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모우 감독이 바라본 아이들 세상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라서 더 순수해 보이는 것일까? 90년대 이후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서 우리는 이란에서 만들어진, 어린이의 삶을 사실적으로 다룬 영화들을 잊지 못한다.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청동표범상을 수상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비롯한 <올리브나무 사이로>와 <체리 향기>같은 그의 연작들을 비롯해서, 최근 운동화 한 켤레로 우리의 마음에 오랜 여운을 남겼던 마지드 미지디 감독의 <천국으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가난하지만 때묻지 않은 마음을 간직한 어린이들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친구의 공책을 자기 가방속에 넣어둔 것을 잊어버리고 집에 온 자기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집에 온 주인공 소년이, 다음날 숙제검사 때 선생님께 매 맞을 친구를 걱정해서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는 장면(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이나, 잃어버린 동생의 신발을 대신해서 3등 상품으로 걸린 운동화를 타기 위해 마라톤 대회에서 억지로 3등을 하려고 애쓰는 어린 주인공의 모습(천국의 아이들)은 어른들 세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단순하면서도 순진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들은 비록 어린이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나 홀로 집에>와 같은 헐리우드의 가족영화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헐리우드의 어린이 소재 영화들이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자칫 소홀하기 쉬운 가족의 사랑을 되찾으려는 의도로 제작되고 있다는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 안에 나타난 어린이들은 어른 머리 위에 올라가서 어른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일뿐 더러 코믹액션을 가장한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 중국의 경우는 어떨까?
아이들의 순수의 세계는 이제 중국의 대표적 감독인 장이모우(张艺谋)에 와서 이란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게 된다. <붉은 수수밭>, <패왕별희>, <홍등>과 같은 중국 현실의 면모를 예술적 이미지로 온 세계에 알렸던 그가, 1999년 베니스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중국 아이들의 마음 씀씀이를 스크린에 담아냈다. 책상서랍 속의 동화>는 장이모우 감독이 이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란이나 헐리우드와도 다른 어린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장이모우 감독은 “장식이 많고 화려한 영화를 찍다 보니 이제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영화를 찍고 싶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라고 밝히고 있지만, 거대한 땅 덩어리 속에서 한없이 작게만 살아가는 인생을 카메라에 담고자 집착하는 모습은 여전한 듯 하다.
영화 속 단순성의 세계 <책상서랍 속의 동화>의 영어 제목은 ‘Not One Less’다. 즉 한사람도 적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중국 작은 산골마을 슈쿠안 초등학교의 가오 선생님이 어머님 병간호 때문에 한달 간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임시로 부임한 13살의 소녀 웨이에게 한 약속 내용이다. 원래 가오 선생님 반에는 4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도시로 떠나면서 학생 수가 28명으로 줄어들었다. 선생님은 웨이에게 한 사람의 학생이라도 줄어들어선 안 된다고 다짐을 받으며, 그 약속을 지켜줄 경우엔 10위안(元)을 더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영화가 같은 가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란 영화와는 달리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3살 웨이의 선생 노릇에 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글자를 먼저 읽고 쓸 줄 알면 그것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돈에 탐이 나서 한 일이지만 여기에 동조한 주인공 웨이의 가상한 용기는 관객들의 웃음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한 몫 하고 있는 것이다. 칠판에 글자를 가득 써놓고는 할 일을 다한 양 문 앞에서 햇빛을 쬐고, 율동을 곁들여 열심히 노래는 부리지만 끝까지 다 부르지 못하는 바람에 중간에 멈추기가 일쑤고, 말썽 피우고 도망가는 학생을 뒤쫓는 모양새는 영락없이 철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가난이 빚어낸 비극들이 앞 뒤 재지 않는 아이들의 단순성에 기인한 사랑에 의해 행복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에 있다. 아이들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인 어린 웨이 선생님 반에 10살짜리 말썽꾸러기 장휘거가 집안의 가난 때문에 막연히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끝내는 학교를 그만두고 도시로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웨이의 머리 속에는 어떻게든 장휘거를 다시 데리고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들이 지닌 단순성이며, 이 단순성은 오직 한 가지 목표에 생각을 집중시킬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웨이는 가오 선생님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하며 자신이 책임 맡은 역할을 오직 하나에 모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학생 수를 지키는 일이다. 장휘거가 도시로 떠났다면 그를 데리고 돌아올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단순성은 시작된다.
만일 웨이가 어른의 입장이라면 다른 복잡한 생각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어른들이라면 할 수 있는 여러 생각들, 예를 들면 “어차피 가난한 동네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자조 섞인 생각이나, “남은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면 용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대안적 생각도 아니다.”나는 갈 차비도 없으니까 할 수 없다”는 포기하는 마음도,”도시는 나에게 너무 위험하다”는 두려운 마음도 웨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한 가지에 마음이 모아질 때 그것을 실행하는 용기와 단순성이 이미 그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지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가 버스에 무임승차하다 쫓겨나고, 차비를 마련하기 위해 멀쩡한 벽돌을 옮기다 주인에게 혼나는 에피소드는 단순한 어린이의 사고방식이 일으키는 삶의 유머임에 틀림없다. 웨이의 삶의 단순성의 가치는 막상 도시에서 발현된다. 도시가 가지고 있는 복잡함과 분주함, 옆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 이기적인 이미지가 단순성 그 자체로 대변되는 웨이의 출현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도시이지만 웨이는 도시인들이 할 수 없는 단순함으로 장휘거를 찾기 시작한다. 종이에다 먹물로 일일이 써서 광고전단을 만들어내는 일이나, TV를 통해 알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란 말만을 믿고 방송국 앞에서 담당자를 주야장창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바보스럽고 가련하기조차 하다. 그러나 웨이의 단순성이 불러온 결과는 사뭇 크다. 끝내 TV출연으로 인해 장휘거를 다시 찾은 것은 물론이고, 학교의 어려운 사정이 알려지면서 후원을 받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린이에게서 배우는 단순성의 원리 미국의 영성학자 리차드 포스터가 그의 책 「단순성의 기독교(Freedom of Simplicity)」에서 “단순성이란 믿음의 성령 속에서 어린 아이같이 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단순성은 어린아이의 삶의 특질이 되는 셈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아울러 이 어린이들로부터 나타나는 단순성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전적인 의존’이며 다른 하나는 ‘전적인 순종’이다.
‘전적인 의존’은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이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힘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없는 대단히 연약한 존재다. 누군가의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이다. 이 안에서 나타난 단순성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가치있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웨이가 장휘거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금의환향하게 된 까닭도, 자신의 힘이라기 보다는 그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실체(방송국 혹은 공산당)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웨이는 실체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을 뿐이다. 이 때문에 어떤 서양 영화인은 이 영화가 중국식 계몽영화에 불과하다는 조롱섞인 비평을 늘어놓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무시해도 좋을 성싶다.
믿음의 단순성은 나의 능력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또한 ‘전적인 순종’은 하나님만을 믿는 것을 말한다.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웨이처럼 가오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할 때 ‘전적인 순종’은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순종이다.
가난 때문에 빚어진 일들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성이 행복의 열매를 어떻게 맛볼 수 있게 하는지에 대해서 어린이의 몸짓을 통해 말하고 있다.
강진구 | 크리스천문화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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