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중국의 지식인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한 전임 사역자와의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 중국의 지식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의 중국 교회 발전과 지식인들의 교회 건설 참여에 대해 심도 있고 실제적인 전망과 반성을 하고 있어, 중국교회와 지식인 사역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리라 본다. 【편집자 주】 오늘날의 중국 교회는 마치 가정교회와 삼자교회라는 두 집단으로 양분되어 있는 듯하다. 과연 이러한 구별이 있는 것일까? 역사나 정치적 요소 외에 교회발전 자체의 규율은 없는 것인가?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지식인으로서 늘 생각해 보게 되는 문제이다.
가정교회의 정체성 인식 만약 ‘정체성 인식’의 각도로 중국 교회의 유형을 이해한다면 가정교회 신도는 자신이 가정교회에 소속되어 있음을 인식한다는 것인가? 과연 가정교회란 존재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나와 의기투합하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계급의식 혹은 계급인식의 관점으로 볼 때, 한 사회계층이 역량 있는 사회계급으로 발전하려면 반드시 자아의 존재를 체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 계급이 아무리 수적으로 거대하다 하더라도 그 계급 구성원들이 자신이 노동자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존재적 역량을 형성할 수 없다. 헤겔에 의하면 자아존재의 정체성 인식은 하나의 의론화 과정을 거치는데, 자신의 신분과 처지와 사명과 이익 요구를 인식하고, 아울러 자아가 집단의 일원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힘을 계급이 될 수 있다.
이런 논리는 가정교회 형성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가정교회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발적인 상태로 있었다. 그들은 신앙으로 자연스럽게 모였고, 자신의 존재나 가정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은 품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아인식 태도로 가정교회의 정의를 내렸는데, 바로 ‘삼자교회와 구별되는 사람들’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교회의 긍정적인 정의는 무엇인가? 단지 삼자와 구별되는 신도란 정의는 결코 긍정적 인식이 아니며, 서로 다른 가정교회 간에도 긍정적 인식이란 없다.
1998년 가정교회가 ‘신앙고백’을 공동으로 발표할 당시, 나는 이 선언이 매우 미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가정교회의 자아인식의 각성이고, 가정교회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신의 신분에 따라 행동하려는 지상화에 대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이 신앙고백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신앙의 표현을 할 수 있는 신분으로 존재하길 원하는 가정교회의 소망을 담고 있다. 아마도 모든 가정교회의 동의를 얻을 수 없었겠지만, 장래 중국 교회의 추세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하였다. 즉 자아신분을 인식한 후 공개적으로 신앙의 표현을 하면 가정교회는 점점 역량이 강화될 것이고, 지금까지 숨기고 꺼리던 지하교회의 신분에서 밝은 지상교회의 신분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다윗 왕국으로의 교체 가정교회가 이러한 경지에까지 도달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수많은 핍박을 견디고 큰 대가를 지불하고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가정교회가 합법적인 신분을 얻게 됨과 동시에 삼자교회는 그 존재의 필요성이 소멸될 것이다. 삼자교회 신도들이 복음전도 등의 제한을 받는 삼자를 떠나지 못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면 당연히 가정교회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삼자가 아니더라도 공개적으로 주님을 섬기고 신앙의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이익을 위해 주저하거나 굴복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받게 될 핍박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삼자교회는 마치 사울이 다윗에게 왕좌를 내준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대체될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정권을 공격하거나 사울의 정치체제 안에서 정권의 정상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가 계속 백성들과 함께 있으면서 자신보다 더 미천한 사람들을 섬겼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거대한 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고, 이 집단이 흥성하자 반대 집단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붕괴의 결말은 바로 왕위의 자연스러운 교체로 이어졌다. 가정교회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노선을 밟게 될 것이다. 교회의 체질 갱신 그렇다면 삼자교회의 변화가능성은 없는가? 삼자교회는 자주적인 자아갱신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 어떤 큰 정치변동이 발생하지 않는 한 지금의 삼자교회가 순수한 교회 조직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다. 삼자교회 내에 타협을 거부하고 용기있게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감당하여 결국 삼자교회로부터 축출 당하게 되는 사역자, 평신도, 열심 있는 일군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삼자 측이 사람들을 축출해 내면 가정교회는 사람들을 점점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自在(계급적 자각과 자기의 정당을 분명히 의식하지 않고 있는 상태)’가 ‘自我(자기의 역사적인 입장이나 사명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각성된 상태)’로 바뀌는 데는 반드시 명확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신학건설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성도들이 성경의 진리를 명백히 알고 실천할 수 있는 교회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등대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교회이다.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자아가 분명한 의식과 분별력과 주도적인 태도로 그 정체를 파악하고, 다시 그 판단에 의거하여 사고하고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아 정체성의 확립과 자각의 과정을 거치면 교회 단체의 소질은 개혁될 것이고, 그 중 일부 사람들이 맹종을 거부하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모임을 결성하게 되면, 이렇게 분명한 의식과 명석한 자각을 갖춘 교회는 금방 부흥하게 될 것이다. 종교개방이 미칠 영향 과거에는 조속히 더 개방된 종교환경을 갖게 되기를 희망했었지만, 근래 들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 어떤 정권도 유독 기독교만을 개방할 수는 없으며, 또 만약 지금 종교가 완전 개방된다 하여도 인간의 죄성과 중국의 문화전통을 비추어 볼 때 중국인이 가장 쉽게 받아들일 종교는 기독교나 전통종교가 아니라, 무속적 신비와 현대 과학의 색채를 겸비해 쉽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파룬궁(法輪功)같은 신흥 민간종교일 것이다. 이외의 기공이나 전통종교들도 시시각각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독교 입장에서 개방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종교이며 핍박 중에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양과 신학건설의 위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교개방 이후 교회의 위기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 될 것이다. 특히 목회자의 수가 적은 오늘날의 중국 교회 현실에서 ‘목양’은 더욱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복음의 문이 열리길 기도하고 있는데, 나는 이 문이 종교정책을 통해 열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많은 성도들의 헌신과 기도와 봉사와 증거를 통해 열리는데, 특히 핍박 중에 열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문은 이미 열렸다고 본다. 오히려 염려되는 것은 교회가 부흥을 지향하는 시기에 든든한 신학적 기초가 없다면 매우 위험할 것이라는 점이다.
어느 농촌 마을에서 사회지도층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자 교회와 권력기구 관계가 중복되었다. 촌장이 교회의 장로는 아니었지만, 교회의 장로는 자연스럽게 마을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대수롭지 않게 볼 수도 있지만, 교회와 세상이 중복된 이런 상황에서 교회에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은 뻔한 일이다. 도시 교회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본 적이 있다. 한 친구의 고향 교회 목사가 한국 대형 교회의 영향을 받아,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교회를 세우게 되자 퇴직한 간부들이 댁 교회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사람들은 목사나 교회 기구의 주목을 받기 때문에 금방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다. 타고난 조직가인 이들은 뛰어난 조직력과 리더십을 갖고 있다. 교회에 온지 얼마 안되었는데, 곧바로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 교회가 어떤 활동을 하려고 할 때 쉽게 여기저기서 수백 명씩 사람을 조직한다. 교회는 금새 7, 8천명 규모로 증가하고 점차 훌륭한 기구와 제도를 정비하여 사회적으로 힘있는 조직이 된다.
그러나 이런 교회는 세속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권력과 명예, 재능 등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교회의 세속화 결과, 과거 소외되고 가난하고 지식도 없고 병약하여 사회의 빈곤층이었으나 예수님을 믿고 선택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깨닫고 열심을 내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다시 한번 소외 당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사회에서 소외 당하던 때는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교회에 의해 소외를 당하면 정말 갈 곳을 잃은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점점 권위 있고 고귀한 귀족집단으로 변하게 된다.
종교와 사회는 그 속성이나 추구하는 목표가 매우 비슷하다. 요즘 성공신학의 영향으로 교회는 믿음과 성공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형편이 안 좋으면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본다. 본래 인간은 환난 중에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기 마련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신학교육의 잣대로 자신의 가난함과 연약함이 드러난다면 그때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왜곡된 가치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 보편적인데, 머지않아 중국 교회에도 이런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기독화’니 ‘사회기독화’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나는 실제적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사회는 사회, 즉 세속사회이다. 설사 사회 구성원이 전부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세속사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그 특별한 신분과 사명과 이상을 유지해야 할 것인가? 무척 어려운 문제이자 커다란 시험이 따르는 문제이다. 예수를 따를 때 받는 시험 현재 중국 교회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시기와 비슷한 것 같다.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간다는 의미이자, 핵심 권력을 쟁취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의 생각이었지, 예수님의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 중국 교회도 똑 같은 시험을 마주하고 있다. 권력의 중심, 사회의 중심을 향해 가고 있는데 그 목적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세상의 왕이 되기 위해서인가? 미천한 어부시절에는 큰 소망이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하룻밤에 배 한 척 가득할 정도의 고기를 잡다가 오늘 배 두 척 가득 고기를 잡았다면 그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후에는 큰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능력의 왕을 모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만약 예수님이 왕이 된다면 자신도 권력의 핵심인물이 될 수 있다. 정말 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많은 사역자들이 똑같이 느끼는 마음일 것이다.
많은 사역자들이 교회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중에 이러한 야망을 품게 되고, 큰 시험에 마주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사역자가 되지 않았다면, 기껏해야 대학교수 정도이지 전도유망한 학자나 학계의 촉망 받는 지도자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 내에서 나는 젊음과 학식과 영웅적인 과거사를 인정받아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하도록 요구 받는다면 그것이 시험이 될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순수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원의 은혜뿐 아니라 명예도 맛볼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명예와 지위는 사역 자를 실족시키며, 교회의 자아를 상실케 한다. 해외 교회에 대한 바람 현재 중국 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교회의 정체성 인식, 신학 건설, 세속화의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다. 많은 해외 기독 지식인들은 신학 건설 방면에서 후원하고 본보기를 제시함으로써 중국 교회를 도울 수 있다. 신학교육이 보급되면 교만과 이성에 편중된 지식인의 경향들도 어느 정도 극복될 것이다. 해외 교회들이 중국의 일군양육에 동참하여 각양각층의 전도인들을 배양해내어 중국 교회 신학건설 자원을 풍부하게 해주길 기대한다. 아울러 우리가 더욱 십자가의 길을 매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기 바란다.
출처 / 「中國與福音」 36基(2000. 5∙6)/ “一位知職分子基督徒對中國敎會徒向的反思” 번역 / 김현주 ∙ 자원봉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