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1858년 천진조약과 1860년의 북경조약에서 서방 열강들은 중국에서 선교의 자유는 물론 법적으로 선교사들의 생명과 재산의 보장까지 받았지만, 의외로 중국 전역에 걸쳐 중국인들의 반대와 반발로 말미암아 중국 교회는 역사에 없는 고통과 수난을 격어야 했다. 1960년부터 크고 작은 교안들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는데, 그 수는 무려 8백여 건에 달하고,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교회 탄압의 최고 절정에 이르면서 그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기독교를 반대와 혐오하는 마음이 강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왜 반대하는지 간단하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중국인들은 기독교는 중국의 전통유교사상과 반대된다고 생각하였다 유교사상은 한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2천여 년 동안 중국인들의 사상의 중심이 되어 중국사상의 주류가 되었고, 그들의 사상을 지배하며, 정통적인 위치를 확보하여 왔다. 많은 중국인들은 유교 사상의 깊은 뜻과 섭리에 대해 반드시 잘 알지는 못하고, 또 그 뜻대로 꼭 생활하지는 못해도, 유교사상을 매우 존경하고, 또 세상에서 유교와 같은 좋은 사상이 없다고 자부하여 왔다.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국문화는 수 천년동안 외적의 강력한 침략을 받고, 또 외래문화의 도전을 받아 왔지만, 그 때마다 강력한 동화력(Assimilation)을 발휘하여 외래문화를 동화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한나라 때의 흉노, 위진남북조시대의 오호, 수당시대의 돌궐, 송나라 시대의 요, 금, 하, 원나라 시대의 몽고, 명나라 시대의 달단과 만주족 등의 변방민족들은 끊임없이 중국에 도전해 왔지만, 결국은 모두 중국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유사 이래로, 중국인들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화문화와 외래문화를 구별하여, 자국의 문화를 자랑하고, 외족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하여, 그 문화를 천대하였을 뿐 아니라, 외래문화를 중국문화로 동화시키는 것을 전통으로 생각하고, 이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왔다.
그런데,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로, 기독교 사상 역시 인류사회에 유교와 동등한 위치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유교보다도 더 진보적인 면도 없지 않아 중화문화에 상당한 위협적인 존재로 대두되었다. 그래서 많은 중국지식인들은 중화문화로 외래문화를 동화시킬 수 는 있지만, 외래문화로 중화문화를 변화시키는 예가 없었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반대하게 되었다. 청 말의 유교학자 왕병섭은 “중국인은 중국인 스스로의 종교가 있어, 중국인으로써는 반드시 중국 성인의 가르침을 존경하며, 실행하여야 하고, 오로지 외국인만이 외국 종교를 숭상해야 한다.”고 중국인과 외국인의 종교를 구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처럼 중국 사대부 계층들은 기독교가 중화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하여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청 말의 대학사(大學士) 왜인(倭仁)은 정부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외국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보고, 황제에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예수교가 성행된 이래로 국가에서 조차 오랑캐를 숭상하고, 이를 가르치고 있다고 비평하며, 수년 이후에 중화문화는 쇠퇴하고, 오랑캐 문화가 번창하여 많은 중국인들이 오랑캐 문화로 귀의하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그 외에도, 기독교의 규범이나 사상이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 정통의 문화적 습관이나 사상에 위배되어,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치 짐승과도 같게 보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써, 기독교는 조상숭배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이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상숭배는 유교 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후손들이 조상들에게 효도를 표하는 가장 중요한 예의범절 중의 한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기독교가 조상숭배를 반대하는 것을 보고, 불효한 종교이며, 마치 짐승보다 더 못한 종교라고 비난하며 반대하였던 것이다.
2. 중국인들은 기독교는 문화 침략의 일종이며, 제국주의의 침략의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1807년 영국 런던회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ion)이 중국에 와 근대 중국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했지만,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이후 남경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의 문호가 부분적으로 개방되고, 1860년 제이차 아편전쟁으로 영. 불. 미. 소와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중국의 문호는 완전히 개방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정부는 외국선교사의 생명재산은 물론 중국인 신도들까지 보호해야 하는 법적인 책임까지 맡아야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만약 교안이 발생하면, 선교사들은 법에 의거하여 보호책임을 못한 지방장관의 책임을 추궁하고, 많은 손해 배상을 청구하였다. 특히 불란서는 스스로 천주교를 보호하는 국가로 자처하여, 교안이 발생하면, 불란서 공사가 거의 모두 개입하고, 심지어는 군대까지 파견하여 중국 정부에 심한 압력을 주었기 때문에, 단순한 종교 문제가 복잡한 외교 문제로, 심지어는 군사 문제로까지 승화되어 청 말에 중요한 정치외교와 사회문제로 대두 되었다. 신성한 선교활동이 이처럼 제국주의의 정치세력과 군사력에 의뢰하여 전개되었기 때문에, 불평등조약으로 자존심이 상하고, 큰 경제적 손해를 본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었다.
더욱 우스운 현상은 이러한 상황아래서 중국 기독교 신자들은 중국 안에서 중국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외국인의 보호를 받는 치외법권적인 괴상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서방 역사가 와느셔스 (Warnshius)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법에 의하면, 외국정부는 단지 신자들의 신앙보호자로써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신자들과 중국의 광대한 민중들을 나누어 놓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중국 신자들은 중국 안에서 외국인의 보호를 받고 중국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특수한 독립왕국을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선교 자유의 조약은 중국 국가의 위신과 주권을 완전히 말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왜냐하면, 중국 신자들은 외국정부의 보호아래 중국정부의 통제를 완전히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 자유의 조약아래서, 서방선교사들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중국 침략정책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조약은 중국정부가 원해서 개방한 것이 아니고, 서방제국주의의 우수한 군사력으로 중국정부에게 무력으로 탈취한 조항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복음과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중국인들은 기독교는 서방열강 제국주의의 도구로 중국침략에 가담하였다고 생각하여 기독교를 심하게 배척하고 있다. 또한 일부의 중국인들은 종교 자유의 보호아래 일단 기독교인이 되면, 외국인처럼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에 귀의하고, 중국의 전통문화와 제도들을 멸시하고, 외국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중국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문화 침략의 독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3. 중국인들은 기독교는 중국고유의 사회풍습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였다 중국문화는 유구한 역사와 종교적인 요소가 강한 복잡한 특징을 갖추고 있다. 특히 청나라에 이르러 도교 사상과 각종 민간의 미신과 전설 등이 혼합하여, 일반 민간인들의 보편적인 신앙이 되었다. 이러한 미신과 전설 등은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이를데 없지만, 당시 중국인들의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또한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 영신대회(迎神大會) : 중국민간 사회에 계속 전해오던 영신대회는 와서 더욱 보편적으로 성행하여, 중국 사회의 중요한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 대회를 개최할 때마다 필요한 경비는 각 가정에서 조금씩 부담하였는데, 기독교인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비를 제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러한 대회에 전혀 참석하지 않아서 이웃간의 관계가 원수와 같았으니, 그들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2) 미신과 오해 : 중국사회는 진한시대이래로 미신과 술사들의 행위를 상당히 믿고, 숭상되었다. 비록 그들의 가르침과 방법이 황당하기 이를데 없지만, 일반 민중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양주 교안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중국인들은 외국선교사들이 죽은 사람의 눈을 빼고, 아이들을 먹는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민간인을 선동하여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특히 각 지방의 유지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아이들을 유괴하여, 눈을 빼고, 뇌를 먹는다는 유언비어를 고의적으로 배포하여 민중들을 선동하기도 하였다. 일반 중국인들은 이를 그대로 믿고, 분개하여 외국 선교사와 중국신자들을 살해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등 온갖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기독교의 각종 자선사업의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 의심하는 눈으로 보게 되었다.
3) 도덕윤리상의 문제 : 중국은 유교사상의 기반 하에 독특한 윤리와 도덕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여 왔다. 특히 남녀관계를 매우 중시하여, 남녀가 일곱살이 되면 함께 앉는 것을 엄히 금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남녀가 함께 앉아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서 온갖 패륜행위를 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또 많은 패륜관계의 유언비어들을 유포하여 백성들을 선동하여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4) 교회의 재정문제 : 서방 교회의 지원을 받는 교회는 재정적으로 부유하여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곤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돈이 많은 것은 은이 많기 때문인데, 그 많은 은은 외국 선교사들이 중국인의 눈을 빼고, 심장을 도려내어 이를 제련하여 얻어진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4. 결론 1860년 북경조약으로 반세기 이상을 기도와 인내로 기다리던 중국 선교의 문이 드디어 완전히 개방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의 소리가 아직 사라지기 전에 중국 교회는 전에 없는 엄청난 반대세력에 봉착해야 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그 반기독교 세력은 주춤했지만, 청말 중국교회가 격어야 하는 수모와 박해는 실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중요한 원인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크게 분류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중국의 전통 문화와 다르고, 기독교가 서방 제국주의의 앞잡이라 생각했으며, 또 기독교의 규범이 중국 사회의 윤리 도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고, 더욱이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고의적인 박해까지 겸쳐 중국교회는 심한 수난기를 맞아야 했다. 물론 선교사들과 중국인 신자들의 태도도 고려할 가치가 없지는 않다. 이토록 청 말은 민간인, 교회, 정부의 삼각관계의 악순환에서 하루도 고요할 날 없이 심한 분쟁을 거듭해야 했다.
강인규 | 타이완 중위엔대학 교수, 중국 교회사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