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JPG) 2013년 저희 가정이 정든 곳,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던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충격, 어리둥절함 그리고 슬픔, 앞으로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막연하고 답답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왔을 때에는 선배 사역자들과 함께 사건들을 되돌아보며 얽힌 생각과 감정들을 끄집어내 정리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움, 충격이 있을 때에는 빨리 결정하기 보다는 충격으로 인한 스트레스, 아픔이 사그라지고 안정을 찾을 때까지 결정을 유보하고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3월에 귀국하여 5월에는 멤버케어워크숍에 참여했습니다. 6월에는 같은 사정으로 한국에 돌아오신 분들과 만나서 서로의 감정들을 보듬어 주고 동감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한국에 막 돌아왔을 때에는 한 동안 대화하는 중에도 물주머니에 구멍이 난 것처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습니다. 후원자님들이 저희 가정의 어려움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실제 휴식도 필요했기에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교회를 방문하거나 후원자님들께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유사한 경험을 한 분들과 만나는 것은 감정을 나누며 얽힌 생각들,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1년 반 정도 있었습니다. 감사하게 7월에 기도 중에 어디로 갈지 정해졌습니다. N국에 가기로 결정했는데 아내가 중국을 떠날 때부터 N국으로 가자고 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저 기도하고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기독교방송을 보다가 N국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N국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진로와 관계하여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하여 많은 리더십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한국을 떠나 선교지로 가기를 원했지만 아직 언제 갈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아서 정해지면 쉽게 정리하고 떠날 수 있는 집, 1년 정도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 등을 알아보았습니다. 짐을 싸고 풀고 이사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자기 방도 없이, 자기 물건도 짐 꾸러미에서 찾지 못해서 몇 개월은 여행하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다행히 부산 게스트하우스에 있을 때는 우연히 알게 된 분들의 소개로 아이들이 피아노학원, 수학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MK학교가 있는 다른 도시로 이사해서 아이들은 1년 정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중국을 떠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비자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비자가 나와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서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습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결정할 것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면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춘제(春节, 중국 설)가 지난 후 새로운 비자관련 방침이 결정되는 시기였던 모양입니다. “2주 안에 중국을 떠나십시오.”
예전의 뻣뻣하고 퉁명했던 말투가 어색할 정도로 웃으면서 상냥하게 출입국 직원이 건넨 말이었습니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말이어서 왜,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물어보았지만 꼬집어서 무엇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비자를 줄 수 없고 떠나야 한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2주는 너무 짧다며 2주의 시간을 더 달라고 사정해서 조금 더 말미를 얻었습니다. 당국의 결정이 받아들였지만 함께하던 친구들은 극적인 변화, 긍정적인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지 그 당시 제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아버지의 뜻, 계획이었습니다. 정말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3일 금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금식하며 복음서를 읽는데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울부짖음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소서” 그것은 저의 울부짖음이었고 간구가 되었습니다.
“주님 이 땅에 더 있고 싶습니다. 제발 이곳에서 일하면 안되겠습니까? 제발 이곳에서 일하게 해주세요. 꼭 떠나야만 합니까? ” 그리고 이내 “너는 떠나야 한다”라는 음성이 마음에 들렸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 들이겠습니다’하며 하나님과 실랑이를 마무리를 지었지만 여전히 불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슬픔도 아픔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중국을 떠나게 된 것에 대해 중심으로 감사기도를 하고 나서야 실망과 슬픔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기쁘고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좁은 길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파송교회도 없기에 재정착을 위한 재정지원 역시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나와 새로운 나라에 가서 새로운 사역을 하게 되는 저희 가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지원해 주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문화, 언어,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익숙해지려면 허니문이라는 즐거움, 열정, 에너지가 필요한데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또 한 번 이전에 지나왔던 비슷한 길을 지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시 낯선 문화의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이들과 가정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학교는 어디에, 쇼핑센터는 어디에, 문방구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 두었습니다. 공공시설, 버스운행 경로와 요금 등등 생활정보 파악했습니다. 신선한 우유와 고기는 어디서 사는지도 알아 두었습니다. 이렇게 1개월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보다 훨씬 힘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도 한창 공부하고 안정감이 필요한 십대이고, 저희 부부도 10여년을 이미 중국에서 생활했었기 때문에 새로운 곳에 다시 적응하기에 필요한 충분한 에너지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보통 겪지 않는 정착을 위한 수고를 두 번씩이나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면 이곳에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생각하면서 생활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계속 있었다면 언어를 공부하느라고 시간과 정력을 다시 쏟아 붙지 않아도 됐을걸 하는 생각에 초기 얼마 동안은 새로운 언어를 공부 하는데 의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잠시 아버지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셔서 즐겁게 언어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인도하심 있는 곳에 소망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시련을 만나지만 아버지께서 마음에 평안을 주시어 견디어 나가게 하셨습니다. ▩
♣ 개척자 |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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