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개국하게 된 것은 아편전쟁(1840~1842)의 결과이다. 이 전쟁이 일어난 까닭은 영국 상인들의 아편 밀수출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만이 전쟁의 유일한 원인이었을까? 아편전쟁은 중국의 전통적 사회가 서양의 사고방식과 문화에 부딪혀 일어난 것이다.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대외에 대하여 쇄국을 하고 있던 중국은 아편전쟁을 통하여 전통적인 문화적 중국중심주의, 이를 바탕으로 한 조공체제와 중국 기존질서가 크게 동요하였다. 그리고 난징 조약으로 인한 개국은 중국을 반식민지화의 운명에 처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편전쟁은 이후 중국인들로 하여금 반식민․반봉건사회를 타파하려는 운동을 낳았으니, 이것은 곧 중국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17.18세기 중국의 호황
건륭(乾隆 1735~1795)말기부터 가경(嘉慶, 1796~1820)에 이르는 때는 18세기말, 19세기초의 시기로써 현재 영국을 필두로 유럽 여러 국가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산업 혁명으로 대량 생산 시대와 함께 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사회 및 경제 구조가 일변하고 있었으며, 이 중 영국은 자본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상품시장과 원료 공급지 확보를 위해 동아시아에까지 진출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특별히 차 무역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본래 유럽에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없었다. 중국을 통해 비단이나 뛰어난 도자기를 수입할 뿐이었으나, 유럽인들이 중국에 진출하고 나서부터 차를 접하게 되고 그 맛도 알게 되었다. 그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차 마시는 풍습도 유행하면서부터 차의 수입량이 매년 증가하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 중국 차를 처음 수입했던 것은 네덜란드 상인이었지만 나중에는 영국이 독점적으로 수입하게 되었다. 17세기 영국에 최초로 소개된 차가 18세기에 들어 급속히 수요가 늘어났는데, 18세기 말에는 18세기 초에 비해 그 수입량이 400배를 넘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 들여오는 수입품 중 차 수입이 최대가 되고 있었으며, 동서무역은 차 무역이라고 할 정도에 이르렀다.
영국은 자국의 특산품인 모직물을 가지고 와 팔려 했으나, 남방 중국의 더운 지방에서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에 영국은 차나 비단 등을 대량 수입함에 따라 부족한 부분을 은으로 결재하게 되었고, 이로써 영국은 대량의 은이 해외로 유출된 반면 중국은 은이 대량 유입됨으로 경제 호황을 이루게 되었다.
공행을 통한 폐쇄적 무역 체제
청조는 자유무역을 허용치 않고 있었다. 즉 중국은 다른 나라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설정치 않고 있었고, 외교나 무역이란 개념도 없었으며, 외국과의 관계는 대체로 조공 관계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청조는 해금정책을 쓰면서 중국문명을 사모하여 항해해 온 ‘만이(蠻夷,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풀어준다는 의식이 깊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특히 1757년(건륭 22) 이후 외국과의 단속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외국과의 상거래는 광둥(廣東) 1개 항구로 제한하고, 그것도 거래의 주도권은 공행(公行, Co-Hong)이라 불리는 조정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특허 상인 손에 장악된 극히 폐쇄적인 무역 체제였던 것이었다. 청조가 공행을 둔 것은 외국상인의 단속, 밀수 방지, 관세 징수 등을 원활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공행은 이 업무에 따라 외국상인의 신원을 보증하고 관세수속, 출입항 사무, 상품매매에서부터 식료품.식수.연료의 구입에 이르기까지 일체 외국 상인을 대신하여 처리하였다. 심지어 외국인은 부녀자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었고, 공원을 자유로이 거닐 수도 없었는데, 이처럼 외국상인의 행동은 모든 면에서 엄중하게 제한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고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를 제외한다면, 18세기 이후 중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나라는 분명 영국이었다. 영국에서도 중.영 무역(주로 차(茶)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것은 동인도회사(The East India Company)였는데, 이들은 중국으로부터 차.생사.면포 등을 수입하고 있었던 바, 특히 영국의 차수요 급증으로 인하여 이에 필적할 수출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고심하고 있었다. 또한 일확천금을 꿈꾸며 동방무역에 참가한 지방 무역상인(The Country Merchant)들도 차 거래에서 동인도회사에 밀려 극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시장 개척을 희망하는 본국의 산업자본가들과 결합하여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동인도회사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정부에 자유무역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의 중.영 무역에는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① 영국의 차수요 급증과 제한된 광동무역으로 영국 측은 항상 적자였고, 이로 인해 다량의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고 있었다.
② 산업혁명을 치른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광대한 시장을 가지고 있는 중국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커다란 매력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광동체제의 폐쇄성을 타파 할 필요가 있었다.
③ 차 무역에서 배제 당한 지방무역상인 및 본국 산업자본가는 동인도회사의 중국무역 독점권 폐지를 요구하였고, 동시에 정부차원에서 중국이 문호를 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여 왔기에 정부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동인도회사의 고민일 뿐 아니라 영국 정부의 고민이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1792년 마카트니(G. Macartney 1737~1806)를 대표로 하는 영국 사절단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광동 무역 개선을 요구하였다. 1816년에는 암허스트(W. P. Amherst, 1773~1857)가 파견되고, 1834년에는 네이피어(W. J. Napier, 1786~1834)가 초대 청국 주재 수석감독관으로서 도항해 와 교섭에 임했다. 그러나 세 차례의 사절파견 모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니, 청조는 광동 체제 변경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교섭 그 자체에 응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어 자금 수요가 많았기에 은의 해외 유출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 영국에서는 차 수입에 대한 중국 수출 상품을 찾아 고심하며, 비로소 인도산 아편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팔고 - 아편 밀수와 은가 등귀
수입 초과로 인한 적자를 해소하고 무역의 불균형을 깨뜨릴 새로운 상품의 개발에 고심하던 영국은 아편을 그 상품으로 등장시켰다. 아편은 양귀비과에 속하는 식물로, 분비되는 액으로 환을 지어 약품으로 소량 중국에 들어오기도 하였으니. 새로운 상품이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마취성이 강한 환각 물질로, 소량을 복용하면 진통과 지사의 효능을 가지지만, 이것을 자주 복용할 경우 쉽게 인이 박혀 매일 흡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독성 물질이다. 이를 장기간 복용하면 얼굴이 누렇게 변하고 몸이 마르면서 아편 중독자가 되는 것이다.
아편이란 이름은 그리스 말 ‘즙’ ‘액’을 뜻하는 opcon에서 유래하였는데, 포르투갈의 선원들은 arfium, oafyam이라 불렀고 인도에서는 opio, affion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명대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에 아부용(阿芙蓉), 즉 아라비아말 afyum의 음역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편(阿片, 鴉片)으로 통칭하고 있다. 서아시아로부터 소아시아 이집트 부근에서 많이 재배되며, 인도에서도 많이 재배되어 중국으로 수출케 된 것이다.
아편을 처음으로 중국에 가지고 들어간 것은 영국이 아니다. 이미 청 초에 소량이지만 포르투갈 인의 손에 의해 수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1773년 동인도회사가 아편 독점권을 획득한 이래 어느 정도 중국에 유출되었으며, 특히 1814년 인도에서 동인도회사의 무역 독점권이 폐지되고 개인 상인들의 활동이 허용된 이후, 아편이 중국으로 대량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아편 흡입자가 갑자기 증가하고 수입량도 격증했다.
아편이 환약으로 조제되어 특효약으로 사용되기까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기호성 마약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보건상.경제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담배에 섞어 피우거나 담뱃대에 담아 불을 부쳐 피우게 되자 아편은 병의 치료보다는 마약으로서 둔갑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아편 흡연이 유행하자, 옹정제는 1729년(옹정 7) 아편금지법을 제정하였으며, 이어 2년 뒤에 전국적으로 아편금지령을 내려, 아편 판매자 또는 흡연자를 엄히 처벌하면서 아편 단속을 철저히 했다. 그러나 아편 흡연은 금지령이 무색할 정도로 급격히 유행하여 민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관료들 사이에도 흡연하는 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제 중국 측의 수출 초과 상태에 있던 무역수지는 아편 수입의 격증으로 말미암아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이 역전시기는 대략 1831년 무렵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이 이후로 중국 국내의 은이 해외로 대량 유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로써 일어난 불황은 실업을 부르고 실업은 암거래 상인의 증가를 초래하였으며, 그것은 각지의 반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편유입이 증가하고 은가의 등귀현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편 금령의 목적도 크게 변화하였다. 1729년 시작된 초기 금령은 국민 보건상의 이유를 내세웠으나 도광(道光, 1821~1850) 연간에 들어오면 은의 해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금령이 나왔다. 특히 1830년대가 되면 그 중심은 아편 유입에 수반한 은의 유출, 은가 앙등에 대한 대책으로 되어 완전히 국가 경제 문제로 옮아간 듯한 느낌이다. 은가 등귀로 인한 사회불안과 국가 재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은의 유출을 억제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으며, 그것의 열쇠는 아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었다. 당시 아편 대책을 둘러싸고 청조 내부는 해금론과 엄금론으로 대립했다. ‘해금론(解禁論)’은 허내제(許乃濟) 등이 주장한 것으로, 이를 엄금하니까 아편 가격이 상승하고 밀수가 성행하여 은이 해외로 많이 유출된다는 판단에서, 오히려 아편의 금지를 풀고 약품으로 허용하며 동시에 국내아편을 장려함으로써 밀수아편에 대항하자는 견해이다. 엄금론(嚴禁論)은 황작자(黃爵滋) 등이 주장한 것으로, 유통 소비단계, 특히 유통 말단의 흡음자에 대해 단속을 철저히 하자는 것으로, 소비하는 자가 없으면 밀수는 없어지게 된다는 판단이었다.
아편전쟁의 발발과 난징조약
아편문제로 고민하던 도광제는 아편 밀수를 근절하고자 1838년 6월에 강경론자이며 황작자의 친구인 임칙서(林則徐, 1785~1850)를 양광(廣東․廣西) 총독에 임명하고 황제의 칙명을 수행하는 전권대신(欽差大臣)으로 삼아 광주에 파견하였다. 임칙서는 황제로부터 아편문제 해결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은 것이다. 임칙서가 광둥에 도착한 것은 1839년 1월로,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임지에 도착한 그는 아편의 흡연과 판매를 엄금한다고 포고한 후, 범법자 1,600여명을 체포하고 아편을 몰수했다. 외국 상인에 대해서는 쌓아둔 아편을 제출하도록 하고, 앞으로 아편 무역을 포기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외국 상인들로부터 몰수한 아편 2만 여 상자를 소금과 생석회를 넣어 녹인 후 강가에서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파기해 버렸다.
이러한 때에 마침 구룡반도에서 술에 만취한 영국 선원이 중국 사람 임유희(林維喜)를 타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청조는 무역 감독관 엘리어트(Charles. Elliot)에게 범인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영국정부는 의회에서 1839년에 이미 중국과의 일전을 결정하고 전쟁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1840년 2월에 영국군은 브리머(Bremer)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영국 군함이 구룡반도에 포문을 열고 포격을 가함으로써 아편전쟁은 시작되었다. 1840년 6월, 중국 연안에 도착한 영국군은 군함 5척과 수송선 4척을 이끌고 톈진(天津) 앞 바다까지 올라갔다. 청조는 원정 함대의 위세에 눌려 임칙서를 파면하고 타협파인 기선(琦善)으로 하여금 광주에서 영국과 교섭하도록 하였다. 기선은 영국군의 강압에 굴복하여 몰수 아편의 배상, 홍콩 섬의 할양을 포함하는 가조약을 체결하였으나 도광제는 이 가조약에 격노하여 기선을 파면시키고 영국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나오자 영국은 공격을 재개하고 1841년에 광주를 점령하였다. 증강된 영국 함대는 중국 연해에 공격을 가하면서 북상하였다. 사먼, 닝보, 상하이를 점령하고 다시 양자강을 따라 난징으로 육박할 기세를 보였다.
청 조정은 난징이 점령당하면 대운하가 남북으로 분단될 것이 두려워 끝내 굴복하고 서둘러 굴욕적인 난징조약(1842)을 체결하게 되었다. 당시 난징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號)상에서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耆英)․이리포(伊里布)와 영국 전권대사 포틴저(Sir Henry Pottinger)가 전문 13조의 조약문에 함께 조인하였다. 당시 난징조약의 주요 내용을 보면, 홍콩을 영국에 할양, 5개항구 개항(광조우, 상하이, 샤먼, 푸저우, 닝보), 공행 제도의 폐지, 막대한 배상금 2,100만 달러(약 1,500만 량)의 지불,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부과는 영국과 협의하여 결정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 이듬해 추가 조약을 맺어 협정관계를 규정함으로써 중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였고, 영사 재판권의 설정으로 거주 외국인에 대한 재판권을 상실하였으며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는 등의 불평등 조약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아편이 원인이 되어 전쟁이 일어났지만 아편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종전대로 아편이 중국으로 들어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어 1844년에는 미국과 프랑스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왕샤(望廈)조약, 황푸(黃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국은 주권의 일부를 상실한 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말았다. 이후 불평등조약을 바탕으로 하여 구미 열강의 공업제품이 중국시장으로 물밀 듯 들어와 이후 중국은 열강의 종속적인 시장으로 재편되어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편전쟁의 의의
아편전쟁은 단순히 아편문제만이 아니라 중국의 전통적 사회가 서양의 사고방식과 문화에 부딪혀 일어난 것이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대외에 대하여 쇄국을 하고 있었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광동무역의 체제도 바로 쇄국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문화적 중국중심주의, 이를 바탕으로 한 조공체제와 중국 기존질서가 아편전쟁으로 동요하게 되었다. 결국 아편전쟁은 중국 전통사회 동요의 한 단서가 되었으며, 난징조약으로 인한 개국은 열강의 중국 침투로 이어져 중국 반식민지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를 계기로 반식민.반봉건 사회를 타파하려는 운동, 곧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으니, 이로써 아편전쟁은 중국 전통사회를 깨뜨리는 시발이요, 그로 인한 중국역사의 전환점이자 중국 근대사의 시작이라 볼 수 있겠다.
아편전쟁은 중국뿐 아니라 동양사회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아편전쟁의 패배와 그 후 서방 자본주의의 진출을 계기로, 중국은 사회 경제적으로는 서양의 상품 시장, 원료 공급지로 전락되면서 국민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봉건적 경제체제가 점차 해체되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일환으로 편입되면서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국은 아편전쟁에 의한 서구의 충격으로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중화주의가 여지없이 짓밟혔고, 외국의 군함이 내지 깊숙이 드나들게 되면서 청의 주권은 크게 유린당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은 그 동안의 정체 상태에서 깨어나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면서 국제적인 고립상태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아편전쟁은 청조체제의 사회적 모순을 확연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농민반란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이란 점에서 그 역사성이 뚜렷하다. 아편전쟁은 동아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동아시아 사회가 제국주의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며, 이는 동양뿐만 아니라 제국주의가 전 세계에 확대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일이었다.아편전쟁을 거치며 쇄국으로부터 개국한 중국인들에게 있어 그 다음의 과정은 불평등조약 철폐 운동, 그리고 국권회복 운동이었다. 이리하여 「쇄국-개국.불평등조약의 체결-국권회복」이라는 도식으로 중국의 근대화는 이루어져 나갔다.
전순동/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