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2.JPG) 중국 출신 지식인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되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는 지난 1월 13일 “미국 대학에 유학을 오는 수십만 명의 무신론자 중국인들 가운데 수천 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도 2월 11일 미국 IVF의 전국 캠퍼스 디렉터 그렉 자오(Greg Jao)의 말을 인용, “IVF가 섬기는 국제학생 5000여 명 중 중국인이 1600-1800명에 달한다”면서 수천 명의 중국인학생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뉴욕대 발레리 올도우즈 학장은 “중국인들이 학교의 영성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 중 다수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는 영어 덕분이다. 대부분의 중국 학생들은 정말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며 “미국인과 미국의 삶, 심지어 우리의 종교 신념 혹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 설명했다.
퍼듀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미국의 중국 기독교인(Chinese Christian in America)’을 저술한 양펑강(杨凤岗) 교수는 “사람들이 새로운 장소로 가면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의미를 찾게 된다. ‘왜 나인가? 왜 내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지?’라는 질문의 답을 알고 싶어 한다”며 “이런 질문을 시작할 때, 기독교는 많은 이들이 수용할만한 질문을 해 준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중국은 곧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라며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국의 신진 경제학자이자 베이징과학기술대(北京科技大学) 교수인 자오샤오(赵晓)가 크리스천이 된 계기도 재미있다. 그는 2000년대 초 미국에서 교환교수로 연수를 시작했다. 당시 ‘미국 시장경제와 중국 시장경제의 차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두 나라 시장경제의 가장 큰 차이점이 ‘복음’에 있다는 걸 발견했다. 미국의 시장경제는 교회를 바탕에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 그는 2004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듬해에 세례를 받았다. 현재 ‘백향목리더십연구소(Cypress Leadership Institute)’도 이끌고 있는 그는 중국 기업인 등 엘리트들의 복음화에 앞장서면서 ‘3030 비전’성취에 힘쓰고 있다. 이 비전은 2030년까지 중국 인구의 30%를 복음화하자는 것이다. 1000만 명 기업인의 복음화도 목표하고 있다.
한인 선교사의 영향을 깊이 받은 그의 신앙고백을 좀 더 들어보자. “육신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인간적인 교만과 경제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삶으로 체험하지도 못했죠. 확실한 증거를 확인하고 싶어 3개월 동안 성경을 집중 연구했습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예언자이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는 더욱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됐죠. 잠깐의 기복(起伏)은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6월 4일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날이다. 톈안먼(天安门) 사태가 일어난 날이지만 이 시점을 전후로 해서 하나님은 중국 지식인들 가운데 복음을 새롭게 접하게 하거나 자신의 조국인 중국과 공산주의, 종교 등에 대해 다시 인식하게 하는 각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과거 많은 중국 지식인들은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아편전쟁(1840-42) 이후 기독교에 대한 문호 개방이 ‘무력’으로 이뤄졌다는 시각이 폭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태도는 2000년대 들어 옛말이 됐다. 설령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이전처럼 적대하거나 배척하지 않게 됐다. 많은 공산당 당원들도 ‘종교는 오늘날 중국 사회에 실제로 유익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지식인들도 점차 늘어났다. 경제발전과 함께 사회주의 이념이 약화되면서 민주, 자유, 인권, 평등에 눈을 뜨고 인생의 참 의미를 찾는 지적 순례에 나섰다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조국을 등졌습니다. 가족들과도 생이별했습니다. 외국생활은 녹록하지 않았고 절망과 그리움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때 복음은 한줄기 빛이자 희망의 끈이었습니다.” 1989년 6•4 톈안먼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학생 지도자들의 고백이다. 시위주동자로 지명수배 됐던 이들이 고통을 딛고 크리스천이 된 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부흥사, 이라크전 참전 군목 등 목회자가 되는가 하면 개인 기업과 NGO 등을 일구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기독교 신앙만이 개인 인생뿐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종착점”이라고 강조했다. 1989년 지명수배자가 된 21명의 학생 지도자 중 4명이 목회자 또는 평신도 지도자가 됐다. 아직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지만 종교학박사 학위를 받은 펑총더(封从德)와 왕단(王丹), 우얼카이시(五尔开希) 등도 기독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민주화운동 당시 ‘중국의 잔다르크’로 불린 차이링(柴玲)은 중국정부의 학생 지명수배자 21명의 명단 중 세 번째에 올랐다. 그는 10개월 동안의 도피생활 중 숱한 체포 위기를 넘긴 뒤 배에 실린 나무궤짝에 5일 동안 몸을 숨겨 90년 부활절 전야 홍콩으로 탈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차이링은 그때의 심정을 “어릴 적 느꼈던 공포와 고독 그 자체였다”고 술회했다.
그녀는 베이징(北京)대 캠퍼스 커플이자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펑총더와도 망명 후 헤어졌다. 설상가상 사랑하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지만 마지막을 지켜볼 수 없었다. 고통 속에 죽음까지도 생각했다. 그때 미국 화교교회는 그의 버팀목이 됐다. 프린스턴대 국제관계학석사와 하버드대 경영학석사 학위를 마친 그녀는 미국회사에서 일하던 중 미국기독교인 로버트 A. 매긴 주니어를 만나 결혼해서 현재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인터넷교육업체 CEO로 활동하고 있다. 2010년 부활절(4월 4일) 미국 보스턴의 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됐다.
차이링은 “대학재학 중 한 선배로부터 촌부가 전해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며 “훗날 기독교 신앙이 나의 삶을 사로잡을 줄 몰랐다”고 고백했다. 이어 “예수님은 나의 마음속 상처를 씻어주셨고 난 오랫동안 갈망했던 평정을 찾았다”며 “특히 목사님이 날 위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때 하나님의 영이 내 맘에 충만해진 걸 느꼈다”고 간증했다. 그는 NGO ‘모든 소녀를 허용하라(All Girls Allowed, AGA)’ 등을 설립해 중국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가 하면 여아낙태 반대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1989년 당시 톈안먼광장에 설립된 민주대학을 이끌던 베이징대 출신 장보리(张伯笠)와 숑옌(熊焱), 칭화(清华)대 출신 저우펑쒀(周锋锁)는 복음 전도자가 됐다. 장보리는 목숨을 건 탈출 과정에서 복음을 접했다. 헤이롱장(黑龙江)성의 한 농가로 도피한 장을 기독인이던 여주인이 극진히 보살펴주고 기도해주었다. 러시아로 탈출하기 위해 농가를 떠나던 장에게 그 여인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예수님이 당신을 보호해줄 것입니다. 매일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어요”라고 말했다.
1999년 12월 24일 러시아에 도착한 뒤 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농가를 떠나오던 중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쳤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줄기 강한 빛이 임하더니 갑자기 아주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었습니다. 그때 ‘장보리, 너는 죽지 않는다. 너는 내 명령을 위해 달리게 될 것’이라는 음성이 들려왔어요. ‘하나님, 살려주신다면 오직 당신을 위해 저를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이 약속을 어기지 않겠어요’라고 외쳤습니다.”
장은 러시아를 거쳐 2년여 동안 중국 내지를 떠돌던 끝에 1991년 홍콩에 도착, 미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의 봄’(中国之春) 잡지 편집장, ‘중국민주연합전선’ 부주석 등으로 활동하던 장은 캘리포니아주 타이푸(台福)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미국, 캐나다, 대만, 필리핀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베이징대 법률학석사 출신인 숑옌은 1년 7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한 뒤 1992년 선전(深圳)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과 세인트루이스대에서 신학과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복음의 불을 밝히고 있다.
물리학도였던 저우펑쒀는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도미, 시카고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금융전문가로 활동해 왔다. 이밖에 6•4 민주화운동 때 70명의 지식인들이 당국에 보내는 공개 서안의 초고를 작성한 위안즈밍(远志明), 그와 함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TV 다큐멘터리 ‘허상(河殇)’의 작가 셰쉬안쥔(谢选骏)도 목회자가 돼 미국을 기반으로 전 세계 화교권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2011년 8월 6•4 민주화운동의 정신의 지주였던 위안즈밍 목사는 중화권 부흥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과거 그는 무신론자였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당성(党性) 또한 남달랐다. 르포작가 쑤샤오캉(苏晓康), 왕루샹(王鲁湘)과 함께 집필한 다큐멘터리 ‘허상’이 1988년 6월 중국 국영방송 CCTV에서 방영되기 전까지였다.
허상에 대해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열광한 반면 중국공산당과 정부 관계자들은 노발대발했다. ‘허(河)’는 황하문명, 즉 중화민족을 상징한다. ‘상(殇)’은 요사(夭死)를 뜻하는 ‘일찍 죽을 상’자이다. 허상은 결국 황하문명으로 상징되는 중국문명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중국이 현대화를 이루기 위해선 서구가 걸어간 길에서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이는 1989년 5-6월 톈안먼광장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의 시대정신이기도 했다. 그는 1989년 6•4 민주화운동 때 70명의 지식인들이 당국에 보내는 공개 서안의 초고를 작성하기도 했다. 중국정부는 6•4 톈안먼 사태 이후 책임을 물을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그는 어김없이 타깃이 됐다. 이 때문에 중국 최고 학부의 하나인 인민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을 재학 중이던 그는 고국과 가족을 등져야만 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이국 땅에서 그는 복음을 접했다. 중국 출신 민주인사 중 첫 번째로 기독교인이 됐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희망의 빛줄기이자 호흡과도 같았다. 그가 제작한 5000년 중국문화와 기독교의 관계를 담은 ‘선저우(神州•신의 나라)’와 핍박받는 가정교회의 이야기인 ‘십자가’, 사복음서 이야기인 ‘복음’, 해외화교들의 간증인 ‘비안(彼岸)’ 등은 중국 안에서도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실제로 이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잖다.
한국을 방문했던 위안 목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래 중국과 중국교회를 위한 한국의 역할론을 제시했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열정이 과거에 비해 식고 있다는 기자의 지적에 대해 그는 “그렇다 할지라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열정이) 뜨거울 것”이라며 “만일 저하되고 있다고 (한국 성도들이) 느낀다면 좋을 수 있다. 이는 좋아지기 위해 더 분발할 수 있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낙관했다.
“지난 2000년 기독교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은 유럽과 미국, 아시아를 거쳐 중동, 이슬람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복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중국의 형제자매들이 그 빚을 청산하기 위해 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중국의 선교 열정은 한국교회와는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중국교회가 과거에 비해 성장했다고 해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위안 목사는 “중국교회, 특히 가정교회는 불완전한 자유 상태에 있다”면서 “성도에 대한 양육 프로그램이 턱없이 부족하고 목회자 또한 매우 부족하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교회의 선교 잠재력만큼은 매우 크다며 절대 기독교인구(6500만 명-1억 명)가 많기 때문에 훗날 선교사 파송 숫자 면에서 세계 1위가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자신했다.
그는 한국교회와 해외 화교교회들의 중국교회를 위한 3대 과제를 제시했다. “첫째, 중국교회를 적극 격려해줘야 합니다. 중국교회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지지를 해줘야 합니다. 둘째, 실질적인 지지로 중국교회의 신학수준과 목양훈련을 강화시켜줘야 합니다. 셋째, 해외에 나와 있는 중국인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위안 목사는 향후 중국 지도자들이 기독교 사상에서 중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중국경제가 발전한 반면 민주를 보장하는 제도나 윤리, 도덕은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어요. 중국 지도부는 유가나 불가 사상보다는 기독교 사상이 사회의 불안요소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고 있다고 들었어요. 이때가 기회입니다.” 위안 목사는 기독교가 공산당과 정부와 대립요소가 아니라 국가를 보다 건실하게 할 수 있는 밑거름이라는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선교전략, 부흥전략이 아니라 기도, 헌신 등 복음에 대한 열심”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비밀요원’의 저자이자 중국원조협회(ChinaAid) 대표인 푸시치우(傅希秋, 봅푸) 목사도 톈안먼 사태 때 학생회 임원으로서 시위를 주도한 대가로 몇 달 동안 반성문을 써야 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근본 물음에 직면했다. 친구가 건네 준 소책자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뒤 캠퍼스선교에 헌신하게 됐다. 하지만 출석하던 삼자교회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돼 가정교회에 다니게 됐다. 그는 신학교 사역이 탄로나 아내와 함께 투옥되고 출소 후 직장에서 쫓게 났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됐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현재 중국인권운동가이자 목회자, 미드웨스트대 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 남침례교단의 ‘윤리와종교자유위원회’가 수여하는 2007년 존 릴랜드 종교자유상을 받았다. 푸 목사는 2012년 중국의 시각장애인 인권변호사인 천광청(陈光诚)의 극적인 탈출과 미국행이 성사되기까지 막후에서 큰 역할을 했다. ♧
♣ 왕빈 | 중국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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