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상하이에서 ‘신교입화백년대회(新教入华百年大会)’가 열렸다. 이 대회는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큰 영향력을 끼쳤다. 대회 참가자 1179명은 대회 중에 중국교회 본토화(中国教会本土化)를 촉진시키자는 중요한 공통인식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을 꼽았다.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결정에 대해 공감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화인교회(华人教会)는 당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고 있고 동시에 그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사실 한 가지는, 당시 대회 가운데 진정으로 중국교회를 대표할만한 사람이 놀랍게도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황금시기(黄金时期)’가 지난 후, 중국교회는 유래 없는 핍박을 경험하게 되었다. 문혁 십 년의 대재앙으로 교회는 심각한 단절을 겪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교회 가운데, 극소수 지역을 제외하고 50-60세 목회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원저우의 경우 적지 않은 겸직 전도자들이 있다). 오늘날 35-45세의 사역자들 다수가 목회자로부터 목양 받은 경험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진리를 부단히 경험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의 신묘한 뜻이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심지어 1949년 이후로 대륙의 농촌에서는 기독교가 급증하는 현상이 있었다.
90년대에 들어 도시에서도 역시 (정도는 다르지만) 부흥이 시작되었다. 현재 중국기독교인의 숫자가 어느 정도인가의 문제에 대한 비공식적인 집계들 간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은, 추산하기 쉽지 않다는 것뿐이다. 이는 백 년 전의 상황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자연히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예전의 그것과는 명확히 다르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가 아니라 “만민이 그리로 몰려들 것이라.”이다. 이것은 중국의 본토선교 과업이 이미 완성되었다거나 혹은 미전도종족이 이제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말이 분명히 아니다! 십 수억 인구와 수십(아마도 수백)개 민족의 국가라는 점에서 볼 때, 수천만의 기독교인 수는 아직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본토선교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사명이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라는 점인데, 그것은 바로 신학교육과 목양이다. 그리고 신학교육과 목양에 있어 해결이 필요한 전제는 신학기초이다. 이 전제가 없다면, 더 이상 교육도 목양도 가능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 온전한 교회를 세우는 것은 현재 중국 전도인들의 공통적 관심사 중 하나이다. 이는 (마태복음 28장의) 대사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1974년(중국이 “반쯤 문을 걸어 잠근 국가”이던 바로 시기의)의 로잔 대회에서 전 세계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공통인식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는 로잔 구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21세기에 들어 중국교회의 필요는 몹시도 두드러져 보인다.
“삼자(三自)”와 “가정(家庭)” 의심의 여지없이,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관계는, 건국 이래 중국교회 안에서 최대의 핵심쟁점 중 하나였다. 본래 풍부하고 다원적인 종파국면은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둘로 나뉘었다. 당국이 수년에 걸쳐 교육에 공을 들인 결과,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종파는 쓸모 없고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삼자계통이든 가정교회 계통이든 오늘날까지 여전히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종파에 대해 언급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종파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이며 종파 나름대로의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는 종파 간의 문제가 아니다.
우선, “삼자”와 “가정”의 대립은 정치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건국 후의 “삼자운동”은 비록 1907년 대회의 기조[중국교회 본색화(中国教会本色化) 촉진]를 따르긴 했지만, 실제로는 그에 대한 크나큰 변질이 이루어졌다. 이후의 삼자 지도자들 역시 삼자운동은 본색화가 아닌 처경화[(处境化): 社会主义相适应(사회주의와의 조응)]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교회신학은 정치를 위한 부속품이 되어 버렸다. 겉으로는 학술적 논의로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단지 정책에 대한 변주-기독교 버전의 정치선언-에 지나지 않았다. 성경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자”조직은 “애국”을 끌어다가 그들의 이론도구로 삼는 시도를 단행하였다.
어느 기독교인이 교의적 원칙마저 희생시킬 수 있다고 해도 그가 진정한 덕행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순전한 교의, 경건한 생활"은 이미 상당 정도 중국 일부 기독교인들의 신념이 되었다. 그들은, 성경에 충성하는 신앙만 있다면 국민들에게 진정한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중국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지만 종교(기독교) 내부의 일에 관해서는 반드시 자주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중 신앙자유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일예배, 목사안수, 장로선출, 신학양성, 아동에 대한 종교교육 등의 일은 (각지의) 교회(성도)들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삼자”에 의해 “반정부적”인 것으로 비난을 받는다.
다음으로, “삼자”와 “가정”의 불화는 신학적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우야오쭝(吴耀宗), 딩광쉰(丁光训)을 대표로 하는 “삼자운동” 사상은, 서구의 신신학(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동시에 본색화인사들의 기독교 철학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복음주의 교의를 부정한다는 점인데, 그들은 (하나님 주도의) 진화, 성경유오를 주장하고, 인간에게 원죄는 없다고 말하며, 구원에 있어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부정하고(보편구원설), 말세의 그리스도의 강림과 세상에 대한 심판을 부인한다.
그리고 중국 가정교회의 신념은 거의 모두 복음주의적이다(비록 순수하진 못하지만). 이 점으로 인해 “삼자”측 인사들로부터 “과도하게 보수적이고, 완고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느 한쪽이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양자 간의 조화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외국선교사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양자의 관계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삼자운동”의 중요한 내포 중 하나는 바로, 히스테리적으로 “서양 기독교”와 선을 그었다는 점이다. 중국교회 자주성의 필요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 중 몇몇이 선교사의 외피를 두른 채 (제국주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복음을 위하고 중국을 위했던 선교사들이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다이더셩(허드슨 테일러)이 바로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삼자”의 지도층은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서구 선교사들의 인격과 사역을 송두리째 부정하였다. 이는 가정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선현들에 대한 악의적 비방으로서,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이다. 우리는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하며, 같은 이치로 “복음은 서구에서 왔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중국 기독교인이라면 서구열강들의 침략을 잊어서는 안 되나 서구 선교사들이 복음을 위해 중국에서 바친 생명에 대해서도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삼자운동”은 왕밍다오(王明道), 林献羔(린셴가오)를 대표로 하는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심지어 그들은 이 일에 생명을 바칠 뜻까지 있었다. 두 사람은 (삼자교회에 관한) 집필에 혼신의 힘을 쏟아 “삼자운동”의 진상을 폭로하였고, 몇몇 “삼자”인사들이 중국교회에 초래한 재난에 대해 질책하였다. 그들은 이로 인해 기나긴 수감생활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들의 사상은 중국 가정교회(와 지도자들)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교회는 반드시 자전, 자립, 자양을 실천해야 한다. 이는 1907년 대회의 공통인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삼자는 성경을 희석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본토문화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상황에 적응함으로써 성경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야오쭝과 딩광쉰이 지도한 “삼자”의 뜻은 가상하나, 그 내용이든 아니면 실행방식이든, 그 방법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사회로부터 얼마든지 불량집단의 변두리인들 이라 평가 받을 수 있지만, 그들의 사상과 생활방식에 동의할 수는 없다. 이른바 “이해는 하나 동의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단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응당 진지하게 삼자조직과 기층교회(基层教会)의 차이에 대해 분별해야 한다. 차분한 마음으로 논한다면, 삼자에 가입한 모든 사람(심지어 지도층일지라도)들의 견해와 사상이 다 틀린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볼 때 믿음이 부족한 듯 보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삼자계통에 가입하게 하셨다.
하지만 바로 이들의 지도로 인해 “삼자”교회의 복음신앙은 견고해졌다. 지아위밍, 양샤오탕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 외에 주목해야 할 현상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양회”가 설립한 신학원의 학생들 중 단지 소수만이 “양회”에 충성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지역의 교회들은 매우 “삼자적”이었다. (지역교회들 스스로 전권을 가지고 교회사무를 처리하였다.) 그들은 비록 “바빌론”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았지만, 진창에서는 빠져 나왔으나 오염되지는 않은 남은 자들이다. 필자는 그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 기도했던 것이 다시금 이루어졌음을 발견한다.
기쁜 것은, 우리 중국의 어떤 지역에서는 가정교회와 삼자교회가 좋은 교류와 동역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 위에 하나 되고”, “비전에 있어 서로 인정하며”, 더욱 장하고 기특한 것은, “사역에 있어 서로 헌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최소한, 삼자와 가정 양자 간의 불화와 장력을 해소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점을 말할 수 있다.
해외와 본토 1949년 해방을 맞이함에 따라 중국교회의 많은 단체/집단들 역시 해방되었다. 이 기간에 중국교회의 인재들이 줄을 지어 해외로 떠났는데, 대부분이 주로 홍콩, 대만, 북미 등이었다. 그런데 1979년 개방에 따라 고국을 그리워하는 “타국동포”들은 여러 신분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하신 뜻이 있었을 것이라 믿지만, 또한 그 “순수하고 기쁘신 뜻”에 대해 “점검”해야 할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국교회에게 축복을 가져다 준 동시에 어려움도 함께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은 중국의 추수 밭에 하나님이라는 물을 쏟아 부었지만, 중국교회에는 큰 짐도 역시 안겨주었다.
중국교회의 빈약함은 역사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해외교회가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는 문제이다. 해외교회와 비교해볼 때, 중국교회는 아직 미숙하다. 신앙에 대한 이해와 사역의 운용 등 여러 방면에서 적지 않은 격차를 보인다. 해외의 화인교회는 기본적으로 환경과 조건이 좋다. 중화교회의 양호한 전통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서구의 신사조를 끊임없이 배웠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그들의 시야와 안목은, 가까스로 겨우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대륙교회에 비해 훨씬 넓다. 중국교회가 그들의 진일보한 생각과 관점을 배워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의 과제는 진리와 문화의 간극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어디에서나 일률적으로 적용되고 똑같아야 하는 것이지만, 이와 달리 문화는 단지 감상하고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침략이 되고 만다. 해외 기독교인들이 전하는 순전한 복음은 중국에도 역시 똑같은 모습으로 전해져야 한다. 하지만 교회건축이나 목양의 이론과 방법에 있어서는 중국적 상황과 필요가 다를 수도 있다.
중국 기독교인들과 모든 중국인들은 똑같이 정치상의 혼란과 경제적인 빈곤을 경험하였다.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문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고, 특히 사유방면에서 그러했다. 이는 해외교회의 경우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다. 이것은 상호 대화에 있어 어려움을 유발시켰다. 따라서 해외 선교사들이 수십 년간의 나름의 전통이 쌓인 중국교회를 지도할 때, 중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 풍부하게 하는 작용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무거운 짐도 함께 안겨주게 된다. 1세대 중국인들은 광란의 무신론 캠페인의 세례를 받았기에 수많은 중국 봉건문화(사람을 잡아먹는 예교, 즉 유교)가 깨끗이 소거될 수 있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신앙은 매우 순수해지게 된다. 민간종교의 방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교회 전통의 짐도 없다. 그런데 몇몇 해외인사들은 매우 “중국적”인 문화와 중국교회의 몇몇 사람의 유산을 흥왕하는 대륙교회 가운데 이식하고 있다.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고난은 중국교회를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이다. 과거이든 현재이든, 중국교회는 깊은 반성과 참회가 부족하다. 어떤 사람들은 해외선교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지만 해외로 도망간 것이었다. 오늘에 와서는 떳떳하게 중국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병이라고 자청하는 자들이다.
새로 부흥하고 있는 대륙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성장의 향기에 도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21세기, 하나님 나라의 미답지를 자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결단코 막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처절하게 반성을 해야 한다. 40년 후의 2세대 이스라엘인들이 비록 가나안에는 들어갔을지 모르지만, 광야에서 죽었던 자들에 비해 결코 낫지 못했던 것과 우리의 모습이 똑같지는 않은지 말이다. 해외 화인교회의 대륙에 대한 관심은 종종 정치와 경제 방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정치적 핍박으로 인해 지난 수십 년간 중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곤궁과 수난은 자연히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해외 화인교회들은 사역상의 협력을 위해 대륙교회 인사를 초청해 고난과 핍박의 이야기들을 간증해달라고 요청한다. 수많은 찬송들은 마치 국외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 같다. 확실히, 중국교회가 지난 백 년 간 걸어온 길은 매우 복잡하게 굽어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유혹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국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신호를 주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고난을 강조하면 대외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미래 순교자”는 중국교회를 자주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만들며, 해외교회 역시 그에 대한 쓰디쓴 열매를 지금 맛보고 있다.
우리는 제1세대(1949년 이후 중국을 떠난) 해외 기독교인들의 시대적 한계의 원인을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반론하기 힘든 사실은 하나님께서 제2세대 해외 화인 기독교인들을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1989년 이후 북미에 정착한 대륙의 지식인들인데, 그곳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들의 기독교로의 귀의는 각계각층의 주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이전 세대들에 비교할 때 의심의 여지없이 중국에 훨씬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와 문화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 필자는 놀라운 발견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이 중국으로부터 의외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강연문이나 저작 속에서 중국 당대의 작품에 관한 내용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인사가 기독교에 대해 강연을 할 때, 대개의 경우 자신의 언어를 이용해 묘사를 한다. 그들과 중국사회는, 그리고 그들과 대학의 기독교 연구소는 심각할 정도로 연결고리를 상실하였다(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일단의 사람들이(꽤나 영향력이 있어 보이는) 잠시도 잊지 않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다. 심지어 신앙에 대한 이해도 단지 개인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로 치부될 뿐이며, 종종 그들의 국가에 관한 꿈과 연관되기도 한다. 뜻밖에도, 이미 대륙의 시험과 면접은 국가에 대한 많은 동포들의 감정과 정서를 희석시켰다.
그리고 중국교회 또한 점차로 옛날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어린이 시절과 이별하였다. 오히려 리전트 칼리지에서 공부한 후 돌아온 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이 자각하든 못하든 간에, 신학적 사명을 이어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재 기독교 연구 방면에 있어 새로운 대들보 세대가 되었다.
1949년 이후 중국을 떠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이든, 아니면 1989년 이후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이든, 그들과 본토의 관계는 이미 상당히 미묘해졌다. 이후로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허심탄회한 태도로 넓은 영역에 걸쳐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아마도 한층 더 현실적인 해법이 아닐까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옌신언(颜新恩) | 《中国教会》 편집장 출처 | 《中国教会》 ( 2010년 12월) 번역 | 김성민 • 본지 집필위원, 한국외대 동북아 연계전공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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