계기독교학생 동맹회의》가 폐막 된 후 이튿날《비종교대동맹》은 베이징에서 제1차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무려 2천여 명이나 참여하였다. 그리고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광저우(广州), 난징(南京), 항저우(杭州), 창사(长沙), 샤먼(厦门)과 푸저우(福州) 등 전국 각지에 분회를 설치하고, 기독교 반대 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하였다.

1924년 4월, 광저우의 성삼일학교에서 학생 대표를 퇴학시키는 계기로 잠시 잠잠했던 반기독교운동이 다시 불붙기 시작하여 그 해 8월 비기독교학생동맹을 다시 조직하였다.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도 반기독교운동을 교회 교육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유도하여, 교육의 주도권을 국가에 귀속하도록 촉구하였다. 1924년 7월, 중화교육 개진회(改進會)는 난징에서 총회를 개최하고,《교육권 귀속안》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전국 교육 연합회는 제10회 총회를 개최하면서, “외국인이 국내에서 교육 사업에 종사하는 것을 제재한다” 는 결의안과 “학교 내에서 전도 활동을 금지한다”는 결의안을 동시에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교육권의 정부 귀속 문제는 전국적으로 그 의견을 일치하게 되었다.

오삽(五卅)사건(1925. 5. 30, 상하이)이 발생한 후 전국적으로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 정서와 감정이 고조 되었고, 《제7차 전국학생대표대회(6월 상하이)》에서《비기독교운동》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학교 학생들까지 이에 호응하였는데 5월부터 그 해 년말 까지 전국 기독교학교에서 발생한 학생운동만 43건이 달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전국적으로 파급되어서, 상하이와 베이징은 물론 각 지방의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하여 기독교를 반대하는 글과 논설들이 수없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여론의 압력 아래 교육부는 1925년 11월 16일, 모두 6항의 《외국인자본 학교설립 인가법》을 통과시키며 전도를 목적으로 학교를 설립할 수 없고, 학교의 교과 과정에 종교 과목이 필수 과목이 될 수 없다고 명백히 규정하였다.

그 후 비기독교운동은 더욱 구체화 되어, 기독교학교는 반드시 정부에 등록해야 하고, 정부의 규정에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한 때 교회를 파괴하기도 하고 선교사를 축출하기도 했지만, 1927년 국공 합작이 분열되고, 장제스(蔣介石)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전국을 장악하면서 정국이 일단 안정되었다. 

그리고 1928년 산둥(山東)에서 발생한 지난사건(濟南事件)은 반일 감정을 고조시켜 상대적으로 비기독교운동이 완화되면서 5년여 동안의 반기독교운동의 거센 폭풍이 점점 평온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반기독교운동의 형태

1920년대 반기독교운동은 청말(靑末)의 반기독교운동과 또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시대의 반기독교운동과 청말의 의화단사건을 비교하여 보았다. -표 없음

1920년대 반기독교운동은 젊은 학생들이 그 주된 세력으로 활동하였고, 그 배후에 차이원페이(蔡元培)와 후스(胡適)과 같은 일부 교육가, 문학가, 사상가 등 당시 중국 사회를 대표하는 현대 고위 지식층들의 지도와 지지를 통해 거국적으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그들은 의화단의 폭력, 살인, 파괴 등을 통해 기독교를 반대하기보다는 신문과 잡지 등을 발행하여, 언론을 통해 기독교를 비난하고 공격하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상적 배경

20년대의 중국 지식층들이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이토록 강력히 반대하였을까? 그들이 발표한 언론들을 통해 그들이 기독교를 반대한 입장과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류와 사회의 각종 현상과 문제들을 과학을 통하여 해결, 이해하려는 과학주의는 자연 현상이외에 어떠한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성과 과학은 사람들을 종교와 미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여 인간관계를 증가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원들을 적절히 통제하고 이용하여, 종교보다 훨씬 인류의 행복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 당시 과학주의 사상을 대표하던 천두시우(陳獨秀)는 1928년에 “인생진의(人生眞義)”라는 글을 발표하여 “예수교는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였다고,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물질과 사람을 창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존재마저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의 인생관은 완전히 믿을 수 없다.”라고 비난하며 과학이 종교를 대신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천두슈는 예수의 숭고한 인격을 크게 존경하여, 이후의 과학주의자들이 이러한 예수의 숭고한 희생, 관용과 사랑의 정신을 기리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록 과학주의가 반기독교운동에서 주도적인 사상의 위치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당시 기독교를 반대하는 젊은 학자들에게 반기독교의 이론과 사상적인 뒷받침을 제공하는데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남았다.

1920년대의 중국 젊은 지식층들은 비록 서방 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청말의 민족주의적 반기독교 사상이 뿌리 깊게 내려 앉아 있었다. 특히 20세기 초 중국은 현대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중화민국이 성립되었고 국부 쑨원(孫文)은 민생, 민족, 민권의 삼민주의 사상을 국가의 중요한 통치 이념으로 삼고 1918년 “열강을 무너뜨리고, 군벌들을 몰아내자”라는 구호아래 국민혁명을 발동하였다.

20년대 반기독교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중국소년학회(1919. 7. 1)》의 민족의식이 강한 젊은 청년들은 후에 공산당과 청년당의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다. 그들은 애국 교육을 제창하여, 교회학교들은 중국 교육의 건국 원칙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며 국내의 모든 교회학교는 교육부에 등록하고, 이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에 그들은《국가교육회》를 발기하고, 교회학교 반대와 교육권의 정부 귀속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20년~21년까지 베이징에서 연속 세 차례에 걸쳐 강연회를 개최하고,《소년중국》이라는 기관지를 발표하여 그 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 회원 중에 다수가 나중에 비기독교 대동맹에 가입하였다.

반기독교운동 중에서 국민당은 비교적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교회와 선교사들을 보호하는 태도를 견지하였으나 랴오중카이(廖仲愷)를 비롯한 많은 국민당 인사들은 개인적으로 비기독교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는 불평등조약의 보호아래 이미 일종의 특수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서 중국의 민족주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1920년대 반기독교의 많은 사조 중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입각하여 종교와 철학 등 모든 것들이 물질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물질은 우주의 모든 사물의 본체이지만,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한 실체에 불과한 신(神)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계급사회에서 종교의 역할과 지위는 신성한 권위의 형식에 의해, 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안정을 도모하는데 기여 할 뿐이며 미래에 대한 환상에 불과한 압박받는 사람들의 아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허구한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를 제거하는 것은 그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가장 필요한 조건이라고 믿고 이를 위해 공산주의를 실행하여 종교를 반드시 소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22년 3월 9일 상하이에서 발표한《반기독교학생동맹선언문》 내용은 사회주의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명백하게 알려주고 있다.

“최근 각 자본주의 국가는 중국에 교회를 설립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인민들을 유혹하여 자본주의를 환영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에 기독교 청년회를 설립하고 있는데, 이는 자본가 밑에 선량한 개를 키우기 위함이다.…현대의 기독교와 교회는 바로 자본주의 경제 침략의 선봉대에 불과하다.”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기독교가 자본주의 시대에 인민들을 학대하고, 자본주의의 보호자 또는 자본주의를 확장하는 선봉대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반기독교학생동맹선언문》에 이러한 사회주의 사상이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와 같은 관점이 이후의 반기독교운동에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기독교운동의 영향

기독교운동은 분명히 이는 의화단사건 이후 발전하는 중국교회에 차가운 물을 퍼붓는 것과 같은 심한 타격과 좌절을 가져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또한 그 후의 중국교회에 중요한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근대 서양에서도 문예부흥과 계몽사상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신의 권위와 존재를 부인하는 과정을 겪었던 것처럼, 중국인들이 서구 사상과 문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방의 학문과 사상으로 종교를 비판하고, 인간성을 강조하며, 사상을 해방시키고, 모든 권위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신문화운동 과정에서 반드시 격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20년대의 반기독교운동은 확실히 19세기 청말에 일어났던 반기독교운동과는 성격상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중국 사회의 성숙한 면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서구의 새로운 사상으로 비폭력과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공개적인 토론을 통하여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을 비난하였다. 그들의 반기독교 논리에서 젊은 지식인들의 강렬한 애국정신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반기독교운동은 그 대상이 비록 기독교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지식인들이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국가에 대한 사명감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다.

물론 중국 기독교는 그들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야 하는 고통을 겪지만, 그 고통 또한 헛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기독교의 정확한 교리를 지면을 통해 중국 지식층과 학자들에게 널리 소개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반기독교운동 이후에 중국교회에서는 자립의 소리가 높아져 중국교회의 본토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과연 비가 온 후에 땅은 더욱 단단해 진다는 속담이 실감이 난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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