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통적인 지식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유교 문화속에서 자랐다. 중고등하교, 대학교 시절에는 어떻게 하면 개인을 수양하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고금 서적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주님을 알기 전 나는 이런 책들에 나오는 현인군자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하다고 자부하며 남들을 멸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또한 학교에서 진화론, 무신론 사상교육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 구세주란 없다는 생각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처음 복음을 접하다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접한 것은 1993년으로 그 때 난 북방에 있는 한 대학 중문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친구가 다니던 학교의 영어 교사인 J가 내 친구에게 복음을 전했고 자연스럽게 나도 그와 연결되었다. 그 후 그는 자주 나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의 친절하고 솔직한 태도에 끌렸다. 확실히 그는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얼마후에야 그 이유가 그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J형제는 나에게 ‘예수’ 영화 비디오와 성경, 기독교 신앙에 관한 책 등을 주었으며 자기가 예수님을 믿게 된 간증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자주 신앙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는데 처음에 나는 기독교에 대한 강렬한 반감으로 진화론, 무신론 사상의 입장에서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문제들은 다 반박할 수 있었지만 유독 죄 문제만큼은 나를 골치 아프게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성경처럼 구체적으로 깊이있게 인간의 죄 문제를 다루고 인간의 도덕 수준을 높은 수준에 놓고 있는 책은 본 적이 없었다. 난여태까지 스스로의 도덕 수준이 꽤 높다고 자신했었는데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이렇게 한심한 존재인지는 상상도 못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난 반박할 힘이 없었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러나 나름대로 ‘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죄의 본성이 있기 마련이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된다.’라는 변명으로 위안으로 삼았다. 하지만 성경은 인류의 원죄를 지적할 뿐 아니라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는 것 뿐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성경 앞에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무거운 짐을 벗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안의 교만과 저항도 사라져 갔고 겸손한 태도로 성경을 대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겸손한 자에게 활짝 열려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 말씀의 위력을 절실히 깨달았다. 말씀을 볼 때마다 무거운 망치로 내 마음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J형제의 인도로 나는 결단의 기도를 드렸고 기도를 마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과 홀가분함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모두 던져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했다. 그래서 J형제와 다른 미국인 형제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신앙서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 갔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일 가운데서 나를 인도하셨고 그 분이 나와 동행하심을 체험케 하셨다. 나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귀한 신앙을 함께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평소에 고상한 척하던 내가 지금은 서양의 기독교란 것을 또 하나 받아 들여 자신을 가장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 나는 복음을 잘 알지 못해 그저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라는 단순한 말만 전할 수 있었다. 복음을 전할 때 여러 번 거절 당하고 난관에 부딪힌 적도 많지만 감사하게도 대학 졸업 전에 두 명의 친구를 주님께 인도하였다.
캠퍼스 모임의 시작 그 후 나는 그 미국인 형제가 인도하는 기도회와 성경공부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나는 다른 대학에서 온 학생들 대학원드로가 [사영리]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배웠고[새 생명]이라는 교재로 말씀을 공부하면서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여러 형제, 자매들을 알게 된 것이 매우 기뻤다. 대학 내에 이러한 크리스천 모임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우리는 여러 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어 매주 다른 시간을 정해 미국인 형제의 집에서 각 그룹별 기도 모임을 가졌다. 참여하는 학생 수는 점점 늘어났고 더 많은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형제, 자매들은 성경공부하면서 친숙해졌고 영적으로도 성숙해져갔다. 나에게 있어서도 이 성경공부 모임은 영적 성장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주일에 삼자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는데 삼자는 너무 정치적이고 정부의 통제를 많이 있고 있어 모두들 더 이상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중 몇몇은 주일에 학교에 모여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모두들 삼자교회에 가길 원하지 않으니 우리끼리 예배를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엇다. 이 문제를 J형제, 미국인 형제와 상의하자 그들도 동의하여 우리는 정식으로 캠퍼스 내에 모임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복음 사역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 때는 사역의 의미로 잘 몰랐고 삼자에 등록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정부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나는 그저 내가 주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으니 주님을 위해 또 형제 자매들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출발하였다. 얼마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우리는 1994년 하반기에 캠퍼스 모임을 설립하였다. 물론 이 모임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한 자매가 세들어 살고 있는 지하실을 주일예배 장소로 삼고 집회는 나와 J형제가 번갈아 인도했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성경을 몇 단락 설명하고 이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나누었다. 모임의 결과는 예상보다 좋았고 모이는 사람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처음 이 모임을 만들었을 때는 특별한 비전이나 장기적인 발전에 대한 청사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캠퍼스 형제 자매들에게 편안한 집회 장소가 필요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렇게까지 확장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나의 영적인 면에도 변화가 생겼으며 우리 모임은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되었다.
원대한 비전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조나단 차오 목사님을 통해 보여주신 원대한 비전이다. 차오 목사님은 방학 동안 성경과 중국 교회사 강의를 해 주셨고 중국에 대한 세가지 비전 즉 중구그이 복음화, 중국 문화의 기독교화, 중국 교회의 하나님 나라화에 대한 비전을 나누어 주셨다. 그의 말씀은 마치 우리 마음 가운데 폭탄을 투하한 것처럼 거대한 성령의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만약 중국의 각 대학에 있는 더 많은 학생, 대학원생 박사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들 가운데 소수라고 학교의 교수가 된다면 그들이 발휘하는 힘과 작용은 엄청날 것입니다. 그들은 삶과 행동을 통해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고 이는 중국의 교육체제와 전 영역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매우 흥분되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 학교의 크리스천 학생들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우리는 주일날 모이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교의 형제, 자매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캠퍼스 사역을 추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더 큰 일을 하고 더 큰 힘을 쏟는 것이 마땅하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모임이 교회가 되어야 더 강한 응집력이 생겨 복음사역이 더 활발해질 것이다. 차오 목사님이 떠난 후 나는 J 형제와 이 생각을 나누었는데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임을 교회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성령의 불씨 전파 운동 두 번째로 우리는 농촌 가정교회에 들어가 교회 지도자, 전도인, 그리고 성도들 안에 있는 강력한 생명의 능력을 보았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 때문에 매맞고, 갇히고, 수배를 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으면서도 주님께 대한 충성, 기꺼이 헌신하여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믿음은 잃지 않았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몇몇 동역자들은 학교로 돌아온 후 곧 형제 자매들을 모아 휴일이 되면 몇 개의 조로 나누어 농촌 교회에 파송했다.
그래서 농촌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서 배웠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불씨 전파 운동’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중국의 농촌 교회를 부흥시키는 불씨를 도시, 학교, 우리 자신에게 가져온다는 뜻이다. 우리는 도시의 편하고 안락한 환경 속에서 너무 쉽게 신앙을 이성에 국한시키고 있기 때문에 행동의 헌신이 부족했다. 농촌 교회와의 교제는 우리의 약한 믿음과 냉담한 태도에 부흥의 불꽃을 타올리기에 충분했다. 농촌 교회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 속에서 형제, 자매들은 영적인 새로움을 맛보았다. 그들이 정부로부터 당하는 박해와 공격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지만 이러한 공포의 그림자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강한 위로와 격려 때문에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당시 우리는 만약 우리가 그들처럼 잔혹한 핍박을 당한다면 과연 어떻게 할 인가에 대해 자주 토론하곤 했다. 또한 우리는 그들로부터 귀중한 교훈을 배웠다. 즉 그들이 온전히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방식대로 교회를 세운다는 사실이다. 이는 동역자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세 번째 우리는 다른 많은 대학의 성경공부 모임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모임 책임자들과 인식을 같이 하고 서로 중보하면서 도움을 주었다. 이뿐 아니라 연합하여 훈련하고 학습하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고 해외의 형제, 자매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들여와 중국 교회 성도들에게 공급하는 성경 및 신앙서적들을 분배해 운송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하나님은 위의 네 가지 일들을 통해 우리의 눈과 사고를 넓혀주셨고, 영적으로 풍성케 해주셨다. 참다운 헌신이 무엇인지 자기를 버리고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셨다. 우리 모임은 정식으로 교회로 확장되었고 집회 장소도 대학에서 근무하는 한 형제의 집으로 옮겨갔다. J형제는 설교와 성찬, 세례식을 인도하였고 나는 모임 전반과 성경공부반을 책임졌다.
우리 교회는 학생들이 구성원이기에 캠퍼스 분위기가 짙다는 것 외에는 다른 교회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 후로 사역 범위는 더욱 광범위해지고 연락 범위도 넓어져 다른 교회와의 연합이 빈번해졌다. 1995년 부활절 저녁, 세 학교 크리스천 모임이 연합하여 한 학교의 대회의실을 빌려 전도 집회를 열었다. 학생들에 의해 비밀리에 준비되었고 찬양, 설교 등도 학생들이 맡아 진행했다. 그러나 이 집회의 기획자는 하나님이셨다. 그날 밤 무려 300여 명이 이 집회에 참가했고 많은 사람들이 소리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은 우리가 주관했던 전도집회 중 가장 큰 규모의 집회였다. 이후에는 보안 때문에 참가자를 몇십 명으로 제한하여 복음 집회를 가졌는데 대부분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같은 특별한 절기에 이루어졌다.
지도자 훈련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 1995년 나와 J 형제는 비밀리에 열리는 전국 가정교회 지도자 집회에 참가하였다. 이 집회의 토론 주제는 일치와 협력이었다. 몇몇 지도자들은 사역자가 시급히 필요한 문제에 대해 우리의 의견과 도움을 구한다고 토로했다. 기도 후 J형제가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어느 외진 곳의 농가 한 채를 빌려 전도인을 양성하는 훈련학교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4개월을 한 학기로 공부하였는데 학기가 끝나면 다시 신입생을 선발하고 학습을 마친 학생은 자기의 일터로 돌아가 사역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학생을 추천하고 우리가 강사와 경비를 책임지자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강사를 연결하는 것은 별 문제 아니지만, 그 많은 경비는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동역자를 찾는 것에서부터 훈련학교를 세우기까지 직접 일하셨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온 약 30여 명의 농촌 교회 사역자들이 한 곳에 모여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이 기간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셨으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또한 이 일은 내가 시간과 정력을 가장 많이 투자한 사역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가장 풍성하고 깊게 체험한 시간들이었다.
하나님과의 힘 겨루기 내가 전임 사역자가 되기까지 이야기하자면서 참으로 부끄럽다. 솔직히 나는 전임 사역자가 되지 않으려고 당시 선배들과 나의 진로를 놓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나에게 전임 사역자로 헌신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는 부모님과 부딪힐 자신이 없었고 또한 이미 정해놓은 내 인생의 목표와 계획을 포기하기가 아까웠다. 학교 안에서 이미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이들을 했으니 졸업 후에는 멋지게 누리며 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1994년 말 어머님이 중병에 걸려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나는 한참 울다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어머님의 생명을 지켜주신다면 내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결단하였다. 이후 신실하신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셨고 어머니는 완쾌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후회스러워 내내 마음으로 싸우고 있었다.
교회 모임에 참가하면 할수록 나에게 전임 사역자로 일하라는 형제, 자매들의 도전이 많았다. 한번은 농촌교회의 지도자 한분과 우리교회의 발전을 놓고 대화하던 중 마지막에 내개 이런 말을 했다. “ 우리 교회에 전임 사역자와 전임 전도사를 보내달라고 간절히 구합시다.” 이 말을 들은 그 형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른 사람이 나타나길 기대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실 때 당신이 순종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남들이 짐을 지길 바라지만 자신은 짐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말을 들으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가정교회 지체들의 아름다운 간증을 생각하면 나도 그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면 사역을 하면서 겪게 될 여러 가지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갈등을 견디다 못한 나는 대학 졸업 후 아무 인사도 없이 교회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족들과 뤼산으로 여행을 갔다. 이 기회에 가벼운 마음으로 전임사역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잊어버릴 작정이었다.
새로운 출발 여행 첫 날, 나는 절에서 향을 피우며 부처에게 절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영적인 본능으로 이 사람들을 위해 마음 속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도 가운데 나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들렸다. ‘믿음을 져버린 사람아! 하나님께 한 약속도 지키지 않고 스스로를 이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다고 생각하는가? 너도 그들과 똑같다.’
더 이상 산과 물을 보며 즐길 마음이 없어졌다. 계속 지난 날 하나님께 간구했던 장면과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많은 은혜들이 아른거렸다. 농촌 교회의 형제자매들, 영적 선배들이 나에게 해 주었던 권면과 격려들이 하나하나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J형제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이미 수차례 내게 전화를 했었다며 모두들 말도 없이 떠난 내가 실종된 줄 알았다고 했다. 전화로 그는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은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라고 권고해주었다. 이 말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 약함만 주장하며 완강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한다면 앞으로 온전히 믿음 생활을 해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후 나는 다시 형제 자매들을 찾았다. 그리고 전임 사역자로서 앞으로 어떤 어려움과 도전이 있어도 견뎌나가며 후회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번역/남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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