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3.jpg)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순교자이자 선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 세계 곳곳에서 밀알처럼 살아가는 ‘주님의 후배’ 선교사들은 예수의 그 사랑을 계승하며 각종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선교사 비자를 정식으로 받아 사역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비롯해 많은 국가에서 보낸 선교사들이 재입국 거부 등 적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물심양면으로 중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있는 게 반쯤 공개된(?) 사실이다. 이왕에 피할 수 없는 사명이라면 수용자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선교사들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중국이 필요로 하는 선교사들은 누구일까. 지난 7월에 세 가지 기사를 접하고 이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물론 이 기사들은 선교사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라면 곱씹어봐야 할 내용이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인 입장에서 어떤 선교사가 필요할지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앞서 활동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필자의 관심을 끈 기사는 중국 관영 신화통신 등이 7월 2일 보도한 중국의 새 국가 안전법 제정 소식과 6일 공개된 7장 68조로 이뤄져 있는 ‘사이버 안전법’ 초안, 그리고 24일 게재된 조선일보의 ‘세계는 사이버 전쟁 중’이라는 제목의 기획물이다. 여기서 조선일보의 기사는 현재 한국에서 크게 불거진 사안(‘국정원 해킹 의혹’)을 짚어보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사이버 부대 미(美) 8만 명•중(中) 18만 명… 북(北)도 6000명인데 한국은 500명’이라는 헤드라인에서 감 잡을 수 있듯이 사이버 전쟁에서 한국이 크게 뒤쳐져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논조다. 조선일보의 첫날 보도 가운데 중국과 관련된 내용만 간추려보면 중국의 사이버부대 병력은 18만 명이지만 비공식 인력을 합치면 40만 명으로 추정된다는 것. 사이버전 총괄부서는 시진핑(习近平) 국가주석이 조장으로 있는 ‘중앙인터넷안전정보화영도소조.’ 이 조직은 기존의 ‘국가정보화영도소조’와 ‘국가인터넷•정보안전협조소조’를 통합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날 “상하이 빌딩가에 자리 잡고 있는 총참모부 제3부 산하 61398부대가 대미(对美) 해킹을 주도하고 있다”면서 “이 부대는 2006년 이후 미 IT업계•우주항공 업체에서 140건 이상 기술 정보를 해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의 사이버공간 의식을 조금이라도 엿보기를 원한다면 웹진『중국을주께로』 2014년 12월호에 ‘뱀같이 지혜로워야한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찬성 154, 반대 0, 기권 1. 7월 1일 중국이 새롭게 제정한 국가 안전법에 대해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제15차 상무위원회에 참석한 위원 155명(재적위원 169명)이 투표한 결과다. 신화통신은 2일 국가안보 적용 범위를 경제, 인터넷, 종교 등의 분야까지 확대한 국가 안전법이 통과됐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모두 7장 84조로 이뤄진 이 법은 국가안전 수호에 대한 임무와 책임, 국가안전 제도, 국가안전 보장, 국민과 조직의 의무와 권리 등을 일일이 규정하고 있다. 개인과 조직은 국가안전을 해치는 활동 단서를 즉각 보고하고 국가기밀 등을 알게 됐을 때는 비밀을 유지하는 등 국가안전을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일반 시민들의 국가안전 수호를 의무화한 이 법에 대해 신화통신은 “국가안보에 대한 종합적, 전면적이고 기초가 되는 법”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국가경제안보 수호, 문화안보 수호, 국가 사이버공간에 대한 주권 수호, 우주와 심해, 극지방 등 영역에 대한 국가안보의 법률적 기초 제공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그 범위가 지난 1993년에 제정된 국가 안전법에 비해 매우 광범위하다는 것. 안보 위협의 범위와 법 적용 범위는 1993년엔 국가전복과 분열 선동, 매국 행위, 국가기밀 누설 등이었지만 2015년엔 경제, 금융, 식량, 에너지, 인터넷, 종교, 우주, 극지방 등으로 대폭 확대됐다. 예를 들어 국가안보 지도체제 구축과 관련해 중국공산당의 역할을 강조하고 영토주권을 보호하며 인터넷 인프라를 통제하기 위해 당국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경제안보 부문에서는 국민 경제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업종 및 주요 기초시설 안보 규정이, 문화안보 분야에서는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교육과 선전, 불량 문화 침투에 대한 방어 • 억제 규정이 들어갔다. 인터넷 및 정보안보 분야에서는 국가 네트워크 및 정보안전 보장 시스템 건설, 안보 능력 제고를 통한 사이버공간의 주권 수호 규정이 포함됐다. 금융안보 분야에서는 금융 위기 예방, 처리시스템 확립 등이, 식량안보에서는 보장시스템 확립, 예금보험 제도 도입, 식량비축 책임 강화 등이 담겼다. 이 법에 대해 외부에서는 사이버 안전강화 등을 통해 언론과 사상 통제를 전방위적, 본격적으로 벌이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국가 안전법 적용 범위가 매우 넓어 외국계 기업의 중국 내 활동 위축은 물론 정부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까지도 범죄 행위로 단죄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법 시행에 따라 매년 4월 15일은 ‘전민 국가안전교육일’로 지정됐으며 전국적으로 국가안전과 관련된 선전교육 활동이 전개될 것이라고 예고됐다. 새로운 법 제정은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가안보는 정치,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 기술, 환경, 문화 등 전반에 걸쳐 있다고 강조해왔다. 지난해 11월 1일 전인대 상무위원회 제11차 회의에서 안보기관들의 간첩 수사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외국기관과 개인의 간첩활동 처벌을 명문화한 ‘중화인민공화국 반(反) 간첩법’을 통과시키면서 기존 국가 안전법을 폐지하고 새 국가 안전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이는 중국만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对) 테러전(战) 못지않게 가상공간에서 자국의 안보와 핵심이익을 보호하는 데 힘써야만 하는 게 21세기 모든 국가들의 공통 과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에서의 핵심이익은 주권, 영토 완정, 인민복지, 경제 등 분야에서 평화발전의 길을 견지하면서 정당한 권익을 포기하지 않고 국가의 핵심이익을 희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전인대 상무위원회에서 심의하고 지난 6일 그 초안이 공개된 ‘사이버 안전법’의 입법 취지는 사이버공간 주권과 국가안전 보호를 위한 것. 특히 이 법의 5장 50조는 국가안전과 사회공공질서를 수호해야 하는 중대 사안이 발생할 때는 국무원과 각 성(자치구, 직할시) 인민 정부의 비준을 거쳐 지역별 사이버 통신 등을 제한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법이 최종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각계 의견을 청취한 뒤 머잖아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새 국가 안전법 초안이 올 5월에 나온 뒤 7월 1일 정식으로 통과돼 시진핑 국가주석령(제29호)으로 반포된 것처럼.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가 중국이 필요로 하는 선교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최후까지 선교사의 본분을 잃지 않았던 초기 중국선교사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어림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저를 어려움이 제일 많은 곳으로 보내주시고 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게 해주소서.” 영국 런던선교회가 중국에 파송한 첫 개신교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1782-1834년)의 기도문이다. 그는 중국에서 25년간 사역하며 10여 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했지만 선교 열의에 있어 누구보다 뜨거웠다. “중국에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라며 그의 중국행을 비꼬는 주변의 소리에 “천만에요.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중국어사전 3권, 중국어판 신구약성서 ‘신천성서’ 등을 남기고 1834년에 하나님 품에 안겼다. 격무에 시달린 게 원인이었지만 그는 부름받는 날까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헌신했다. “중국인처럼 사고하고 살라.”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1832-1905년)의 말이다.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长沙)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중국인처럼 살았던 선교사다. “성경을 사랑하거라.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안 하신단다. 그분은 너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고 실수하지도 않으신단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늘 이 같은 말을 들었다. 1855년 7월 27일 우등 민족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선교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발을 하고 중국옷을 입었다. 또 2명의 중국인 성경공부 인도자를 세워 또 다른 중국인들을 양육하도록 도왔다. 1860년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의학공부와 닝보(宁波) 방언으로 된 신약성경 출판에 몰두하고 조지 뮬러, 찰스 스펄전 등과 교류하면서 각 선교회를 순회하고 중국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매일 3만3000명의 중국인들이 소망 없이 하나님 없이 죽어갈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또 다시 중국으로 떠나가는 과정에서 자녀와 소속 선교사들을 잃어야 했다.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았다. 1865년 초교파 국제선교단체인 ‘중국내지선교회’(CIM, China Inland Mission)를 창립, ‘믿음선교’(Faith Mission)와 더불어 해안선선교 시대에서 내륙선교 시대를 열며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가 세운 CIM은 1882년까지 중국의 모든 성과 몽골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의 선교원리와 정책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케임브리지 7인’은 물론 전 세계 독립선교회가 소속된 초교파선교단체(IFMA) 및 복음주의선교협의회(EFMA)에 가입한 교회들이 모두 그의 뜻을 뒤따랐다. 1964년 OMF로 이름을 바꾼 CIM은 전혀 다른 선교운동을 주도했다. 종전의 전통적인 선교양식인 교파 배경으로 안정된 선교비를 지원받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교단이나 사람에게 물질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고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간구하고 의지하면서 사역했다. 목회자선교사와 평신도선교사 간 갈등도 없었고 독신 여성들에게도 동등한 선교기회와 자격을 부여했다. 그래서 CIM의 선교정신은 오늘날까지도 탁월한 원칙으로 꼽히고 있다. 예를 들어 1884년부터 1984년까지 100년간 한국에서 활동했던 서양선교사는 2956명이다. 특히 1884년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해방 전까지 내한한 선교사는 1529명, 그중 1114명, 72.9%가 여성선교사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여성선교사들이 늘어나게 된 이유로 허드슨 테일러와 CIM의 선교정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885년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중국식 복장과 변발을 하고 중국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매일 장거리를 걸어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발엔 심한 상처가 나기 일쑤였다. 케임브리지 7인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영국 학생복음주의 운동 및 미국의 부흥전도자인 D.L. 무디의 케임브리지대 전도집회의 열매였다. C.T. 스터드(1860-1931년), 스탠리 P. 스미스(1861-1931년), M. 비우챔프(1860∼1939년), 윌리엄 W. 캐슬스(1859-1923년), 딕슨 E. 호스트(1861-1946년), 아서 T. 폴힐터너(1863-1935년), 세실 H. 폴힐터너(1860-1938년) 등. “복음화 되지 않은 세계를 위해 나의 목숨을 포기하겠습니다.” C.T. 스터드 선교사의 고백이다. 그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전 생애를 중국, 미국, 인도, 중앙아프리카 등에서 선교사로 살았다. 미국의 대학생선교자원 운동(SVM)에 깊은 영향을 미친 스터드는 복음주의선교단체 WEC(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의 전신인 HAM(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한 선교동원가이자 현장선교사다. 그는 매일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성경을 읽었다. 4시면 선교여행길에 나섰다. 한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경우 아침식사 후 중국어로 기도하고 점심식사 전까지 복음서를 3-4시간씩 읽었다. 협소한 잠자리나 바로 옆이 돼지우리인 헛간 같은 방,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불결한 여인숙도 불평 대상이 되지 못했다. 10년의 사역을 끝낸 뒤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쉬지 않고 강연과 집회에 열중했다. 심한 과로와 영양부족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에게 휴가란 임지의 변경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는 무디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18개월간 머무르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집회를 쉴 틈 없이 인도했다. 허버트 케인은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의 집회에 모여 들었는데 때로는 하루에 6차례나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회를 통해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사로 자원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스터드는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는 벽보를 보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1931년 7월 콩고 이밤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았다. 진흙바닥에 대나무와 풀로 만든 초라한 오두막에서 거하면서 빛바랜 몇 장의 카키색 담요와 천막용 천으로 만든 베개가 그의 침구였다. ‘질병박물관’이라고 표현할 만큼 많은 병에 허덕였지만 그의 선교열정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살아계심을 증명해 주세요. 만일 당신이 저에게 평안을 주신다면 저는 당신께 제 일생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시든지 그대로 할 것이고 어디로 가라고 하시든지 그곳으로 갈 것이며 평생 동안 당신께 순종하겠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인 리수(傈僳)족을 위해 사역했던 이소벨 쿤(1901-1957년) 선교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방황의 시절에 드렸던 기도다. 그녀는 허드슨 테일러와 CIM에 대한 글을 읽고 중국 윈난(云南)성 리수족 선교비전을 깨달았다. 무디성경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중국으로 떠난 그는 고난과 이별, 질병, 전쟁 등 최악의 상황에서도 선교에 열심이었다. 제임스 O. 프레이저(1886-1938년) 선교사에 이어 20여년 리수족을 위해 사역하던 그녀는 1948년 중국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이후 태국 소수민족선교를 이어갔다.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으로 인해 서양선교사 189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중 CIM선교사가 58명이나 포함됐다. 이때 CIM선교사들이 남긴 편지와 사진을 엮은 책이 2014년 로뎀북스에 의해 ‘순교한 선교사들의 마지막 편지’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선교사들이 위험을 피해 산속 동굴이나 움막에 숨어 본국에 있는 이들에게 남긴 메시지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안전하지만 이런 상태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다른 마을로 가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요일에 도시에서 남자 2명이 찾아와 우리에게 시골로 피신을 가라고 했습니다. 5년 동안 그곳에 있던 여 선교사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메이 R. 네이슨 선교사의 편지다. 그녀는 “아직 이 땅을 떠나기에 준비되지 않았고 한 일도 너무 적다”며 “조금 더 기다렸다가 가겠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아무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라고 고백했다. “세 번의 짧은 기도를 드렸는데, 몰리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키타이리가 와서 ‘빨리 출발하세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인적이 드물고 가파른 길로 오르락내리락 하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걸어 여기까지 도착했다.” 이 편지를 끝으로 그녀의 메시지는 끊어졌고 죽음의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 언론이 널리 인정한 선교사도 있다. 2006년 인민일보는 1840년 이래 중국에 큰 영향을 미친 외국인 50명을 선정했는데 그중 4명의 선교사가 포함됐다. 티모시 리처드(1845-1919년), 윌리엄 마틴(1827-1916년), 아더 스미스(1845-1932년), 존 켈(1824-1901년). 중국의 의료 현대화에 기여한 존 켈 선교사를 제외하곤 모두 교육선교에 힘썼다. 존 켈 선교사는 선교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피터 파커(1804-1888년) 목사의 뒤를 이어 의료선교를 성장시켰다. 외과, 안과 의사였던 피터 파커 목사는 미국해외선교회(ABCFM) 파송으로 광저우(广州)에서 안과의원을 개원해 20년 동안 5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했다. 존 켈 선교사는 1885년 그 안과의원을 이어받아 종합병원인 박제의원으로 재탄생시켰다. 또 병원 내 의학교를 설립해 중국인 제1세대 의사들을 길러냈을 뿐 아니라 중국 최초의 정신병원도 설립했다. 윌리엄 마틴 선교사는 베이징(北京)대 전신인 경사(京师)대 학장을 지냈다. 아더 스미스 선교사는 미국의 지원 자금을 통해 미국 내 중국유학생들을 도왔다. 칭화(清华)대 전신인 칭화유미(留美) 예비학교와 베이징협화의학교를 설립했다. 산시(陝西)대 설립자인 티모스 리처드 선교사는 변법자강운동 등을 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티모시 리처드 선교사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와 사역에 있어 서로 대비되는 모델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대중을 위한 복음전도와 치유 등 ‘아래에서 위로의 선교’에 치중했다면 티모시 리처드는 지식인 양성 등을 중심으로‘위에서 아래로의 선교’에 집중했다. 두 모델 다 현재 중국에 응용될 수 있도록 선교사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고 외국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국 그리스도인 자체 모델을 만들도록 한다면 중국 사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교사들은 언젠가는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주역은 중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다. 선교사는 처음부터 조연이다. 선교지로 갈 때부터 출구 전략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수많은 선교사들이 미지의 땅인 중국으로 떠났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명예도 부귀영화도 아니었다. 중국의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순교하기까지 복음전파에 열심이었던 그들의 불퇴전의 믿음을 후배 선교사들이 본받으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선교중국의 꿈은 중국인과 전 세계 기독인들의 동역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 왕빈 | 중국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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