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薄熙來)가 실각된 것은 왕리쥔(王立軍)이 중앙지도자들의 행적과 대화를 도청하여 중앙 정부를 진노케 한 것과 관련이 있다. 중앙지도자 시진핑(習近平), 허궈창(賀國強), 리위앤차오(李源潮), 우방궈(吳邦國) 등이 총칭(重慶)을 방문한 기간에 왕리쥔은 이들을 도청하도록 계획했다. 또 왕리쥔은 중앙경위국(中央警衛局)과의 신분관계를 맺어 총칭이 중난하이(中南海) 지도자들의 행적과 사생활도 장악하게 했다. 갑자기 따뜻해지고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처럼, 정계에도 이상 징후가 보였다. 총칭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 왕리쥔은 야밤에 청두(成都)의 미총영사관에 진입하여 하루를 체류한 뒤 국가안전부 고관에 의해 북경으로 끌려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 일이 온 국민의 주목을 받는 정치사건으로 번졌다.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大)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정협) 이 두 대회가 막 끝난 후 총칭시위원회 서기 보시라이가 직무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는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인민대표대회까지 반년 남짓 남은 시점이었다. 정치국상무위원회에 들어가기를 호시탐탐 노리던 보시라이가 갑자기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천하가 어지럽기 전에 촉이 먼저 혼란하다(天下未亂蜀先亂)’고 말을 하는데, 이 일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중난하이에서 정계에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보왕사건(薄王事件)’을 1989년 6.4사건 이후 ‘20년만에 중국 최대의 정치적 충격(中國近二十年來最大的政治震盪)’ 이라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은 ‘보왕사건’을 2012년판 린뱌오(林彪)의 ‘9.13사건(九一三事件)’으로 비유하는데, 1971년 마오쩌동(毛澤東) 승계자이던 ‘부통수(副統帥)’ 린뱌오의 ‘링리중앙(?立中央)’ 실패로, 린뱌오가 비행기를 타고 북쪽으로 도주하다가 몽골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의 막을 내리게 한 직접적 사건이었다. 왕리쥔이 비밀리에 미 총영사관에 진입하고, 보시라이가 중난하이의 최고 자리를 노리 것은 결국 헛된 꿈(一枕黃粱)이 되었고, 그가 몇 년 간 소요를 일으킨 극좌파노선은 억압되었다. 안개 산악 도시인 총칭은 ‘문화혁명식 홍도(文革式紅都)’로 비춰지게 되었고 붉은 안개장막은 내려지게 되었다.
보시라이는 2007년 10월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되었고, 2개월 후 총칭시 서기로 연달아 임명되어 총칭정국을 4년 넘게 운영하였다. 기세등등해진 그는 주로 삼인조직(三人團隊)에 의지하였는데 바로 왕리쥔, 황치판(黃奇帆), 쉬밍(徐鳴)이었다. 총칭 사람들은 보시라이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문(文)에는 쉬밍, 무(武)에는 왕리쥔, 경제에는 황치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들을 종종 한다. 부시장 왕리쥔은, 강력한 방법을 동원하여 암흑가의 범죄 세력 집단을 소탕한 사람이었고, 랴오닝(遼寧) 공안계통에서 24년간 있을 때, 당시 랴오닝 성장을 맡은 보시라이가 왕리쥔을 특별히 눈여겨보고, 보시라이가 총칭에서 임직했던 반년 사이 왕리쥔을 총칭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황치판은 경제발전의 선두자로, 장기간 상해(上海)에서 재직을 하였으며, 시위원회와 시정부 부비서장, 시경제위원회 주임을 역임하였다. 그는 관리사회에서 더 이상 상승하지 못하고 그다지 뜻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 않다가, 총칭에 이르러 비로소 명성을 떨친 것으로 보인다. 쉬밍은 시위원회 비서장으로, 상무부를 역임했고 역시 상무부 부장인 보시라이가 총칭으로 부임했을 때, 총칭창홍《重慶唱紅(中?語版)》은 쉬밍이 혼자 막후에서 꾸민 것이다. 한 소식통에 의하면, 중난하이 고위층이 격분하며 총칭사건에 대해 행동을 취하게 한 것은, 총칭당국이 중앙 지도자들의 행적과 사적인 대화를 도청한 것이라고 한다. 중앙 지도자인 시진핑, 허궈창, 리위앤차오, 우방궈 등 총칭에서 검사, 조사하던 기간 동안, 왕리쥔이 감청, 도청을 계획한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 주요 내용을 알아내어, 보시라이에게 알려 주었다. 왕리쥔은 ‘타흑(打黑: 암흑세력, 부정부패를 타도하자는 구호) 영웅’을 부르짖는 중 감청했고, 또 왕리쥔이 임의로 감청 범위를 확대한 것을 알면서도 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놀랄 일은 ‘타흑영웅’이 오히려 중앙경위국과의 관계를 이용해, 사적으로 중앙의 주요 지도자들의 행적과 개인비밀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9인 상무위원(구상위)의 보시라이 사퇴 요구 일치 3월 13일 오전, 전국정협 11회 5차 회의가 폐막했다. 보시라이는 폐막식에 출석했고 주석단에 앉았다. 이날 오후, 구상위는 중국공산당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석상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보시라이 동지는 총칭시 시위원회 서기와 상무위원의 위원 직무를 더 이상 겸하지 않는다.” 14일 오전, 제11회 전국인민 대표대회 5차 회의 폐막식상에서, 보시라이는 주석단인 첫째 열에 앉아, 좌측의 군사위원회 부주석 쉬차이허우(徐才厚)와 웃고 말하며 표정이 밝았다. 정오에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장장 3시간의 기자회견에서 처음으로 ‘왕리쥔사건’을 공개적으로 논하며 총칭사건을 반성을 요구했다. 그는 연이어 “여기서 몇 마디 더 하겠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는 “중국공산당 11회 삼중전회, 특별히 중앙정부는 건국 이래 당(黨)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아래 해방사상(解放思想)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노선(思想路線) 및 당의 기본노선(基本路線)을 확립하고 또한 개혁개방이 중국의 운명과 미래에 중대한 선택을 결정한다는 것에 결론을 내렸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날 오후, 중앙정부는 각 성, 시, 자치구 주요 지도자 상부회의를 열어 보시라이 면직에 대한 중대 결정을 선포했다. 15일 오전 9시, 후난성(湖南省) 공식 사이트를 통해 중국공산당중앙의 결정을 먼저 발표했다. 9시 17분, 중앙 대변인은 정부의 공식 블로그를 통해 곧 중대한 소식을 발표한다고 밝혔다. 10시, 신화사(新華社)는 원고 발송 허락을 받았는데, 부호를 포함하지 않은 46자였다. “중국공산당중앙은 장더장(張德江) 동지가 총칭시위원회위원, 상무위원, 서기를 겸임하기로 결정한다. 보시라이 동지는 이제는 더 이상 총칭시위원회 서기, 상무위원, 위원 직무를 겸임하지 않는다.” 한마디 한마디 묵직하고도 짧은 이 소식은 즉시 주요 신문과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 뉴스가 되었다. 보시라이는, 왕리쥔사건은 왕리쥔이 단독으로 행한 사건이고, 총칭광대(重慶廣大) 공안간부와 경찰들은 훌륭하며, 왕리쥔사건을 확대시킬 필요 없고, 왕리쥔사건 때문에 다른 광대공안 간부와 경찰들의 수고를 말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암흑 세력을 몰아내는데 그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고, 이것이 몇 사람들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어, 이에 대해 다른 관점과 생각들이 있을 수 있고, 게다가 이미 암흑집단의 이런 사람과 사회의 연결이 형성된 것은 아주 광범위하고, 이 세력들은 여론을 형성할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암흑세력을 몰아내는 것은, 바로 이것이 옛사람들이 말하는 악귀와 대항하고 패왕에게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정신이다. 우리는 이 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베이징(北京)의 저명한 시사평론가 차오징항(曹景行)은 “개혁의 핵심은 권력의 감독에 대한 제도를 완벽하게 하는 것과 권력(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남용을 막는데 있다. 권력은 본래 개혁의 주요 추진력이기도 하나, 역시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기도 하다. 보시라이는 총칭에서 제후할거(諸侯割據)가 아니고 중국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그와 같이, 권력을 남용하는 관원이 적은 수가 아니면 몇 명의 원 총리가 더 있어도 소용없으며, 진정 결핍된 것은 권력을 감독하는 효력 있는 제도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지난 3월 15일은 전국 위조품 제조 단속일이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날 보시라이의 정치생명이 끝났다. 어떤 학자는 말하길, 그가 총칭을 발전시킨 때 제창한 ‘창홍타흑(唱紅打黑: 공산주의 이념을 노래하고 부패를 척결한다)’이 실제로는 대중(영합)주의의 깃발을 앞세우고 ‘문혁(文革)’의 방식으로 사회동원을 전개하고, 법률을 위배하고 법치구조를 멀리하며, 최후에는 공권력의 회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공산당 제18회 인민대표대회가 다가오고 중국공산당 지도자 최고층 정치국의 자리다툼이 결정적인 시점에 다다랐다. 어느 학자는 가장 바쁜 사람으로 보시라이를 꼽았고, 혹자는 그를 ‘홍색귀족(紅色貴族)’ 이라 보고, 혹자는 그를 ‘신예태자당(新銳太子黨)’ 이라 부른다. 그는 총칭에서 4년 넘게 통치하며, ‘창홍타흑’, ‘호적개혁(戶籍改革)’, ‘빈부균등(均貧富)’을 이끌고, ‘케이크론(蛋?論)’을 부르짖고, ‘5대서기(五大書記)’ 동상으로 마오쩌동 정치노선으로 돌아가기를 높이 부르짖었었다.
중앙정부와 일치 유지 ‘중앙정부와의 일치를 유지하기’는 근래 중국공산당 정계의 핫이슈가 되었다. 3월 19일《해방군보(解放軍報)》는 “사상정치 건설을 최우선으로 이끌어간다” 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사설에서 “올해는 당과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해이다. 제18회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곧 개막하게 된다.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듯 매번 당과 국가가 큰일에 직면할 때는, 국내외 적대세력이 반드시 기회를 틈타 소동을 일으키고, 사회에는 여러 가지 소음과 잡음이 확연히 많아지고 사람들의 생각은 더 복잡해진다.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더 의식 상태를 점검하고, 더욱 사상정치 건설을 강화해야 한다. 오직 사상정치 건설을 조금의 흔들림 없이 각 건설 항목 중 최우선으로 하고 ‘군대비당화, 비정치화(軍隊非黨化,非政治化)’, 및 ‘군대국가화(軍隊國家化) ’등의 잘못된 관념을 결단코 억제하고 항시 당의 군에 대한 절대영도 지지를 최고의 정치원칙으로 하고, 최고 정치 요구의 실현, 최고 정치 규율 준수를 항상 견지함으로써 비로소 당이 사상적, 정치적, 조직적으로 견고히 부대를 장악하는 것을 확립할 수 있고, 부대의 모든 행동이 중앙과 중앙군위(中央軍委) 및 후(胡) 주석의 지휘에 복종함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총칭 각 주요 관원들의 연이은 태도 표명 보시라이가 사퇴하던 그날 총칭 위성 TV는 이미 ‘중앙정부 와의 의견 일치(與中央保持一致)’를 선포했다. 이 방송국은 과거 2년 동안 보시라이의 집념 아래 ‘광고하지 않는 방송국'으로 유명한데 그날 밤 바로 블로그를 개설하고, 상업광고를 기다렸다는 듯 화면에 띄우기 시작했다. 차이밍자오(蔡名照) 중앙선전부 부장은, 총칭에 주둔하며 직접 총칭 매스 미디어를 감독했다. 16일《총칭일보(重慶日報)》에는 매일 지면에 등장하던 ‘5개 총칭(五個重慶)’, ‘축차공부(縮差共富: 차이를 줄이고 함께 부유하다)’ 등의 구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민생(民生)’ 등의 판명(版名: 지면 이름)이 그 지면을 대신했다. 조간, 상보(商報), 석간, 시보 등도 거의 제1면을 이용하여 직할시민들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통고(通告)하며, 신문 지면에 ‘총칭은 자발적으로 중앙정부와 의견의 일치를 고수한다.’는 총칭시 각부 주요 관원들의 각종 회의상의 입장을 표명했다.
‘토마토모델(西紅柿模式)’ 이라 불리던 보시라이 주도하의 ‘총칭모델(重慶模式)’, ‘총칭경험重慶經驗)’, ‘총칭탐색(重慶探索)’이 다시 한 번 사회의 대 토론을 야기했다. 작가 얜례산(?烈山)은 “보시라이가 총칭에서 한 방법은 시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 문제의 병의 근원은 알아냈지만, 처방약을 잘못 내린 것과 같다” 라고 하고 있다. 민의가 공평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보시라이가 일개 ‘정객(政客)’으로서 취한 수법은 ‘정의롭지 않은 것(不正義的)’이다. 예를 들어 법제를 짓밟는 것, ‘타흑’(암흑을 타도하자)이 ‘흑타(黑打: 암흑이 타도한다)’로 변했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창홍(唱紅: 마오쩌둥의 혁명가를 부르다)’도 그렇다. 어느 학자는 “창홍타흑은 극단적인 집권 통치문화의 복벽(復辟: 물러났던 왕이 다시 정권에 오르는 것)이다. 즉 내부 집권세력은 규칙을 따르지 않고 타흑이 개인 집권 행위로 변하고, 법제와 이성을 상실하고, 사회체제 붕괴와 소멸을 초래했다. 또한 혁명을 찬양하며 복고 깃발을 높이 들고, 극도의 개인주의를 선양하고, 결국에는 개인영웅주의를 다시 초래하고 사회민주진보를 짓밟는 것이다. 보시라이 방식의 혁명은 옛날의 문화혁명을 다시 초래하는 것만큼 위협적인 것이다. 보시라이가 직분을 내려놓게 된 것은 적어도 정국은 깨끗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고 말했다.
역시 적지 않은 네티즌들도 ‘총칭스타일’이 팽배해 있을 때 전국이 ‘총칭스타일’에 휩쓸려 총칭을 따라 도처에서 홍가(紅歌)를 부르고 타흑의 방식으로 기업가를 정리하고, 부자를 죽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않고, 또 그 해로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이민을 떠나게 만든다면 과연 누가 보시라이에게 관용을 베풀겠는가? 라고 생각한다. 한 헌정국가(憲政國家)에서 어떤 색깔의 노래를 부르든지, 암흑사회를 타격하든지 말든지 본래는 아무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총칭에서 ‘창홍타흑’은 이미 노래와 치안의 범주를 넘어서 모종의 정치조종의 색깔을 갖고 있다. 지금 총칭에는, 인민대강당 광장의 스피커에서 오랫동안 들리지 않던 ‘홍가가 아닌 노래’가 흥겹게 흘러나오고 있다. 많은 네티즌들은 “언덕을 오르고 고개를 넘으며 고통과 어려움을 인내하던 총칭인들이여, 여러분들은 이 오래된 산성을 더욱 아름답게 변하도록 할 것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출처/ 亚洲周刊第二十六卷十三期(2012年 4月 1日) 번역 | 황광희·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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