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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0 통권 88호     필자 : 전순동 프린트   이메일 
[중국역사 속으로]
역사를 투영한 중국의 수도, 그것은 시대를 반영한 거울

1. 전통시대의 수도와 오늘날의 수도는 어떻게 다를까?
인류 역사를 보면, 문명의 성립단계에서 사회가 복잡하게 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층 분화가 생기면서, 원활한 통치를 위해 국가가 출현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형성되면 거기에 반드시 수도(도읍지, 왕도, 국도)가 출현하게 된다. 이것은 현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정치나 군사 조직의 중추적 기능을 위해 수도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면, 수도의 존재는 단순한 정치 및 군사적 기능의 필요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지배자의 정권을 정통화하기 위한 무대로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정권의 정통화의 방법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전통적인 왕조시대와 근대 국민 국가 시대에는 각각 정권의 정통화의 방법이 다르고, 수도의 필요성도 자연 상이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 국가의 수도는 나라의 중앙정부가 있고 일국의 원수가 거주하는 도시이다. 그 수도는 물론 경제적, 문화적 활동도 집중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정치, 군사의 중추적 기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이것은 근대국가가 상비군을 중심으로 한 국민군의 형성을 배경으로 출현하였으며 국가가 군대와 경찰을 독점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는 그 정통성을 어디까지나 국민에 근거하고 있고, 국민으로 구성된 국민군에 의해 지탱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수도에는 국민 또는 시민이라는 관념을 자아내는 광장 내지는 공공장소가 있기 마련이고, 또한 그곳은 국민적 행사의 무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에 걸쳐 마련된 중국 베이징(北京)의 톈안먼(天安門) 광장,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몰(The Mall) 등이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으며, 서울 시청 앞 광장이나 여의도 광장도 그런 유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중국 전통시대의 수도(왕도, 국도)를 보면 현대 수도와는 다른 구조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실은 중국의 수도는 오늘날만큼 정치와 군사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 아니었다. 황제라 하더라도 그의 권력은 자의적이 아니었으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크게 한정되어 있었고, 군사력도 분산되어 있었다. 중국 정치의 특징은 황권의 강화를 위해 권력을 분산시켜 놓은 것이 일반적인 특징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주는 자신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월적인 하늘의 힘에 의거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받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수도에는 통치를 위한 정치 기구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하늘이나 신을 섬기는 제단을 두어 그것을 중시하고 천자가 그 제사를 주관함으로써 정통성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곧 수도는 여기저기의 제단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초월적인 하늘이나 여러 신에 제사하는 왕조의례의 무대로서 설계되어 있었고, 이러한 예는 당대의 창안(長安, 오늘날의 시안)이나 명?청대의 베이징의 경우가 전형적인 것으로, 오늘날에도 베이징에 가면 자금성 좌우의 종묘와 사직제단을 볼 수 있고, 또 황성인 자금성을 중심으로 남쪽에 천단(天壇), 북쪽에 지단(地壇), 동쪽에 일단(日壇), 그리고 서쪽에 월단(月壇)이 오늘날 관광지로, 공원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제단들은 천자가 초월적인 천이나 신의 힘을 빌어서 통치하였고, 또한 그런 제사와 의례에 의해 정통성을 보장받으려 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2. 중국 역대의 수도
중국에는 오랜 역사 변천 가운데 역대 수 많은 도읍지, 곧 수도가 출현하였다. 중국사에서 왕조의 수도가 되었던 도시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예를 든다면 시안(西安, 長安), 베이징(北京), 뤄양(洛陽), 난징(南京), 카이펑(開封), 安陽(은의 도읍지), 항조우(杭州, 臨岸) 등 7개 도시이다. 이 7대 도시 중 안양과 항조우는 각각 은의 수도와 남송의 도읍지로 화북과 화남을 모두 통일한 왕조는 아니나, 안양은 중국문명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황하문명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남송의 항조우는 경제적인 번영에 의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고도로서의 위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화북과 화남을 모두 통일한 정권의 수도로 한정한다면, 시안(창안), 뤄양, 카이펑, 난징, 베이징으로 압축할 수 있으며, 이들은 흔히 중국의 5대 고도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 도시가 통일 정권이든 지방정권이든 불문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수도로서 존재하였는가를 보면, 시안(약 1077년간), 베이징(903년간, 중화민국 시기 포함), 뤄양(885년간), 난징(450년간, 중화민국시기 포함), 카이펑(366년간) 순이 된다.

오늘날의 시안은 옛날 창안(長安)으로서 유방이 세운 한(漢, B.C. 206-AD202), 이연이 세운 당(唐. 618-907)대에 수도로 번영하였으며, 뤄양은 유수가 세운 후한(後漢, 25-220), 조비가 세운 위(魏, 220-265), 사마염이 세운 서진(235-316) 등의 수도로 번창한 곳이다.

특히 당나라(608-917)의 수도 창안(長安, 西安)은 위수 남안에 건설된 성곽도시이다. 그것은 수나라의 따싱성(大興城)을 바탕으로 건설된 것으로, 전체 규모가 정사각형에 가까운 사각형이었으며, 크기가 남북 8.6㎢, 동서 9.7㎢에 이르고 있었고, 5.3m 높이의 거대한 성벽으로 주변을 둘러싸인 거대한 성곽도시였다. 창안의 도시는 성안 북쪽 중앙에 황성을 배치하였는데, 황성은 북쪽으로 황제의 거처를, 남쪽으로 정치나 의식을 행하는 공간을 배치를 하였으며 남쪽에는 관청가를 두었다. 그리고 황성의 동남쪽과, 서남쪽에 각각 ‘동시’, ‘서시’라는 시장을 두어 활발히 상업 활동을 장려하였다.  

도로는 남북으로 11개, 동서로 14개의 큰 도로를 바둑판 모형으로 내었다. 그 폭도 남북으로 뚫린 도로가 147m, 동서로 뚫린 도로가 69m나 되었다고 하니, 고대 로마제국의 가장 큰 도로가 12m 였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아니 오늘날의 넓은 도로와 비교해 보아도 엄청난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수십 미터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방(坊)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당시 그 인구는 백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70만 정도라는 설도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나 압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와 함께 당시 세계최대의 도시 중의 하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백만 도시의 장안은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이 모여 살았다. 또한 외국 사절단이나 유학생, 유학승이 항상 4,000여명 정도 체류하고 있었고, 그 외 서역의 상인 예술인 등이 많이 있어 장안은 그야말로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그리하여 장안은 서역이나 인도 혹은 북방 유목세계에서 가지고 온 문화 예술 풍습이 널리 유행하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장안성 한 가운데를 남북으로 달리는 주작 대로를 경계로 동편은 ‘가동(街東)’, 서편은 ‘가서(街西)’라고 하였다. 가동에는 관인의 저택이 많았고, 과거수험생, 대상인을 고객으로 하는 음식점, 여관, 각종 고급 전문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가서에는 서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서역 상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당
대 장안에는 특히 외래 종교가 성하였다. 서역인들이 신봉하던 현교(妖敎)가 크게 성행하였다. 그리고 서방에서 처음 전래된 크리스트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곧 경교(景敎)가 성행하였다. 이것은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정된 크리스트교의 일파이지만, 그 후 페르시아를 거쳐 당나라에 전래되어 많이 중국에 유행하였다. 중국에서는 기록상으로 보아 정관(貞觀) 9년(635)에 전래되었으며, 장안성내의 일각 의녕방(義寧坊)에 파사호사(波斯胡寺, 후에 大秦寺로 개칭)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현재 시안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에 진열되어 있는데, 그곳을 찾아가면 진열실 안의 “大秦景敎中國流行碑(대진경교중국유행비, 중국에서는 ‘로마’를 ‘大秦’으로 표현하였음)”라 쓰여 있는 커다란 비석이 방문객의 눈길을 끌고 있는데, 필자도 그곳에서 이 비석을 배경으로 살짝 기념촬영을 한 적이 있다. 이외에도 페르시아의 마니에 의해 창시되었다는 마니교도 유행하는 등 종교 면에서도 당대의 국제적인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다.

창안은 안사의 난 이후 쇠하고 10세기 초 수도가 뤄양으로 옮겨지면서 성은 황폐화 되었다. 그 후 창안은 송원대를 통하여 소도시에 불과하였으며 지방 소도시로서 시안부(西安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명초의 일이다. 태조 홍무제가 둘째 아들 상(?)을 진왕(秦王)으로 봉하고, 현재의 시안성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 규모는 당대 창안성의 약 6분의 1에 불과하였다고 하며 지금의 종루와 고루도 모두 명대에 만들어 진 것이다.

원래 황하 유역에 통일국가를 형성하여 온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영역이 양자강까지 확대되었는데, 위진남북조시대이후 강남지방이 활발해 개발되어 강남델타 지방은 경제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경제의 중심이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차차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당말 오대에서 북송에 이르는 동안 많은 왕조들이 수도를 카이펑에 정한 것도 이러한 경제 중심의 변화를 고려하여 운하에 의한 남북일체화를 꾀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황조를 세운 북방민족, 곧 요(遼, 907-1125), 금(金, 1115-1234), 원(元, 1206-1368) 왕조는 농경지역과 유목 수렵 지역과의 경계선상에 가까운 현재의 북경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 결과 많은 전통 중국인은 자연 강남으로 밀려나 남북으로 갈리게 되었다.

거기에 더욱 중국은 황하와 양자강 사이를 흐르는 회하(淮河)를 중심으로, 지리적으로 북과 남으로 갈리게 되었다. 연 강우량 1000㎜를 경계선으로 그 이하의 강우량을 가진 회하 이북의 지방은 밀과 조를 중심으로 한 밭농사 지대가 되고, 그 이상 강우량을 가진 회하 이남은 벼를 중심으로 한 논농사 지역이 되었는데 이런 지리적 조건과 역사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원말 명초에도 남북분열의 정국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원 세조 쿠빌라이(1260-1294)에 의해 원조의 영토적 통일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남북 분열의 기운은 여전히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명 태조(太祖, 洪武帝, 1368-1398) 때에도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카 건 문제를 몰아내고(정난의 변, 1399-1402) 제위에 올라 명의 3대 황제로 즉위한 영락제가 1421년에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이후 베이징은 고유명사 ‘베이징’이 되었다. 그전에는 단순히 보통명사로서 ‘북쪽에 있는 서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따름이었으며, 수도를 동북지방의 상경(上京) 임황부(臨潢府)에 두고 있던 요나라 시대에는 현재의 베이징이 그곳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경(南京)’이라 불렸던 것이다. 이후 15세기 이후 베이징은 명청의 수도와 오늘날 중국의 수도가 된 것이다. 

3. 중국 역대 수도의 이동축의 변화와 그 동인
이상 중국 고도를 중심으로 수도의 이동 축을 그려보면 시안-뤄양-카이펑-북경 등 전체적으로 보아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지배 영역은 행정구획, 자연 지리적 환경, 종족, 언어, 생활습관, 역사 전통 등 여러 면을 기준으로 하여 내 중국(Inner China, Proper China, China 중국 본토)과 외 중국(Outer China, 중국 외부 지역)으로 크게 나누어 말해지기도 한다. 이 때에 송(宋, 960-1279) 왕조처럼 중국내부에 국한된 왕조가 있는가 하면, 당, 원, 청처럼 내 중국과 외 중국 모두 모두 지배한 시기가 있다. 그런데 내 중국과 외 중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 시기를 기준으로 할 그 전기에는 시안이, 후기에는 베이징이 수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안에서 베이징으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카이펑은 과도기의 수도로 작용하게 된다. 그것은 8세기 후반부터 10세기에 걸쳐서 외 중국의 이민족이 주요 군사거점이 서북에서 동북으로 이동하였고, 내 중국의 주요 곡창지가 회북에서 화남으로 이동하였으며 거의 동시에 유라시아 대륙의 간선 교통로가 주로 농업지대와 유목지대 경계선상인 육로로부터 해안 연안부의 해로로 전환하여 간 것도 수도의 변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도가 시안, 뤄양에서 베이징이나 난징으로의 이동하였는데, 이것은 강남지방의 경제력과 교통로가 육로에서 해로로 전환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해석 할 수 있다.

이
와 같은 수도의 변천은 중국의 역사 활동 공간이 동에서 서로, 그리고 남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수도와 남방 곡창지대를 연결하는 식량보급로, 그리고 수도와 변방을 연결하는 병참선의 근거가 황하에서 대운하로 이행하여 가고 있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리라.

오랜 중국사 가운데에 시안과 베이징이 가장 오랫동안 수도가 된 것은 양 도시가 내 중국과 외 중국의 경계영역, 곧 농업과 목축이 만나는 접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곧 내 중국의 농경지역의 통치와 외 중국의 유목지대와의 외교적 정치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편 뤄양이나 난징은 내 중국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중국에 기반을 둔 정권의 도읍지로서는 적합하지만 외 중국과 내 중국의 양 지역을 포괄하는 왕조의 수도로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운하의 연선이지만 황하의 범람지역이기도 한 카이펑이 오대의 후량(後粱, 907-923), 후진(後晋936-946), 후한(後漢, 947-950), 후주(後周, 951-960)의 뒤를 이어 북송(960-1127)의 수도로 된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곧 외 중국의 서북부와 동북부에 각각 탕쿠트족과 거란족이 병립하여 화북의 정권에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 쪽으로 군사행동을 용이게 할 수 있는 장소, 내 중국의 곡창지대가 화북 평야에서 양자강 하류에로 이동하여 가는 시기의 경제적 요인, 당시는 육로에서 해로로 간선교통로가 바뀌어 가고 있던 시기에 해당하고 있었기에 최적지로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카이펑 수도 정립은 시안에서 베이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수도 변천사를 볼 때, 원대이후의 베이징은 시안에 비해 여러 면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외 중국의 몽골족, 만주지방의 거란족이나 여진족 등 강력한 유목 수렵민이 출현하였다는 군사적 요인, 양자강 하류가 주요 곡창지내로 부각되었다는 경제적 요인, 그리고 거기에 외재적인 요인으로서 유라시아 대륙의 교통 간선망이 내륙의 육로에서 해안의 해로로 바뀌었다는 교통적인 요인 면에서 시안보다 훨씬 입지적 요건으로서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곧 베이징은 유목지대와 농경지대의 접점이었음과 동시에 육로와 해로의 점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중국 수도의 입지와 변천은 중국 내부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동향과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순동/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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