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교회로 다가감 중국 산동(山東)사람들, 그들이 낯선 땅 한국에 와서 사는 동안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중국인이라는 긍지를 지킬 수 있게 한 것은 물질이었다. 그들이 볼 때는 그랬다. 또 그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 역시 물질이었다. 나는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2세대 한국화교로 성장했다. 특히 손님이 많은 주일에 가게 문을 닫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도하는 것은 더 쉽지 않았다.
이런 현실적 어려움으로 그 당시 화교교회의 성도 수는 잘 늘지 않았고, 목회자들이 여러모로 힘들어 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게 세례를 베푸셨던 전야곱(田雅各) 목사님은 대만에서 사모님과 4명의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오셨다. 부임 초기에는 같은 중국인이어도 산동사람들을 잘 이해하실 수 없었다. 또 대만에서 생활하다 온 아들들도 산동 방언을 알아듣지 못해서 힘들어 했다. 몇 해 동안 눈물의 기도와 섬김으로 교회는 많이 성장했다. 후에 이곳의 사역지를 떠나실 때 환송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전야곱 목사님의 섬김에 버금가는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신 또 한 분의 목사님을 기억한다. 그분 역시 한국화교 출신의 류요원(柳耀遠) 목사님이시다. 그분은 나의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시기도 했다.
추억의 사진, 산 위의 화교교회 내가 태어난 울산에는 화교 중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에 있는 화교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헤어져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학교 교육과정과 더불어 외로움이라는 것을 타게 되고,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도 학습하게 된 같다. 어느 주말, 울산 집에 가지 않고 기숙사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선배 언니가 내게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자고 청했다. 사실 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반에 교회 목사님 아들인 친구를 몰래 좋아했기 때문에 만나볼 겸 따라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려고 목사님의 아들을 잠깐 짝사랑하게 하신 것 같다. 주님은 참 유머를 아신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 세례도 받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되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한국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우리 부모님을 비롯해 생계를 위해 중국식당을 할 수밖에 없었던 화교들을 정책적으로 힘들게 하고 어려움을 주었다. 그러한 한국을 용서하며 마음에 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인정하기 싫은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다. 원망 대신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으로 가지 않는 주말에는 기숙사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산 위에 있는 화교교회로 달려갔다. 우리는 교회가 산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산상교회(山上敎會)라고 불렀다. 교회는 학교가 위치한 부산역 주변보다 더 거룩한 곳이고, 지친 영혼이 조용히 쉬고 갈 수 있는 수도원 같은 곳이었다. 산 위에 있는 교회는 공기도 좋고 나무숲도 울창하고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 교회는 학교수업을 마치면 날마다 달려가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부산 화교교회가 중국선교센터를 건축해서 본격적으로 한국교회에 있는 중국선교 헌신자들을 위한 훈련원을 개설하게 되었다. 그 일에 몇 분의 한국인 목사님도 함께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 내가 아는 분은 유신우(劉信優) 목사님인데 그분은 초창기 때 대만에서 오랫동안 선교하셨던 유환준(劉煥俊) 선교사님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 여동생인 유중숙(劉中淑) 자매는 대만에서 대학 시절을 보낼 때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렇듯 중국선교에 관심 있고 중국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중국을 향한 다리’인 우리 화교교회도 동일하게 사랑하고 섬겼다.
중국교회와 한국교회의 다리 역할을 소망하다 이 작은 글을 통해 꼭 소개하고 싶은 또 하나의 화교교회가 있다. 그 교회는 바로 부산 서면에서 창립을 했던 한중교회(韓中敎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후로 중고등학교 시기까지는 초량 화교교회(山上敎會)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 교회의 어른들과 젊은 전도사님이 교회 일로 심하게 다투어서 교회가 분열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을 목격했다. 그때 나는 전도사님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그분이 부산 서면에서 한중교회를 세우셨다. 그분은 강다윗(姜大衛) 목사님이시고 역시 한국화교시다. 또 한 분은 지금까지도 강 목사님을 도와 한중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황용영 전도사님이시다.
그 시절, 한국의 여러 대학교에서는 중문학과 개설이 유행처럼 번져갔다. 그래서 우리교회에는 중국어를 배우고 싶은 청년들과 중문학과 학생들이 참 많았다. 내가 지금 중국어문선교회에서 중국교회와 한국교회의 다리 역할의 비전을 받은 것도 강 목사님의 영향이 켰다. 중국선교전문 잡지인「중국을주께로」에서 사역중국어에 관한 자료들을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도 그 시절 한중교회 강대상에서 목사님이 나를 통역자와 번역자로 세워주시고 훈련시켜 주신 덕분이다. 자주는 못 뵙지만 그분께 늘 감사하고 있다. 한중교회에서 청년들은 중국인의 문화와 생각, 생활 방식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다. 그들이 한중교회에서 섬겼던 시간들은 훗날 중국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기에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학생들 중에 선교사와 사역자 그리고 목회자가 된 사람도 꽤 많이 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작은 제안 한국에 있는 화교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중국선교를 앞 다투어서 하려고 하는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정작 우리 화교교회에게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마음이 더 아프다. 중국선교 헌신자들이 파송을 받고 중국 현지에 가서 받을 문화충격과 겪어야 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정동, 영등포, 인천, 수원, 군산 ,대전, 대구, 부산 화교교회에서 먼저 섬김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비록 화교교회에 있는 산동사람들이 모든 중국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지만, 중국인의 성격, 생각, 문화, 생활방식 등을 배우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 중국복음선교회를 통해 수많은 중국선교 헌신자들이 한성교회 영등포교회의 유전명, 유소충 목사님의 도움을 받고 대만의 중화복음신학교, 성광신학교, 침례교단신학교에 입학해서 신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과 대만에서 또는 제 3국에서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앞으로의 선교사역에서는 무엇보다 협력과 연합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함께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나눌 때 우리 모두의 꿈- 선교중국의 목표-을 좀 더 빨리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이’를 넘어서 나는 30대에 중국어문선교회에서 섬김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때도 한국과 중국의 문화차이로 인해 많이 힘들어 했다. 50대의 ‘골드미스’가 되어 버린 지금도 중국인과 한국인의 문화 차이를 경험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내 사역명도 ‘차이나’ 라고 지었다. 나는 우리 선교회 사역자 중에서 유일한 중국인이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 만에 금방 갈 수 있는 중국이지만 한국과 중국은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 역시 문화와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 사역자들과 아직도 협력을 잘 하지 못해서 늘 부끄러울 뿐이다. 동역자들의 중보기도가 많이 필요한 연약한 사역자이다. 부끄러운 모습대로 서로를 인정하고 한국교회와 화교교회는 동역해 나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직 사랑과 겸손, 오래 참음으로 환상의 콤비를 이룰 수 있다. 나는 오늘도 화교교회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이 한국 땅에 온 목적을 온전히 이루고 우리의 존재가치를 발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화교교회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한다.
차이나 | 간사 · 국제협력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