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가 있다. 바로 8세기 전후에 활동한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측천무후, 중국에서는 우쩌티엔(武則天)으로 불리고 있는 여걸이다.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가면 서쪽으로 90km 지점 치엔시엔(乾縣)에 ‘건릉(乾陵: 치엔링)’이 있다. 그것은 당 고종과 황후 측천무후를 합장한 대규모의 능인데, 량산(梁山)이라는 산 전체가 하나의 능묘로 되어 있다. 묘소까지 약 1km에 걸쳐 길 양쪽에 석상들이 줄지어 있고, 묘소 앞에는 두 개의 비 곧 고종의 비와 측천무후의 비가 서 있다. 고종의 비는 측천무후가 비문을 짓고 중종이 해서체로 글을 쓴 데 반해, 측천무후의 비는 비석만 있고 비면에는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이른바 ‘무자비(無字碑)’로 되어 있다. 측천무후의 비가 무자비가 된 이유는 측천이 너무도 높고 공적이 많아 글로 표현할 수 없어서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비문에 그녀의 찬탈의 경력을 넣지 않을 수 없는데, 누구도 섣불리 그 기사를 적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중국 역사상 말단 궁녀에서 황제로 군림한 측천무후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여성은 없다. 흔히 한 고조의 황후 여후(呂后)와 비교되지만, 여후는 그 질투심에서 고조를 사랑했던 척(戚)부인을 참살한 일이 측천무후와 비슷할 뿐, 여후에게는 한 왕조를 빼앗을 야심도 능력도 없었다. 유명한 양귀비의 경우도 현종의 특별한 총애로 양씨 일족의 발호가 있긴 하였으나, 양귀비는 여걸이라고 할만한 정치적인 여성은 아니었다. 측천과 가장 가까운 여성으로 청의 서태후(西太后)를 거론 할 수 있는데, 그녀는 권모술수로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광서제를 유폐하고 만년에 자신을 관음보살에 비유한 것 등이 측천과 흡사하지만, 그녀 역시 기껏해야 수렴정치를 하였을 뿐 광서제의 제위 자체를 찬탈할 의도는 없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측천이야 말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여걸로서 그 끝없는 권세욕과 저항하는 자에 대한 가차없는 탄압과 잔인성이 비할 바가 없고, 게다가 늙어서도 쇠하지 않는 정력 때문에 괴승(怪僧)이나 미남 청년들을 가까이 하여 벌인 난행으로 추명을 남기는 등 실로 그녀의 생애는 다채로웠다.
말단의 궁녀에서 황후로 측천은 성은 무(武), 이름은 조(照)로 병주(幷州: 산서성 문수현)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 고조의 거병에 협력하였던 지방의 목재상이었으니, 문벌을 중시하던 당시 귀족사회에서는 보잘 것 없는 집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빼어난 미모로 어린 나이에 궁녀로 발탁되어 궁중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타고난 미모와 번뜩이는 총기, 당당한 자태는 마침내 궁중에까지 소문이 퍼져 급기야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나이 40을 넘은 태종이 14세 밖에 안 되는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무미(武媚)라는 호를 내렸다. 그녀는 태종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서 총애를 받으며 황제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뒷날 고종이 된 태종의 아홉째 아들 이치(李治)도 일찍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태종이 죽자 머리를 깍고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라는 절에 들어가 있던 그녀를 고종은 다시 후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녀가 다시 궁정으로 들어오게 된 경위는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고종이 황태자로 있을 때 그녀에게 반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후, 비구니가 된 그녀에게 후궁으로 다시 맞아들였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고종의 자의라기보다는 고종을 둘러싼 여성들의 농간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대부분의 사가들은 후자의 설을 채택하고 있다. 즉 고종이 소숙비(蕭淑妃)를 특별히 총애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던 고종의 정처 왕황후가 소숙비 세력을 누르고 고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측천을 후궁에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궁중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얌전하고 사냥한 행동으로 고종과 황후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용의주도하고 머리가 좋은 그녀는 고종과 황후를 조정하면서 신임을 받아 빈이 되어 소의(昭儀)의 자리에 올랐다. 소의의 자리에 오른 무소의는 왕황후와 한편이 되어 소숙비를 몰락시크는 데 성공하였다.
그 다음의 공격 목표는 왕황후였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공주를 질식사시켜 그 죄를 왕황후에게 뒤집어 씌우는 등 여러 음모를 꾸며 왕황후의 죄를 날조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황후는 고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차츰 사랑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소의는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장애물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며 후궁의 여성으로서는 마지막 도달점인 황후가 될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궁중에서는 무소의의 황후 책봉 문제가 거론되었다. 태종의 유조를 받은 원로 대신 저수량과 장손 무기 등은 황후책봉을 반대하였다. 무소의가 명문가 출신이 아니고, 도한 일찍이 태종의 시녀로 있었으니 그녀를 황후로 세우는 것은 후세에 악평을 남기는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고종도 중신들의 의견을 묵살할 수가 없어 그 일을 일단 유보하였다. 그러나 무소의가 가만히 앉아 있을 턱이 없었다. 그녀는 자나깨나 황후의 자리를 꿈꾸면서 고종을 모시는 침실에서 배게 밑 공사를 벌여 반대파를 참소하여 물리치고 고종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고종은 마침내 무소의의 황후 책립을 결심하였다.
후궁으로 들어 온 그녀는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소숙비, 왕황후를 차례로 누명을 씌워 제거하고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말단의 궁녀에 불과했던 그녀가 655년 황후의 인수와 예복을 몸에 걸치고 황후로 책봉되고, 새로운 이름은 측천무후가 되었다. 그녀의 나이 32세 때였다.
여황제로 즉위하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자파의 세력 구축에 힘을 쓰는 한편 고종의 지병인 간질병을 이유로 660년부터 정치에 깊에 간여하여 세력을 폈다. 674년 측천무후는 황제, 황후의 칭호를 고쳐 천황(天皇), 천후(天后)라 하였으며 그녀는 마침내 고종과 함께 ‘이성(二聖)’ 혹은 ‘이인천자’라 불리울 정도로 권세가 당당하였다. 무후는 두 왕을 폐위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고종이 죽은 후 일곱째 아들 이철이 천자의 자리에 올라 중종으로 즉위하였으나 측천무후에 의해 3개월만에 폐위되었고, 그 후 고종의 여덟째 아들 이단이 예종으로서 즉위하였으나 그도 유폐된 것과 다름 없어 정치는 모두 측천무후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다.
690년 67세의 무후는 드디어 반대파를 물리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후는 국호를 주(周: 690~705)라 칭하고 자신을 신성황제(神聖皇帝)라 일컬었다. 그녀는 동도 낙양을 신도(神都)라 일컫고 주로 그 곳에서 정무를 보았다. 이로써 당 왕조의 맥이 일시 끊기는 사태가 초래됐다. 무후가 여황제가 된 데에는 그녀의 정치적 야심도 야심이려니와 무엇보다 사회적 배경에 뒷받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화북지방에서는 북방민족인 선비족의 토속적인 풍스을 이어받아 호족의 많은 가정에서는 부인이 가사를 도맡아 처리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자연 부인의 발언권도 강하였던 것이다. 도한 당시에는 구 귀족들의 세력에 대항하여 점차 과거 출신의 신흥 관료계급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는데 측천무후는 이들의 힘을 잘 이용하였다. 신흥 지주들은 귀족 자제들의 음서로 관리가 되어 정권을 휘두르는 것에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아가 정권에 참여할 보다 많은 기회와 사회적 지위를 갖고자 하였다. 측천무후는 이런 문벌귀족이 아닌 신흥세력을 자기편에 끌어들여 구 귀족 세력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능력 중시와 산업발전 정책 추진 그녀가 말단 후궁에서 황제로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낡은 귀족 지배체제에서 과거 출신의 새로운 관료 지배체제로 바뀌는 과도기적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문벌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관리제도를 채택하였다. 구 귀족에 대한 냉혹한 숙청을 서슴없이 단행하고, 가문이 보잘 것 없더라도 능력있는 과거 출신을 대거 관리로 등용함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신장시켜 나갔다.
무측천은 또한 산업발전 특히 농업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황제로 즉위하기 전부터 그녀는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경지와 호구 증진의 실적을 지방관 포상의 준거로 삼으면서 적극적인 산업진흥책을 취하였다. 무측천은 변방강화를 위해 주변 이민족과의 관계 개선에도 주력했다. 고종 재위시 그녀는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해 단호하게 무력으로 대처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화해정책도 펼쳤다. 나중에는 지금의 신장(新疆)지역에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서북변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리고 새로운 측천문자 20글자를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이것은 종진객(宗泰客)이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천지일월 등 주로 많이 사용되는 문자를 기괴한 조자(造字)로 고친 것이다. 이를테면 측천무후의 이름인 ‘조(照)’자를 ‘曌(조)’로 만들어 천공 위를 일월이 조명하는 대광명(大光明)의 뜻이 되게 하였다. 이들 문자는 측천무후 사후 곧 페지되었으나, 오늘날 현재 17자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특히 측천문자는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다라니경’ 가운데에도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은 ‘무구정광다라니경’의 편년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말년에 다른 황제처럼 이성편력도 하였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청년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궁궐로 불러들여 젊음을 즐겼다고 한다.
무측천 말년, 밖으로는 거란 및 동돌궐 군대의 소요와 약탈이 잇달아 일어나고 안으로 백성들은 요역으로 시달림을 당하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반세기에 걸쳐 궁정에 군림하던 여걸 무측천도 병상에 눕게 되었다. 당시의 재상 장간지(張柬之)는 내란 진압을 명목으로 친위군 사령관과 공모하여 군대를 동원, 와병 중인 무후를 위협하여 제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중종을 다시 복위시켰다. 이로써 당 왕조는 다시 부흥되었으며 그 해 겨울 측천무후는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측천무후와 모란꽃에 관련된 설화가 있다. 모란꽃은 중국인들이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숭배하고 사랑하는 꽃이다. 그런데 당나라 측천무후가 수도 장안에서 잔치를 벌이는 도중에 자신의 강한 권력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백화(百花)는 모두 함께 피어서 나를 모셔라.”고 명령하자 다른 모든 꽃들은 순순히 측천무후의 명령대로 꽃을 피웠는데 단 하나 모란만이 꽃을 피우지 않았다. 이에 측천무후는 크게 화를 내고 모란을 당장 작은 도시 뤄양(洛陽)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모란이 뤄양에 도착하자마자 꽃을 활짝 피웠다 한다. 이를 안 측천무후는 더욱 화가 나서 참지 못하고 당장 모란을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모란은 불에 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피어날 뿐이었다고 한다. 이 설화를 배경으로 모란은 권력에 굴하지 않는 절개를 상징하는 꽃으로 사랑받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긍정적 평가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그동안 매우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다. 왕위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권력투쟁 과정에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처형했다는 점에서, 더욱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후세 역사가들은 그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유교사상에 뿌리박힌 역사관에 따른 것이었으나 최근에는 측천의 긍정적인 평가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측천은 확고한 정치적 기반 위에 새로운 통일 제국을 확립했고 필요한 사회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당 왕조는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고 중국 문화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녀가 사망한 후 현종(712~756) 재위기간에 이루어진 이른바 ‘개원의 치’도 그녀의 통치 기간에 조정된 사회 경제적 발전력이 비로소 효과를 발휘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보고 있다.
측천무후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천하대권을 휘두른 기간은 15년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이미 660년부터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그녀는 모두 45년 간, 즉 80여 년의 생애 중 절반 이상을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장수한 권력자는 남녀를 통틀어 중국사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며, 철저한 남성 위주의 중국 사회에서 여성이 그렇게 오랜 기간 권력의 정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순동/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