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 라고 하면 흔히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를 대표로 한 서양 주도의 것만을 연상하면서, 15 ∙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서양으로 교역망을 넓히고 아시아 해역으로 진출하던 서양의 팽창주의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 이전에 이미 ‘대항해 시대’ 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다우선(이슬람 상인이 항해에 이용한 범선)이 페르시아만과 아프리카 동해안 ∙ 인도 ∙ 동남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던 제 1차 ‘대항해 시대’ , 중국 연해 지방의 주민이 정크선(중국에서 제작된 원양 범선)을 타고 동남아시아 인도 ∙ 페르시아만까지 항해하게 되면서 다우 교역권과 정크 교역권이 공존하게 된 제2차 ‘대항해 시대’ 가 그것이다. 우리에게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 으로 알려진 15세기 초 대규모의 항해는 제2차 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절정을 장식한 대원정이다. 이것은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87년이나 앞서 있었으며, 규모 면에서도 훨씬 거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소홀한 편이다. 세계 항해사에 대한 재평가가 요망되는 일이다. 환관 출신 정화 대항해를 이끈 정화(1371~1434 경)는 1371년(홍무 4년)에 윈난(云南)성 쿤양(昆陽) 이슬람 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성은 마(馬)씨이고, 자는 삼보(三寶)이다.
홍무 15년(1382)에 윈난 지방이 명나라에 정복당한 후 그는 환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환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잘 알수 없으나 대체로 두 가지 유력한 설이 있다. 하나는 피정복민 가운데 아름다운 소년을 뽑아 환관으로 삼는 것은 중국에서 오래 전부터 있었던 관례로, 정화도 명군에 의해 윈난이 정복당했을 때 포로로 잡혀 환관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되어 연왕(燕王) 주체(朱棣)를 모시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는 겨우 12살의 나이에 환관이 되어 궁중에서 연왕이라 불리던 영락제를 섬기게 된다. 연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조카 해제를 몰아내는 정난의 변(1399~1402)을 일으켰을 때 정화는 연왕을 도와 무공을 세워 연왕으로부터 신임을 얻게 되었다. 연왕이 영락제로 즉위한 이후, 그는 내관감(內官監)의 장관인 태감(太監)으로 임명(1404, 영락 2년) 되었으며 그 때에 ‘정(鄭)’ 이라는 성(姓)을 하사 받아 마침내 ‘정화’ 가 되었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중국에서는 황제가 신하에게 성을 내리는 일은 드물지 않았지만 환관에게 성을 내리는 일은 흔치 않다. 이것은 정난의 변에서 그의 공이 얼마나 컸었나 하는 것은 짐작하게 한다. 자바 섬에서 아프리카 동안까지 정화의 남해원정은 1405년 제1회 원정을 시작으로, 1433년까지 약 30년 간 전후 7차에 걸쳐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정화의 대함대는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섬, 자바 섬에서 인도연안, 실론 섬, 페르시아 만, 아라비아 반도에 진출하였고, 또한 일부는 아프리카 동안과 메카까지 이르렀다. 그 가운데 대선 62척과 27,800여 명의 병사가 참여한 1차 원정이 그 규모에서 가장 장대하였다. 1차 원정에는 나침반, 항해지도 등을 갖추고 참파,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등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을 방문했다. 4차 원정 때부터 페르시아만을 거쳐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원정했는데, 정화 함대가 찾아간 아프리카 동해안 마린디를 비롯한 여러 항구의 지배자들이 그 위세에 눌려 명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 때 정화 함대와 함께 명나라를 찾아 온 마린디 사절은 공물로 기린을 가져왔다. 기린은 목이 긴 초식동물을 일컫는 소말리어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기린(麒麟)’ 이라 하면 고대 시가에서 노래하던 가공의 동물로, 상서로운 일을 예고하는 전설상의 동물로 알려져 왔는데, 목이 길며 이상하게 생긴 현지어의 동음인 기린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게 되었다. 기린이 명나라에 들어오자 영락제는 유교에서 가장 이상으로 여기는 전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정화는 원정 지역의 저항 세력을 굴복시키고, 현지내전에 개입하기도 하는 등 그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러하기에 타이, 자바, 수마트라 등지에는 그를 기념하는 삼보묘(三寶廟)가 건설되기도 했다.
원정은 왜 필요했을까? 정화의 대원정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먼저 경제적 번영을 들 수 있다. 국초(國初) 태조의 농업 진흥책이 성공을 거두고 생산력이 증대하여 영락제 시대에는 국고가 충실하였다. 이러한 충실한 국가 재정을 바탕으로 영락제는 몽골, 베트남을 비롯한 적극적인 대외 원정을 꾀하여 국위를 선양시킬 수 있었다.
거기에 더욱 원정을 뒷받침한 중요한 요건은 뛰어난 조선술이었다. 명나라 초에 송 ∙ 원 시대 이래의 조선업이 잘 계승 발전되고 있었으며, 그것이 거대한 함선을 만들 수 있게 한 배경이 되었다. 더불어 나침반의 사용, 별의 위치를 측정하여 항해 지점을 확인하는 항해 기술 등이 뛰어난 원양 항해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영락제가 정화로 하여금 약 30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친 대원정을 단행한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하는 조공관계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곧 국위를 과시하여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게 하자는 것이 영락제의 기본 방침이었다. 종주국이라 해서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명목상 군신(君臣)관계를 맺고 그 나라에 무역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화의 남해 원정은 국위를 선양하여 조공국가를 많이 형성하고, 그것에 의해 교역을 촉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국가적인 목적 외에 정난의 변 때 사라진 조카 혜제의 행방을 찾아내어 후한을 없애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그만큼 영락제의 뇌리에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를 혜제의 존재가 항상 염려되고 있었던 데서 나온 해석일 것이다. 놀랄 만한 함대의 구성 당시 정화의 대항해 선단을 조직하는 일은 매우 큰 일이었다. 동원된 함선도 거대하였는데, 제1회 원정 때에 최대 길이 150m, 너비 약 60m의 규모의 배 62척으로 구성된 항해 선단이 구성되었으며, 1척에 수백 명을 승선시키고 나침반을 갖추고 있었다. 정화의 함대는 외교, 교역, 전투를 비롯하여 다양한 기능에 대처할 수 있도록 편성되었기 때문에 탑승자는 군인, 관료, 선원 외에 목수, 통역, 서기, 의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함대의 중심을 이루는 거함을 ‘보선(寶 船)’ 또는 ‘취보선(取寶船)’ 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보물을 가지러 가는 배’ 라는 뜻이며 각지의 지배자에게 황제의 하사물과 각지의 지배자가 중국 황제에게 바치는 귀중한 보물이 탑재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보선은 움직임이 둔한 거함이었지만 대량의 무기를 갖추고 군사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정화의 제1차 항해가 있은 지 90여 년 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발견하였지만 그 때 동원된 배는 겨우 120톤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3개의 돛을 가진 배 4척에 승무원 약 170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정화가 이끈 항해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5세기 초에 이렇게 큰 배를 만들 수 있을까 하여 의문을 가진 적도 있다. 그러나 1957년 5월에 난진(南京) 교외에 명대 조선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지역에서 배의 키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키의 길이가 11.1m라는 점에서 배의 길이가 150m라는 것도 그대로 믿게 되었다.
정화가 이끈 원함 함대는 상하이 서북쪽에 있는 쑤저우(蘇州) 항에서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여 푸저우(福州)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동북쪽의 계절풍을 기다렸다가 대해를 항해하기 시작하였다. 동북쪽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은 10월 이후였기 대문에 푸저우에서의 출항은 대게 겨울에 이루어졌다. 쑤저우 항은 원나라 이후 해군의 근거지이고 선박의 기항지로, 국제 무역항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제6회 원정(1421) 이후 영락제는 정화를 팔렘방의 사절로 보내었는데, 정화의 귀국을 보지 못하고 그는 죽었다. 다음의 홍희제는 원정을 중지하고 정화와 그 원정대의 병사에게 남경의 수비를 맡겼고, 그 결과 남해 제국이 명에 조공하는 것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다음의 선덕제에 이르러 정화의 남해 원정이 재개되었는데 그 때 정화의 나이 이미 60세였다. 그러나 정화는 직접 멀리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까지 이르러 분견대를 메카에 파견하여 성지순례를 하고 오도록 하였다가 1년 뒤에 죽었는데 확실하지 않다. 정화 남해원정이 역사에 남긴 파장들 정화의 남해 원정은 여러 면에서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먼저 남해 원정 결과 중국은 30여 개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빈번한 조공 무역을 통하여 상호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해외로 나간 중국 상품은 도자기 ∙ 비단이 주를 이루었고, 중국으로 들어 온 것은 후추 ∙ 용연향(龍涎香) ∙ 진주 ∙ 산호 등을 비롯하여 기린 ∙ 사자 ∙ 표범 ∙ 타조 ∙ 서역의 말 등 진기한 짐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양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후추였다.
정화의 대원정으로 말미암아 15세기를 통하여 중국의 문명이 서방으로 흘러 들어가 서아시아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산 도자기의 영향으로 서아시아의 도자기 기술이 새롭게 발전하였고, 페르시아 융단의 아랍식 기하학 문양에 중국 풍토의 용봉(龍鳳) 무늬가 나타났다. 또한 서아시아의 항해 기술, 여러 가지 진귀한 동식물들이 수입되어 중국인의 견문을 확대시켜 주었다.
특히 정화의 남해원정은 중국인들의 시야를 넓히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남해의 지리에 관한 서적이 편찬되고 지리적 지식이 크게 보급되었다. 정화가 남긴 「항해도」와 「침위도(鍼位圖)」는 세계 해양지리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정화를 수행하던 부관들은 각국에서 견문한 여러 지역의 풍토와 인정과 산수와 산물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남겼는데, 마환의 「영애승람(瀛涯勝覽)」, 비신의「성차승람(星搓勝覽)」, 공진의「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 등은 남해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 중국 항해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하였다.
그리고 정화의 남해원정을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진출을 자극하였다. 정화 시대에 이미 자바, 팔렘방 등에 화교 사회가 성립되었으며, 명 제국은 사라졌어도 그 후 동남아시아에 이주하는 중국인들이 늘어 화교 진출의 계기가 되었다. 현재도 동남아시아의 경제와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중국의 화교들이다.
이후 해외무역 활동을 금지한 명의 대외정책으로 대항해 활동이 장기화되지 못하였다는 제한 사항이 있기는 하지만, 정화는 환관으로서 ‘대항해 시대’ 를 지휘하는 장군의 자리에 올라 동서 문화교류에 크게 이바지함과 동시에 세계 항해 교류사에 뚜렷한 한 획을 그은 인물로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