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처럼 1977년 10월, 나는 독일 서베를린에 합동측 장로회 총회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비자와 선교비는 서독 간호사인 아내 전담이었다. 신학교 시절, 금식기도와 산기도를 하며 부교역자로 사역하느라 무리했다. 결국 나는 폐결핵에 걸렸다. 그때는 각혈을 하면서도 약을 사먹을 수 없는 가난한 신학생이었다. 그래도 그 당시 독일은 의료보험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무료로 치료를 받고 약도 무상으로 지급받았다. 그렇게 일 년의 요양기간 동안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여 일 년 후에 한인교회를 개척했다.
그때 독일은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주말이었다. 그래서 독일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국간호사들은 토요일에 이사를 했고, 그때마다 이사를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내 차는 뒷좌석을 앞으로 접으면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왜건(wagon)차였기 때문이다. 병원 기숙사에서 살았던 간호사들의 짐은 참 단촐했다. 가재도구는 모두 기숙사 소유여서 이불과 옷, 책이 전부였다. 짐은 내 차에 충분히 실을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이사하려면 차를 불러야 하고 짐을 실을 수 있는인부도 있어야 해서 돈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차도 인부도 공짜인 나를 불러서 이사하려는 것이었다. 거의 매주 토요일 밤 늦게까지 이삿짐을 옮겨야 했다. 다행히 예배가 주일 오후 5시에 있었기 때문에 주일 오전에 설교를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었더라면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을 시간에 이사를 돕고 있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어느 토요일 밤에도 늦게까지 짐을 실어 날랐다. 피고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울면서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저는 목사입니까? 아니면 이삿짐이나 나르는 짐꾼입니까?”하며 푸념 섞인 기도를 했다. 그때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주의 종은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는 자의 위치로 내려가야 하며, 그렇게 주님처럼 낮아져 섬기기 시작할 때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감동을 주셨다. 낮아져 섬기기 시작하니, 낮은 곳에 물이 많이 모이듯 섬김을 받기 좋아하는 불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목회는 먹회다 독일에는 학비가 없는 가난한 한국인유학생들이 많았다. 유학생들은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런데 외국어를 배우고 외국음식과 문화에 적응하는 동안 향수병에 많이 걸렸다. 의사의 진단은 간단했다. 한국 사람과 어울리고 한국말을 하고 한국음식을 먹으라는 것. 그래서 유학생들은 우리 교회에 왔다. 우리는 우리 집에 한국인유학생들을 초대했다. 독일빵 대신 캘리포니아의 기름진 쌀밥과 삼겹살,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대접했다. 그들은 고기와 쌀밥을 배터지게 먹었다. 한 사람 당 밥 두 그릇은 기본이었다. 아내는 매달 한국에서 부쳐온 고춧가루로 김치를 20kg 이상 담갔다. 김치는 한국인유학생들이 고향생각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식후에는 한국에서는 비싸서 먹을 수 없는 귤과 바나나 등을 실컷 먹였다. 또 아이스크림도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고 할 때까지 먹게 했다. 한국 유학생들은 그렇게 한국인의 정과 사랑을 받게 되자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동구라파 지하교회 목회자 후원 감옥에 갔다 온 동구라파 지하교회 목회자들과 가족들은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 많은 날을 굶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돕기로 하고 기도했다. 다행히도 그 당시 한 달 생활비는 미화 20불이면 족했다. 우리나라도 서민 생활비가 2만5천원 정도였다. 한국에서 동구라파 목회자들을 돕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잘 사는 독일에서는 충분히 도울 수 있었다. 나는 독일에서 양복 한 벌 사 입지 못했다. 양복 한 벌이면 동구라파 목회자 여러 명의 생활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동구라파를 방문했을 때 많은 교회들이 부흥한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이 가장 어려웠을 때 내민 우리의 작은 손길이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가 어려웠을 때 미국과 유럽교회가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도왔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부흥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과 같다고 본다.
레퓨지(피난민선교) 서독 베를린에는 아프리카 가나와 스리랑카에서 온 피난민들이 많았다. 독일은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피난민들이 오면 3개월 이상 독일에 머물게 하고 난민으로 비자를 줄 것인가를 결정했다. 나는 매주 난민 수용소를 방문해서 영국선교사님과 함께 전도집회를 했다. 외국 생활에 지치고 외로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잘 받아들였다. 집회 후에 집사람은 차와 과자를 대접했다. 하루는 스리랑카 사람들과 함께 장을 봐서 그들이 좋아하는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었다. 후추를 너무 많이 넣어서 고춧가루보다 더 매운 카레가 되었다. 느끼한 양식만 먹다가 얼큰한 자기 나라 음식을 먹으니 모두들 아주 맛있게 먹었다. 우리 식구는 카레를 먹고 배탈이 나서 여러 번 화장실에 가야 했다.
우리교회는 옷을 모아서 스리랑카 난민을 섬겼다. 주일에는 한인교회가 스리랑카 성도들을 청해서 예배를 드렸다. 개종한 수많은 난민들은 성경을 가지고 서부 독일로 갔다. 그중에 독일에 난민으로 온 스리랑카 목사님 내외가 있었다. 만삭인 사모님이 아기를 낳는 일 때문에 걱정을 했다. 한국간호사들이 많은 우리교회인지라 독일 병원에 연결되어 병원비 걱정 없이 아기를 출산했다. 그 후에 목사님 내외는 스리랑카로 돌아갔다. 나라에 내전이 일어나서 피난 왔지만 남아있는 성도들에게 목자가 없으면 어떻게 예배를 드리겠는가? 우리는 스리랑카 성도들을 위해 그분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매달 200불씩 19년 동안 후원했다. 그 후원을 힘입어 자녀 넷을 대학까지 공부시킬 수 있었고 전해왔다. 몇 년 전 휴전 중인 스리랑카를 방문해서 의료선교를 펼치고 집회도 열었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큰 위로를 받았다. 스리랑카에서 오신 안톤 목사님 네 식구가 집회와 의료선교 활동의 통역을 도왔다.
선교사가 파송한 선교사 고 하용조 목사님이 영국에서 유학할 때 내게 전화를 하셨다. 당신 교단 선교사가 WEC 선교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한국에 있는 후원교회가 선교지원을 끊어버려 국제 고아가 되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그 한국선교사 후보생의 후원교회가 되어주기를 부탁하셨다. 그동안 몇 명의 한국선교사를 협력으로 돕고 있었고, 한 사람을 단독으로 파송하려고 선교비를 준비하고 있던 차에 연락이 온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아프리카 감비아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아프리카에서 사용할 선교차량을 독일에서 구해 보냈다. 목사가 사용한다고 할인해주고, 아프리카 선교사용으로 보낸다니 또 할인해주었다.그리고 아프리카의 사막을 다녀도 될 만큼 튼튼하게 자동차 밑을 철판으로 막아서, 각종 부속품도 함께 넣어 보냈다.
한 번은 독일 가정에서 큰 고목나무를 베어내는데 아르바이트생을 구해서 우리 학생들을 보냈다. 학생들은 일을 한 대가로 500마르크를 받았다. 한편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이 선교사님이 현지 학교에서 몇 달 동안 성경퀴즈 대회를 해서 상품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약속한 날 전에 수도 반줄에 있는 문방구에 가서 상품으로 줄 학용품을 사려고 했는데 물건이 얼마 없었다. 한국에서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을 이곳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여러 곳을 다녀 봐도 마찬가지였다. 학용품을 다 사버리면 아프리카 학생들이 필요할 때 살 수가 없어서 싹쓸이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약속한 날이 가까웠는데 상품을 구할 수 없으니 난감했다. 약속한 날 전날에 우체국에서 소포가 왔다는 연락이 왔다. 소포를 열어보니 독일제 학용품이 한가득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의 목회와 선교 10년 동안의 독일선교를 마치고 한국의 작고 가난한 지역 교회에 부임했다. 잘 사는 독일을 떠나서 한국에 돌아온다는 것은 힘든 결단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문이 곧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목회하면서 중국선교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래서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교회를 건축하고 목회와 선교를 시작했다.
22년 전의 설이나 추석명절은 외국인노동자들에게는 즐거운 연휴가 아니라 괴로운 기간이었다. 공장 식당도 문을 닫고 나가서 식사를 하자니 너무 비싸서 사먹을 엄두를 못 냈다. 더군다나 어떤 공장은 기숙사까지 문을 닫아서 여관에 서 잠을 자야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큰 돈이 들어갔다. 그래서 한 선교단체와 힘을 모아 우리 교회에서 먹고 자면서 연휴를 보낼 수 있게 했다.
우리 교회는 건축할 때 교육관 바닥에 보일러를 설치하여 숙박이 가능하도록 했다. 유아실 두 개도 마찬가지로 밤에 기도도 하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스텝과 외국인노동자들을 합하여 2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었다. 명절에 식사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성도들이 하루씩 교대로 섬겼다. 무슬림, 불교신자 등은 특정음식을 먹지 않기에 뷔페식으로 준비했다. 우리는 관광과 기독교 영상 상영 등으로 그들을 섬겼다. 저녁에는 전도집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그중에는 은혜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가 신학을 해서 목회자들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능력 선교 - 중국 단기선교 한국에 들어오기 전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18절,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받았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전도하고 선교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국에서 기도운동과 영성 운동을 시작했다. 예수님처럼 베드로나 바울처럼 능력 전도집회를 했다.
1996년 중국 대도시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건물에서 전도집회를 가졌다. 그 건물은 공산당 간부가 제공한 것이었다. 소리가 밖으로 나가도록 스피커를 설치하고 찬양을 부르니 많은 중국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건물 안과 밖에도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복음을 전했다. 순수한 그들은 거의 다 손을 들고 주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국가 주석이 집을 방문한다면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야 하듯,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마음에 모시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우상을 섬긴 죄와 각종 죄에 대해 회개할 것을 선포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픈 부위에 손을 얹으라고 했다. 주님께서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선교팀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해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중국 사람들의 순수한 믿음을보시고 각종 병을 고쳐주셨다. 그중에 한 사람은 공안국 출신이었다. 그는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내 머리를 다쳤다. 그래서 말도 제대로 못했었는데 기도를 받고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대부분 사람들이 구경온 것이었지만 왔다가 복음을 듣고 기적을 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은 4월 28일을 자기들의 영적 생일로 삼았다. 그날은 성령강림주일 바로 다음 날이었다. 우리 선교팀과 중국 사람들은 성경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이 중국 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면 너무 추운 지역이라 건축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함께 기도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과 부흥을 보면서 마누라라도 팔아서 교회를 지어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개척교회를 섬기던 목사님은 사모님은 팔 형편이 못되니 대신 지상으로 사택을 이사하려고 모아둔 돈을 헌금하겠노라 했다. 아내도 적금을 해약하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건축헌금을 했다. 작은 규모의 교회로 설계했으나 너무 빨리 부흥해서 세 번이나 설계 변경을 해 큰 교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였다. 그 후에 매달 한 번씩 중국을 방문해 전도집회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고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중국 신학생 양성 어느 여자 신학생의 일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금식했다. 저녁에는 빵 한 조각을 먹었다.’가슴이 아팠다. 신학교를 졸업하면 중국에서 귀하게 쓰임 받을 목회자가 될 터인데 등록금을 못 내면 퇴학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돌아와 모금을 시작했다. 일 년 등록금이 한국 돈 30만원이니 마음만 먹으면 도울 수 있었다. 기숙사비와 식비를 포함해서 년 일백만원이면 신학생 한명을 도울 수가 있었다. 주님의 은혜로 매년 수십 명을 도울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중국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중국에 뷔페식당이 생기기 시작했다. 늘 배고픔을 느끼는 신학생들을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했다. 중국 신학생들은 음식 가까이에 앉게 하고 한국 사람들은 멀리 앉게 했다. 제한된 2시간 동안만 먹어했다.어떤 학생은 세 번, 다섯 번, 심지어는 일곱 번 먹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이 부끄러워 할까봐 한국 사람들은 멀리 앉게 했다. 그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도왔다. 조금 조금씩 시간이 흐르다보니 수백 명의 목회자들을 돕고 있었다.
주는 자의 기쁨과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는 축복 중국에 가기 전에 사모와 함께 재래시장에서 점퍼, 스웨터, 셔츠를 샀다. 중국목회자들이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 옷이 너무 남루한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싼 옷은 아니지만 수십 벌씩 샀다. 사서 그들에게 입혀줄 것을 생각하면 우리 부부는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맞다. 중국교회를 방문해 목회자들을 만나서 조용한 곳으로 그들을 불렀다. 옷을 입혀주고 기도해줄 때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했다. 한 번은 그들과 악수를 하는데 손목시계를 찬 목회자 보기가 힘들었다. 시계가 있으면 예배시간을 준비하고 그 외의 시간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꼭 필요했다. 우리 교회 집사님 남편이 을지로에서 시계 총판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싸게 많이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한 개당 만원에 준다고 해서 수십 개씩 사서 중국에 갔다. 중국 목회자들과 악수할 때 왼쪽손목을 만져봤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채워주고 안아주며 기도해주면 고마워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 후 20여 년이 흘렀다. 2년 전에 그들을 만났다. 청년들이 이제는 중년의 목회자들이 되었다. 말랐던 얼굴에는 제법 살이 붙었다. 중국 목회자들은 그동안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자기들을 자녀처럼 사랑해주었던 우리 부부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기 민족도 아닌 중국 영혼들을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우리가 힘들다고 내 민족 구원하는데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참고 견디고 목회하였다고 했다. 한 목회자는 성경의 본받을 만한 인물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 부부의 실제 사역하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롤모델로 본받으려고 애썼다고 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비자 없이도 올 수 있는 제주도 선교 오늘도 이불보를 세탁해서 다리미질 하고 있다. 손님들이 왔다 갔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우리 부부가 사는 펜션에서 함께 머물며 제주도에서의 중국인 선교에 대해 함께 나눈다. 그분들이 가고 나면 청소와 빨래를 한다. 주님께서 독일에서 시작한 섬김, 나눔, 희생의 삶을 한국에서도 살아가라고 하시기에 그저 순종한다. 중국 목회자들은 제주도에서 머물 때 한라산의 울창한 숲을 보면서 감탄하고, 내려가면서 바다를 보며 감격해 한다. 저녁에는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다. 그러면서 영육 간에 회복이 되어 중국으로 돌아가서 목회하는 것을 보았다. 일본에서 선교하는 한국선교사님과 일본 성도님들도 제주도에서 회복되어 돌아간다. 제주도의 관광지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마치 우리가 중국에 와 있는 것 같고 한국 사람이 소수민족인 것 같다. 외국인들에게 전도하기 좋은 곳이다. 제주도에 있는 대학들에 유학 온 중국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선교하기에 참 좋은 곳이 바로 이곳 제주도이다.
나는 손님들과 함께‘생각하는 정원’의 원장님을 만나면서 땅과 나무와 숲, 산과 바다의 맑은 공기가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자연 치유장소라는 말씀을 들었다. 잘 걷지도 못하는 직원들이 서울에서 와 숲속에서 3개월만 일해도 건강해진다는 말을 들었다. 노년에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숲에 살면서 선교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유제주 | 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