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대의 선택 지난 10월 22일 중국공산당 정치국이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의 개최 장소는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만 18대 당 정치보고를 심사하는 것과 당헌 개정 준비 외에는 ‘마오쩌동 사상’을 대대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베이징 고위층의 소식통에 따르면 한 달여 전에 있었던 ‘일본여행 반대’ 시위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극좌세력이 각지에서 하나같이 마오쩌동 동상을 대량으로 세우고, 마오쩌동 구호를 외쳤다. 심지어 적나라하게 ‘보시라이는 인민이다(薄熙來是人民的)’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문혁과 보시라이의 망령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로 베이징 고위층을 크게 경악케 했다. 이 ‘일본여행 반대’ 시위 극좌세력 조직의 기세등등함이 오만방자하여, 베이징 고위층으로서는 문혁의 독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또 다른 ‘보시라이들’이 속출할 것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갖게 했다. 민간이나 관원을 막론하고 태자당과 군인 가운데에서도 마오쩌동이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당국은 정치 경제 영역 가운데 작용하는 마오 사상의 영향력을 단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문화대혁명의 복벽을 피하고, 18대 이후 진행하는 중대한 개혁의 길을 여는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마오 사상 버리기가 단계적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중국공산당의 군대는 마오 사상이 장기적으로 존재하는 견고한 보루가 될 것으로 본다. 마오쩌동의 군사 사상(軍事思想)은 중국해방군(中國解放軍)의 사상을 주도했고, 중국공산당도 군대 내에서 ‘마오 사상은 해방군의 진정한 영혼과 힘의 원천(毛澤東思想是解放軍?正靈魂和力量源泉)’이라고 공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 지휘부에서 마오 사상 버리기를 원칙으로 삼은 것과 더불어 군대 내부에서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번 18대 군사위원회 전환기에 대반전이 이루어진 것은 일반적으로 태자당 출신의 군인 류위엔, 우성리 등의 군사위원들이 승진할 것이 유력했는데, 보시라이 사건의 영향으로 잇달아 파면되어 권좌에서 물러났다. 반면에 지난 군사지역 사령관 판장롱은 쉬치량(許其亮)과 함께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승진했다. 현대 국방 사상계는 장차 팡펑후이(房峰輝), 장여우샤(張又俠), 마샤오티엔(馬曉天), 쑨졘궈(孫建國) 등과 같이 두각을 나타내는 신세대가 이끌어 갈 것이다. 그 중에서 해군, 공군의 지위가 승격되어, 중국공산당의 군대의 미래 개혁 방향이 드러났다.
예상대로라면, 후진타오(胡錦濤)도 십년 전의 장쩌민(江澤民)이 했던 것 같이 군사위원회 주석을 2년간 유임하여 시진핑(習近平)을 새 지도부로 끌어올린 후에, 어느 정도 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18대는 과도기 형세가 이상하게 복잡하다. 인사 투쟁이 격렬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있을 변수를 배제할 수 없다. 전 국가 주석 류샤오치(劉少奇)의 아들 류위앤(劉源)이 태자당 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고, 시진핑과의 관계도 좋아 일찍이 18대 후에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승진이 내정되어 ‘시진핑 계열(習家軍)’의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류위엔은 보시라이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그가 보시라이 사건에 말려들었다는 소문도 있다. 적어도 그의 형들이 장무성(張木生: 중국세무잡지 사장, 부친이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비서)의 참모를 겸하고 있어서 도망가기도 어렵고, 장무성은 일찍이 총칭(重慶)의 대책에서 척결되었다. 류위엔은 장무성과 함께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를 추진하며, 농후한 군국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어 질책을 받았기에 더 의심을 받는다. 그들은 군대의 소장파(少壯派)를 대표하여, 중국공산당의 합법성과 집정 이론(執政理論) 재건을 시도한다. 만일 그들의 이론이 미래 중국의 국가 의식 형태를 이룬다면 누가 안심할 수 있겠는가?
공군 사령관 쉬치량은 16세에 입대하여 일찍이 공군 최우수 조종사로 ‘군인의 신동(軍中神童)’으로 불렸고, 33세에 당시 최연소 조종기장이 되었다. 40세 당시, 공군 최연소 군장이 된 우수인력으로 정치를 잘 알아, 리셴니엔(李先念)의 사위 류야저우(劉亞洲)에게 ‘군사간부 중에 정치를 아는 자(軍事幹部中?政治的人)’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 그는 공군사령관으로서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승진, 정치국 위원의 자리에 오른다면 해방군 역사상 제 일인자가 될 것이다. 쉬치량과 같이 이번에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승격하여 흑마가 된 판장롱도 밑바닥에서부터 성장했다. 재간이 특출 나서 1976년에 연속으로 세 계급 승진하여 연대 지도원으로부터 여단의 수장으로 승진했다. 2004년 판장롱은 지난 군사령관으로 즉위, 현재 해방군 칠대 군 지역 중 자력 최고령의 사령관이다. 그러므로 이 흑마도 그렇게 큰 흑마는 아니다.
마오 사상을 피하는 정치국 9월 28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가 개최되어 18대의 회기 및 보시라이 안건 처리를 선포할 때, 양측 모두 마오 사상을 회피하였다. 보시라이 안건 처리의 무게감도 예상 밖이었다. 베이징 인사의 소식으로는 이는 확실히 근대 좌파의 표현과 관계있는데, 더욱이 그들의 ‘일본여행 반대’ 소동은 보시라이 사태 처리에 엄중하도록 베이징 고위층에게 재촉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알려왔다. 10월 26일 당 기관지 《求是》는 ‘개혁개방 추진을 향해 고군분투하자(奮力把改革開放推向前進)’ 라는 주제의 글을 발표했다. 이것은 18대 직전의 문장으로 정치적 강풍의 신호로 여겨진다. 이 글은 등소평 이론(鄧小平理論)과 3개 대표(三個代表) 중요사상을 견지할 것을 강조하여 18대 이후에 운영될 정치 개혁의 바람을 일으킬 뿐 아니라 마오 사상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글이 측면에서부터 간접적으로 마오 사상을 부정하고, 문혁이 인민 생활수준 저하와 국민의 경제적 빈곤과 붕괴를 조성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1992년 덩샤오핑 남순 강화의 ‘사회주의를 견지하지 않고, 개혁 개방을 하지 않으며, 경제가 발전하지 않고, 인민 생활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가는 한 길만이 있다(不堅持社會主義,不改革開放,不發展經濟,不改善人民生活,只能是死路一條)’는 말을 인용하여 전당에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10월 22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 둘째 날 《인민일보》에는 ‘반드시 실제에 근거한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를 이끌자(須根據實際推動馬克思主義中國化)’는 글이 실렸다. 반면에 마오 사상을 버리자(去毛化)라는 글에서는 ‘마오 사상’을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글은 정치국 회의 둘째 날에 공산당 기관지로 발간되어 사실상 첫날의 회의 정신을 해석하여 전달하려고 만들어 낸 것이다. 글의 부제도 역시 ‘후진타오 동지의 주요 연설 관철 학습’ 이다.
지난 해 홍콩 성립 90주년 대회에서 후진타오는 중요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에 마오 사상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이론의 체계화라는 2대 성과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1년여가 지났을 뿐인데, 당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馬克思主義中國化)’를 논하기는 하지만, 마오 사상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중국공산당 이론 체계 가운데 이미 마오쩌동 사상과 덩샤오핑 사상을 일정거리를 두고 선을 긋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이론 체계화(中國特色社會主義理論體系)라는 것으로 바로 덩샤오핑 이론을 말한다. 그의 3개 대표와 과학 발전관에 마오 사상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선 긋기도 완전한 게 아니다. 중국공산당 이론계에는 일찍이 해석 기준이 있었는데, 덩샤오핑 이론은 4대 기본 원칙을 견지한다는 것과 같이 이미 마오 사상의 정수를 포함했다는 것이다.
베이징 소식통이 가리키는 것은 18대가 당헌을 수정하여 ‘18대가 확립한 중대 이론 관점을 보고하고, 중대 전략의 사상을 당헌에 기재’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중대 이론 관점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가 가장 새로운 성과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이론 체계를 건설한 것이다. 아마도 다시 일일이 3개 대표와 과학 발전관 등 이론을 나열하지 않으면서도 이론을 모호하게 언급하여 마오 사상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확실히 드러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당연히 18대 보고와 당헌은 아직도 ‘마오 사상’이라는 글자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곳에 어떻게 표현하여 전달될지 매우 신중하게 연구할 것이다. 베이징 고위층은 이미 마오 사상을 버리려는 마음이 있지만, 또 사회에 흙탕물을 일으킬까봐 두려운 것이다. 이 몇 년 간 문혁의 적잖은 여독에 놀란 것이 보시라이에게 더해져 충칭을 들볶았으나, 공산당 내부와 민간 도처에 광범위한 급진 좌파의 사상과 마오 숭배 토양이 있다.
중국공산당 혁명 2세대 가운데 마오의 인식과 평가에 대해 엇갈리는 반응이 존재한다. 일부분에서는 문혁에서의 피해나 충격을 받았든 안 받았든 상관없이 마오를 숭배하며, 또 현 체제에서 얼마나 이익을 얻었는지에 상관없이 그들은 여전히 마오 사상을 격찬한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보시라이였던 것이다. 군대 안에는 마오 사상이 더욱 깊게 배어있다. 이전 국가 주석 류샤오치의 아들이며, 현직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 총 병참부 정치부위원 류위엔이 대표적이다. 보시라이나 류위엔이나 그들의 가문은 문혁 중에 모두 깊이 피해를 입었다. 류샤오치가 비판 투쟁으로 최후에 감옥에 갇혀 죽었고, 보시라이의 모친 후밍(胡明)은 잡혀가 죽었다. 지금까지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혁명 2세대 가운데에는 상당 부분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고, 헌법 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혁의 독성을 일소하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전 중국공산당 당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의 장남 후더핑(胡德平)과 천이(陳毅) 원수(元帥)의 아들 천샤오루(陳小魯) 등이 대표적이다. 7, 8월 사이에 베이징에 보시라이 복권 시도를 위해, 보시라이를 가볍게 처리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계속해서 해외 언론에 흘러나갔다. 이 때 천샤오루 등은 8월 29일 18대 당대표에 연대 서명한 공개서한을 보내어 ‘수중에 권력을 소중히 여기고, 이 권력을 책임있게 사용하라’고 요구했는데, 특히 ‘당신들의 노력으로 18대에 사인방 분쇄 이후의 이론 학습토론회와 사천 인민대표대회의 우수한 회의 태도가 발휘되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80년 대회가 마오쩌동을 결산하다 사인방(四人?) 분쇄 이후의 순수 이론학습 토론회는 1989년 1월 개최되었다. 이것은 1차적으로 문혁에 대한 혼란한 국면을 안정시켜 바로 잡은 토론회로, 80년 가을에 개최된 4천만 인민대표 대회는 곧 당시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가 참여한 가운데 마오를 청산하자는 대회였다. 당시 많은 참여자가 마오 사상과 마오 착오 사상을 따로 논술하는 것을 반대했다. ‘문혁 이전 17년은 노선 착오가 없었다.’고 하는 것을 반대했고, 마오의 ‘동림호(同林彪)와 사인방을 구별해 나가라’는 데에 반대했다. 리웨이한(李維漢)은 마오쩌동이 잘못한 10 가지(十大方面)를 열거했고, 후커스(胡克實)는,마오는 ‘한 입으로 두 말한다(出爾反爾)’ 라고 했다. 리뤼에(李銳)는,마오가 ‘변덕을 부린다(?雲覆雨)’고 말했고, 장아이핑(張愛萍)은 마오는 ‘말로는 진시황(言必稱秦始皇)’이라고 했다. 쏭민즈(宋敏之)는 마오는 ‘봉건주의의 기초이며 마르크스주의(封建主義打底,馬列主義?面)의 베일’이다 라고 말했고, 팡이(方毅)는 ‘역사적으로 가장 큰 폭군으로 그를 꼽는다(歷史上最大的暴君要數他)’고 했다. 그리고 샤옌(夏衍)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첨을 좋아했다. 의심 많고 언변이 좋으나 말에 신용이 없었다, 겉으로 부드러우나 속으로 악랄했다(拒諫愛諂,多疑善變,言而無信,綿裏藏針)’ 라고 16자로 마오의 잘못을 요약했다.
그렇지만,덩샤오핑과 천윈(陳雲), 후차오무(胡喬木) 등은 당 내 고위 간부의 주류 의견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다만 마오 사상을 역사문제로 다루어 기록하기를 견지했다. 그래서 덩샤오핑이 1979년 개혁개방을 진행했을 때 마오 사상이 아닌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좌파는 수정주의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덩샤오핑 사람들은 다양하게 심사숙고하여 내놓았지만, 여전히 당내에는 마오 사상이 위패를 차고 있고, 정치 보고서에는 여전히 모사상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인물이 모 계열과 문혁에 대해 아직도 몸소 느끼는 고통이 있다. 1982년 9월 중국공산당 12대 당헌 개정 때 처음 당이 반드시 헌법과 법률의 범위 안에서 활동할 것을 명확히 규정했고, 당이 어떠한 형식의 개인숭배를 금지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언론인들은 ‘이것은 문혁의 악몽에서 걸어 나오는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실패를 교훈으로 미래를 경계하여 만들어낸 집단적인 선택이다. 훗날 이 고통을 말하게 될 것이다.’라고 문장을 지었다. 어쩌면 상처가 아물고 고통을 잊게 될 것이지만, 문혁이 점차적으로 멀어지고 1989년 6·4 민주운동이 진압됨에 따라, 90년대 중국 각지에 마오의 열기와 새로운 지도자 숭배 붐이 일었다. 일 극좌 사조가 중국에서 또다시 일어나 21세기에 들어서 인터넷의 도움으로 발전하고 있다.
2005년 중국공산당 중앙의 결정으로 ‘중앙 마르크스주의 이론 연구와 건설 공정(中央馬克思主義理論?究和建設工程)’이 시행되고, 극좌 세력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저명한 언론인이며 홍콩대학 신문 및 대중 매체 연구 센터의 중국 매체 연구 계획 주임인 첸강(錢鋼)은 후진타오가 마오 파에 대해 장쩌민보다 관용적이고, 시종 선명하게 반좌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후진타오는 줄곧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균형을 시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2009년 60주년 국경절 경축 행사에서 마오 사상 만세의 대열이 출현 했을 때, 이 대열의 본 무대는 ‘분투창업(奮?創業)’이었지만, 국경절 3일 전에 갑자기 ‘마오 사상 만세(毛澤東思想萬歲)’로 바뀌었다. 이것으로부터 좌파 세력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래로, 극좌 세력이 절정에 달한 것이 분명한 것은 보시라이가 총칭에서 강경하게 ‘혁명의식 고취로 범죄 소탕(唱紅打黑)’을 추진한 것이다. 보시라이 사건은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위기를 야기했고,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非改不可)’는 경종을 울렸다. 이즈음 중국 경제도 쇠퇴했고, 사영 기업가는 중국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몸으로 말한다(用?投票)’는 듯이 잇달아 유럽과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있다.
SAIF 아시아(Softbank Asia Infrastructure Fund)의 공동투자자이며 창업자로 알려진 옌옌(閻炎)은 ‘개혁이 과거 십년 동안 심지어 과거 5년은 기본적으로 정체되었고, 쉽게 바꿀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은 모두 다 바뀌었다. 계속이어서 제도적인 면에서도 움직여야한다’고 말했다. 과거 정치 개혁에서 귀머거리 소경인양 관망했던 것에 비하면 요즘 고위층이 정치 개혁에 대한 태도는 거의 180도로 바뀌었다. 최근의 여론의 흐름을 보면 베이징 고위층의 정치를 개혁하려는 마음은 매우 절박한 것 같다. 베이징 평론가 지아지아(賈?) 씨는 정치 개혁을 원한다면 ‘마오 사상 버리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첫 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며, 지금이 바로 마오 사상 버리기의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출처 | 亞洲週刊二十六卷四十四期 (2012年 11月 4日) 번역 | 이기쁨·자원봉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