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설정   사이트맵    사역에 동참하시려면  
    HOME  |  선교회소개  |  교육.훈련  |  중국을주께로  |  중국기도  |  중국어교실  |  자료나눔  |  커뮤니티  |  도서·음반
   
중국을 주께로는
전체보기
이번호보기
지난호보기
주제별보기
  특집/기획
  선교전략
  중국교회
  중국사회와 문화
  지역 및 종족연구
  중국뉴스
  중국어관련
  선교일반
  선교나침반
  중국 기독교
  기획
정기구독안내
해외정기구독안내
HOME > 중국을주께로 > 지난호보기
2013.7.1 통권 138호     필자 : 로렌즈 림(Lorends Lim) 프린트   이메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선교사의 길]
나를 따르라

선교사는 따르는 자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요 13:36) 
‘따른다는 것’은‘배운다는 것’과 다른 무엇을 말합니다. 따르지 않고 단순히 배울 수 있습니다. 보통 배움은 사건들을 수집하고 해석한 후 언어의 재구성 작업을 거친 문장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는 데에서 그칩니다. 그러나 따른다는 것은 그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나와 관련이 있는 한 사건이 사실일 뿐 아니라 나에게 진리이다 라는 고백이 동반될 때 그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처음 그 부르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과 꽤 오랜 시간을 보낸 후에도“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습니까?”(요 13:36-38)라고 되묻고는 했습니다. 

베드로가 상상하기도 싫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베드로 생각에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고, 예수님에게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 안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에서 넘어진 후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를 찾아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힘들었지만 고백했습니다. 주님을 예전과 같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예전에 비해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하시면서“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9). 이어서 베드로는 안절부절하면서 주님께 동료 사역자 요한에 대하여 엉뚱한 질문을 했지만 주님은 여전히“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따르기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율법적으로 잘 훈련된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에 관해 수준 있는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은“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율법을 지켜온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아직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모두 지킨 것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분명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이지만, 이웃과 이방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제사장으로서는 부족해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마지막 계명인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 것을 초월하여 아예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준 후 그분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주를 따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따를 수 있습니다. 젊은이는 율법을 다 지켰으나 재물을 버리지 못했고, 제자들은 그물과 모든 소유를 버렸으나 마음속의 탐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말씀을‘지키는 것’의 수준을 넘어‘모든 소유를 버리는’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버리는 지평’을 지나면 비로소‘따르는 지평’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과‘따르는 것’은 같은 의미 같으나 지평이 다른 것입니다. 선교사는 주님을 연구하는 자들이 아니라‘따르는 자’입니다.

내 목숨까지도 …… 따르겠나이다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7). 
우리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믿음에서 쉽게 넘어집니다. 앞으로 우리가 섬길 제자들도‘주님을 따르게’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모든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큰 결단이고 고귀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과 고백도 주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할 때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늘 칼을 품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실제로 검술을 사용하여 대세장의 종 말고의 귀만 잘라버리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주님 앞을 가로 막으며 자신이 주님을 지킬 수 있기에 결코 당국자들의 손에 돌아가시지 않을 것임을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고통스러운 예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하룻밤 사이에 성취되었습니다.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 18:27)

선교는 단순한 고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독론의 문제가 극에 달했을 때 신앙고백들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안 하는 것, 어떤 것을 지키는 것 등으로 단체와 개인들이 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고백들로 인해 교회의 색깔을 갖게 되었고, 그 고백들은 주님의 선교명령에 순복하는 고백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의 색깔에 몰두하면서 교회는 예수의 선교명령과 동떨어진 다른 무엇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지로 떠나올 때 힘찬 고백이 우리들에게도 있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주를 위해 아골 골짜기라도 가겠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부귀는 주님이 받으십시오. 멸시와 천대는 제가 받겠습니다. 내가 가는 이 길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우리의 이러한 찬양과 결단이 그물과 친척을 버리고 주를 따랐던 베드로를 결코 앞서지 못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데 칼을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학문이든지, 경제적 부요이든지, 가문의 권세이든지, 특화된 자신의 무엇이든지, 그것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겸허히 사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품고 있는 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로 단련되지 않는 그 칼은 사람의 귀만 베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진리도 베어 냅니다. 조금은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그 칼을 품고는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습관이 된 이러한 칼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빌 3:7-8). 그리고 성령의 칼을 품고 주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과거 혈기에 익숙한 검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실제 적들을 물리치는 데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엡 6:17). 선교사는 신앙고백을 넘어 자신 속에 숨겨진 세상의 익숙한 칼을 버린 후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은 따를 수 없으나 후에는 따르리라!
지금과 이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결정짓도록 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지금’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목표를 정하여 원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나‘이후에’는 십자가를 향한 죽음의 길과 부활의 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비록 고난의 길이지만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자신이 걷고 있는 그 고난의 길을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고난을 넘어서면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차 새롭게 세워질 교회의 영광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따르라’는 것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맛보아 알게 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그 십자가의 길이 부름받은 자의 길임을 확신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지금’이라는 교훈보다는“이후에는 따를 수 있다”는 주님의 격려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격려는 성령의 능력으로우리를이시대앞에예수의증인으로서게할것입니다.“ 성령, 그가나를 증언할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한다.”(요 15:27) 

혼란스러웠던 십자가의 사건이 베드로를 관통하자 신비스럽고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그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그 말씀은 성령의 확신으로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다시 부인할 수 없는 인치심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하여 보혜사로 오신 성령 안에서 새로운 배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이후에는 따를 수 있다”는 예수님의 예언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먼저‘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알고 그를 따르고자 했으나 예수님께서 거부하신 내용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또한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하는데 먼저 그들을 부르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부르심의 요구는 반드시 따름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잘 알아듣고 총명했던 바리새인들 가운데 제자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실 때도“나를 따라 오너라”하시면서 그 목적을 말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인물로 훈련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부르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깊이 생각지 않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교적 부르심이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부르심입니다. 첫 번째 부르심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내적 소명이라면, 두 번째 부르심은 우리에게 사명을 깨닫게 합니다. 물론 처음 부르신 목적 자체가 그것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명을 위해 재차 불러 처음 부르심의 목적을 깨닫게 하는 경우가 선교사가 되려는 분들에게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만 선교사로 나서야 할까요? 마치 제자들이나 사도바울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이해하면 예수님의 선교명령이 사도들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산전수전다격은베드로의교훈을보면그렇지않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동일하게 그 선교적 부르심을 갖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선교적 부르심은 현지에서 단순히 먹고 살기만을 위한 부르심이 아닙니다. 이것이 선교 목표라면 우리는 더 이상 사역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과업을 위해 먹고 살기의 일체가 필요한 것이지, 선교지에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구원과 축복을 위해 주님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마 4:18-22, 10:1-4). 특별히 이방인들을 위해 바울 (행 9:1-19; 갈 1:15-17)을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과 해방을 위해, 바울은 이방인 전도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뜻(意志)과 일(역사)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중심의 일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롬 8:30, 9:11-12). 따라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엡 4:1; 살후 1:11).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며, 그 일을 하기 위해 보낸 자들을 대사라 하였습니다 (행 13:2, 16:10; 롬 1:1; 고전 1:1; 갈 1:15). 그 부르심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 증거에 충성을 바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지금이 모든 민족이 이러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은혜의 날이며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때라 믿기에 우리가 이곳에 있습니다.

부르심은 다양하지만 모두 믿음으로 응답한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선교사들에게 부르심은(The Calling)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일생을 선교사적 삶을 살려는 분들에게는 선교명령을 절대적으로 복종하려는 충성스러운 마음과 분명한 부르심에 대한 개인적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부탁한 것을 들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선교의 일을 용기 있게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 부르심은 다양한 방식으로 들려옵니다. 때로는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세밀한 말씀 가운데 들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불같은 강력한 역사 가운데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의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선교에로 부르신 음성으로 믿는 믿음이 없으면 선교사의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반드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히 11:3) 그 명령이 귀에 들리지 않아도, 예수님의 부르시는 손짓을 보지 못해도 성령의 감동으로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면 그 믿음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요 14: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 명령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 오직 …… 너희가 가서 전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선교명령을 교정하시면서 아주 분명히 알아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한 구속의 사역을 온전히 다 이루었다.”이제는 제자들이 일할 때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 위에서 한 일을 믿으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한 것을 믿으라!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이룬 일, 즉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선포하라! 너희들이 믿고 선포하는 곳에 내가 역사하리라!”제자들은 대부분 사회의 문화배경이 천박한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신 그 능력과 권능으로 직접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그 나라를 회복하여 나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선교의 소명을 사명으로 받아들였고, 선교적 부르심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산 제사로 드려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먼저 이방인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사명을 맡은 자로서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의 회복의 시기는 제자들의 알 바가 아니며 새로운 능력을 덧입고 땅 끝까지 나아가서 증언해야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덧입고 보내심에 순종하면서 그 명령을 이해했습니다. 그 명령은 사도들에게 사명이 되었고, 그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하나님나라 회복의 한 징조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언하는 가운데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증인의 삶을 사명으로 믿고 사는 제자들에게 훗날 그 나라에서 함께 다스릴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날이 이를 때까지 반드시 함께 하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증언했을 때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그들 자신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눅 11:2).

명령을 성취하시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소
서.” 
부르심은 부르시는 분의 의도를 적극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살전 5:24). 그 부르심의 약속은 다음과 같은 로드맵을 통해 성취됩니다. 선교사들은 그 명령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자라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약속한 것을 받으리라. 그리고 증인이 되리라!” 

약속을 이루기 위해 이것보다 더 구체적인 지침은 없습니다. 약속한 그곳에서, 약속한 그것을 기다려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실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는 약속을 믿고 실행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곳에서, 그 약속을 받기까지 결코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한 곳, 감람산에서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이제 이 땅에서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이해하고 약속한 것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이 오심으로 그들은 예수의 오심과 승천하심, 다시 오심, 자신들을 부르심과 훈련하신 목적, 보내심 등 모든 것을 통시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한 통시적 이해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분의 약속을 동반한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내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셔서 사명을 부여하신 분의 약속을 믿게 됩니다.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선교적 소명을 확신해야 합니다
파송단체들은 대부분 선교사를 선발하고 파송할 때 많은 부분을 테스트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묻는 4가지 항목이 있습니다. 첫째, 당신은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둘째, 당신은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셋째, 당신은 어느 민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넷째, 당신은 어떤 은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이 네 가지 질문은 바로‘선교적 소명’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자신의 소명을 좇아 새로운 사명의 삶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구분 (separation, 창 12:1-9)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희생(sacrifice)을 요구했으며, 서로에게 목표가 되는 약속(promise, 창 12:2-3, 18:18, 22:16-18)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부르신 자를 온전히 구원하심을 알게 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교사로 보내심은 사람 안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또한 그 사랑을 요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예수와 함께 연합하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랑을 이웃에 전하고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교로 부르심과 그 명령을 주신 것은 진정한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요, 그 은혜를 서로 나누기 위함입니다. 은혜의 신비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사랑으로 증언할 때, 그것은 신비의 옷을 벗고 실제적인 능력이 됩니다. 선교의 부르심과 명령은 선교사의 정체성(Identity)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 됩니다.


로렌즈 림 | 중국선교사  

       인쇄하기   이메일보내기   
   
110-812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29길 25, (명륜3가 명륜빌딩 202호)   Tel : 02)745-0780~2, 070-8236-1270   Fax : 02)745-0786    E-mail : sinim@chol.com
Copyright 중국어문선교회 All Rights Reserved.     Product by gmgl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