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충격 속에서 살아남기 1997년 3월 1일,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 살았던 모든 흔적들을 정리하고 C국으로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선교사는 한 번 선교지에 들어가면 종신토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든 고국이지만 미련을 남겨두지 않았다. 기념될만한 사진첩 정도를 부모님 댁에 남겨두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식구수대로 이민가방과 케리어를 끌고 등에는 가방을 메고 들어갔다. 선교지에서 살 집을 구했다. 회벽에 시멘트 바닥인 집이어서 당장 장판 집에 가서 비닐장판을 사다가 깔고 새 살림을 시작했다. 현지에 도착한지 3일 째 되던 날, 남편은 수염이 길었다며 이발소에 가서 면도를 하고 싶다고 했다. 미용실에서 이발도 했기 때문에 집 근처 미용실에 면도를 하러갔다. 나는 과일을 사 가지고 남편과 함께 집으로 오려고 미용실에 들렀는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편의 턱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미용사는 쩔쩔매며 성냥갑의 화약종이를 떼 내어 붙여놓고 있었다. 이렇게 선교지에서의 신고식을 치르면서 소명에 의한 삶을 시작했다.
아직 현지어가 잘 안 되었을 때였다. 사춘기인 아이들이 한국에서 가져간 조그만 거울을 보며 치장을 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거울을 달아 주기로 했다. 거울가게에 가서 거울을 달아 달라고 보디랭귀지로 짧은 단어로 말했더니 거울가게 주인은 몇 식구냐고 묻는다. 다섯 식구라고 했더니 식구 수에 맞는 거울을 달아준다고 벽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형 거울을 달아 놓았다. 덕분에 춤추기를 좋아하는 막내딸은 전신이 비치는 거울 앞에서 틈만 나면 무용을 하곤 했다. 그런데 커튼을 다는 일은 더 많은 언어와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6개월 후에야 커튼을 달았다. 그동안은 유리창에 신문을 발라놓고 살 수 밖에 없었는데, 부끄러움을 타는 딸아이들이 밖에서 보일 것 같아서 옷을 갈아입을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힘들어 했던 일은 화장실을 사용하는 일이었다. 양변기 문화에서 자라던 아이들은 학교 화장실 사용을 힘들어 했다. 화장실 칸막이는커녕 문도 없이 다 보이는 곳에서 배변을 하지 못해서 매 번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첫 해에는 에어컨이 없이 여름을 나게 되었는데, 5월 달에 35도를 웃돌더니 한 여름엔 40도를 넘었다. 방안 온도가 32-3도로 올라가면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막내 딸 아이는 더위를 이겨 보려고 수영복을 입고 욕조에 물을 받아 빨래판을 걸쳐놓고 그 위에 책을 놓고 읽곤 했다. 이렇게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언어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두 딸아이는 둘이서 한국에서 보던 음악책을 보면서 아는 노래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부르곤 했다. 고국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았던 일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새로운 언어로 공부하는 일이 무척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가족은 가정예배와 큐티를 통해서 힘을 얻고 영적 전투를 할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사역의 열매를 주신 하나님 첫 사역지인 H시에서 남편은 대학교 한국어 교수 비자를 받고 사역을 시작했다. 남편이 현지 대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동안 나는 대학에 가서 언어를 배웠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현지 언어가 익숙해졌고, 현지 대학생들은 한국어가 익숙해졌다. 가끔 놀러오는 대학생들은 벨을 누르고 “김 선생님 계십니까. 저는 000입니다.” 라고 찾아왔다. 그럴 때면 우리가 한국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한국말을 하면서 찾아오는 학생이 있으니 말이다. H지역에서 2년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열매들을 많이 주셨다. 남편은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관계를 맺고 나는 밥을 해 먹이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갔다. 많은 현지 대학생, 교수, 우유배달원, 미장원아가씨, 집주인을 전도했고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다. 약 6개월 동안 40여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 때 세워진 믿음의 공동체는 우리가 다른 사정으로 H지역을 떠나 N지역으로 이동했어도 계속 모임을 가졌다. 미션 홈을 월세로 얻어 매 주 남편과 함께 성경을 가르치러 갔다.
N지역에서는 학생비자로 주로 거주하였다. N지역에서는 한글주말학교를 세워서 남편은 교장으로 나는 교감으로 베이스를 가지고 주말이면 H지역으로 가서 제자양성을 하였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N 지역에 그곳에 있는 동포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라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현지인 제자를 매주 훈련해서 그에게 설교를 맡겨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때 신학생이던 제자는 이제 목사가 되어 올 봄에 한국을 다녀갔다. 10년만의 해후였다. H지역에서 주로 했던 것은 대학생 사역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졸업 후 각 곳으로 흩어졌다. 또 유학을 떠난 제자들도 꽤 있었다. 미국, 일본, 한국. 스웨덴 등지로 떠나갔다.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독교인을 세우는데 목표를 두고 사역했다. 때문에 국내에 남은 제자들은 기독인 교수, 의사, 선생님, 회사원, 은행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부부는 막내딸까지 대학을 진학 하고 선교지를 떠나면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새로운 지역으로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막내가 한동대학으로 입학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두 달여 동안 기도하면서 새로운 사역지로 인도함을 받았다. C국의 남단에 위치한 G 지역이었다. 그곳에 상주하며 사역하는 선교사가 없다는 정보를 듣고 우리 부부는 답사를 갔다. 경제특구인 이곳에 열 개가 넘는 대학교가 들어와 있었고, 사역자는 없으니 우리가 가야할 곳이라고 결정을 하였다. 북 열대 지역이어서 몹시 더웠지만 바다가 있어서 공기는 맑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N시에 살면서 기관지에 문제가 생겨 변성이 되어버렸던 목소리가 제 목소리로 돌아왔다. 공기만 맑아도 자연치유가 일어난 것이다. 이곳이 나의의 사역의 마지막 장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사역을 시작하였다. 대학생 사역, 교회사역, 현지인 선교훈련센터를 세우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인 C국에서 사역하는 선교 동역자들이 일 년에 한차례 씩 와서 쉬고 충전할 수 있는 선교사 휴양원을 만들어 섬기는 꿈을 꾸었다. 그렇게 하면 굳이 귀국하지 않아도 같은 나라이면서 자신의 사역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쉬고 재충전을 하기 때문에 사역의 효과를 더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행단계에서 우선 대학에 들어가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대학생들을 만났다. 한편으로는 많지 않지만 주재원으로 와 있는 한국인들을 위한 한인교회와 주말한글학교 사역도 시작했다.
하나님의 하프타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2007년 4월은 큰 딸 아이가 5월 26일 결혼날짜를 받아놓고 부모님과 결혼 전에 마지막 시간을 보내겠다고 들어와 있었다. 필자는 대학생 그룹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공안부와 종교국 사람들에 의해 연행되었고, 밤 12시가 넘도록 취조를 당하고 한 달도 채 안되어서 비자제한을 받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성경을 배우던 학생 가운데 누군가가 내통했으리라는 생각은 분명했지만 알아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성경을 배우던 제자들이 전화를 해 와도 전화를 하지 말도록 부탁하고 받지도 않았다. 나 혼자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 한 대학교에서 선택과목으로 한국어를 맡아 강의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던 한국어 강의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세밀하신 하나님께서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에 나가는 것으로 현지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하셨다. 교인들은 눈물로 전송을 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영락교회의 선교관 한 칸을 얻어놓고 딸의 결혼준비를 하였다. 나는 가지고 있는 돈이 전무 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딸의 결혼준비를 하게 하셨다. 한동대학교에서 만난 사위와 딸은 둘 다 선교사의 자녀로서 재정적인 어떤 도움도 부모로부터 받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결혼에 복을 주셨다. 딸의 혼수로 이불을 사 주지 못해서 나는 안타까움에 새벽기도에 나가 애통하며 울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두 천사를 보내 주셨다. 영락교회 권사님들인 그 분들은 가지 않겠다는 나를 다짜고짜 차에 태우더니 이불 집으로 데리고 가서 딸이 사용할 사계절 이불과 손님용 이불, 방석과 앞치마, 심지어 아가이불세트까지 세심하게 준비해 주셨다. 이처럼 가나안의 혼인잔치가 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딸의 결혼 과정은 순적하게 이루어졌고 결혼식 당일 결혼예배 또한 너무도 아름답고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신 결혼식이었다.
큰 딸을 결혼시킨 후에 나는 명성교회 선교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보통 선교관은 한 달 이상 사용할 수 없게 규정되어 있다. 나의 선교협력교회인 명성교회 선교관도 3개월 이상은 허용이 되지 않았지만, 필자는 은혜를 입어서 일 년 반 정도를 머물 수 있었고 후에 장신대의 기숙사로 들어갔다. 한국에서 나는 혼자 살아가야 했다. 남편은 개척한 교회를 돌보기 위해 선교지에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딸의 결혼을 기념하며 출판했던 필자의 저서인 《세 개의 보석》을 불러주는 교회에 다니며 설교나 간증을 하고 책을 팔아 생활했다. 때로는 선교대회에 가지고 가서 팔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한 다른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2008년 봄, 하나님께서는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M. div 과정을 공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공부하느라 바쁜 나머지 추방의 아픔도 잊을 수 있었다. 내가 귀국한지 일 년 후 남편도 후임자를 선교지의 교회에 보내고 한국으로 왔다. 그동안 한국에는 선교적인 여러 변화가 있었다. 특히 중국인유학생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었다. 선교 사역자들의 선교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남편은 한국에 있는 동안 중국인유학생 사역을 하기로 결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자녀들이 살고 있는 대구도 생각해 보고 대전도 놓고 기도했지만 결국 우리의 고향이기도 한 청주로 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나바 훈련원에서 청주지역에 와서 중국인유학생 사역을 할 사역자를 놓고 기도하고 있던 중에 남편인 김 선교사가 청주로 가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청주대학교에서 자비량으로 일 년 정도 사역하였을 때 남편의 모교인 충북대학교의 기독교수회 회장으로부터 초청이 왔다. 모교에 와서 이곳에 와 있는 중국인유학생들을 사역하고 기독교수회 지도목사로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M. div 과정을 2011년 2월에 졸업했지만 학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신학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면서 인텐시브 과정으로 시작하였던 미국 인디아나주에 있는 그레이스신학교(Grace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선교학 박사과정(D. Miss)을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일 년 반 정도를 집중하면서 논문을 써내고 지난 5월 19일 미국으로 가서 졸업식에 참여하였다. 조금 긴 하프타임을 보내는 동안 두 개의 학위 과정을 마치고 나니 5년이 되었다. 비자제한이 당연히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 비자만 나왔다.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이제 필자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결정을 기다린다. 이제 80이 넘으신 연로하신 시어머님도 모셔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지난달에도 화장실에서 넘어지시면서 다리가 골절되어 수술을 하셔서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서너 주를 꼬박 병원에서 간병을 하며 보냈다. 내게 주어진 여러 상황들이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계획표는 오차 없이 진행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평안을 찾으려 하고 있다.
새로운 비전과 도전 필자의 선교학 박사 논문 제목은 ‘한국교회 담임목사의 중국 유학생에 대한 선교의식 조사연구’이다. 그리고 부제는?국내 중국 유학생 선교패러다임을 중심으로-이다. 논문을 쓰면서 선교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의 일에는 차질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필자 부부의 사역대상이던 대학생들이 한국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선교지의 정치적인 이유와 사상적인 차이로 인해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유학생 국내 유입이라는 문을 여시고 복음을 들을 사람들을 한국으로 보내고 계시는 것이다. 비단 한국뿐이 아니다. 일본에도 유럽에도 미국에도 전 세계에 중국인 유학생은 넘쳐나는 것이다. 어떤 사역자는 지금이 ‘중국인유학생 선교 황금시대’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이는 해외유학생 선교 사역을 ‘문밖의 세계’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국내에 와 있는 중국인유학생만이 우리의 선교대상은 아니다. 중국선교를 통하여 ‘선교중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전체적인 선교의 그림과 비전을 따른다면 현지선교는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계속해서 선교사는 선교지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내에서도 타문화권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회를 열어주고 있으시다는 것이다. 우리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블루오션 선교전략을 깨닫고 순종하기만 한다면 사역의 열매는 도처에서 맺힌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필자의 정체성은 해외선교사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선교지에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처럼 안식년도 없이 10년을 사역하고 주신 긴 안식년 이었지만 나그네의 마음으로 살았다. 왜냐하면 이 땅은 선교지의 비자제한만 풀리면 곧 내가 떠나야 할 땅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비자가 풀리지 않게 되자, 나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엎드려 묻고 또 물으며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나의 선교지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 시간이 10년 후가 되더라도 나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나를 중국선교사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그 땅에 이루이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를 위해서 열심히 신학과 선교학 공부에 헌신했는데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시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다. 선교사역의 경험으로, 학문으로 나를 준비시킨 하나님께서 나에게 합당한 사역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기에 감사하고 있다.
나은혜 | 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