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C19241.JPG) 목회자의 눈물 교회 목회자들과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오늘날 대부분의 중국교회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목회자나 사역자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목회자나 사역자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영적인 것이고 십자가를 지며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사례 1: 호(鬍) 형제는 이미 전임사역자로 베이징에서 4년 동안 200명 이상의 성도들을 섬겨오고 있다. 사역도 잘하기 때문에 여러 농촌지역으로 자주 사역을 하러 다니고 있다. 그는 전임사역자로 일하기 전에는 매달 3000 위안(元) 정도를 벌었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부터는 1000 위안 정도를 받는다. 그런데 베이징의 물가가 많이 올랐다. 그의 부인은 민공(民工)으로 월수입은 1000 위안을 겨우 웃돈다. 그나마 일이 없을 때도 있다. 그에게는 아이가 하나 있는데 베이징에 호적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고향집에서 중학교를 다닌다. 부모님은 연로하시다. 아버지는 식도암으로 몇 번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 후 계속해서 치료를 받느라 빚을 많이 졌다. 사역자들은 호 형제의 집을 종종 방문한다. 호 형제는 신학생 여러 명을 열흘씩이나 대접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아프면 치료비를 아낀다고 병원에 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쓰러진 적도 있다. 추운 겨울날 난방비를 아껴보겠다고 남이 쓰다 버린 연탄을 쓰기도 했다. 지인들이 알아볼까봐 옷으로 가리곤 했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은 그 열정과 헌신이 대단하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가다가 오래 못 버틸 거라고 걱정한다. 교회 외부에서 가끔 개인적으로 헌금을 해 주지만 그런 것은 감히 교회에 알릴 수도 없다고 한다.
사례 2: 상하이의 서(徐) 형제는 지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10개 이상 섬긴다. 하지만 대부분 민공들이 모이는 교회라서 돈이 없다. 서 형제는 오전에 목회를 하고 저녁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사례 3: 한 교회는 신장(新疆)과 허베이(河北)에서 온 두 신학생에게 학기마다 700 위안 을 보조해준다. 그러나 평소 교통비와 생활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두 신학생들은 전임사역자로 헌신해서 교회를 섬기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들은 소수의 지체들의 후원을 받아 어렵게 살고 있다.
사례 4: 원저우(溫州) 교회의 하(何) 목사가 전임사역자로 헌신할 때, 교회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 목사가 이런 ‘무관심’ 속에서도 잘 버티어 내는지, 또 그의 헌신이 과연 하나님께로 온 것 인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교회는 이전에 생활비로 몇 백 위안 만 주다가 그가 가정을 이룬 뒤에야 1000 위안 정도로 올려주었다. 당시 원저우의 물가는 상당히 높았다. 한 형제의 최근 정보에 의하면, 원저우시 모 교회 전임사역자의 월급은 1500 위안이라고 한다. 이 돈은 4-5인 가정의 한 달 식비이다. 이 정도의 돈은 외지에서 온 민공의 한 달 생활비보다 적다. 하 목사는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힘겹다. 결혼한 지 7년이 됐지만 여전히 빚지고 있다. 원저우의 많은 사역자들은 생활비가 부족해서 할 수 없이 다른 직장을 찾는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이 하는 장사에 공동 투자를 하고, 또 어떤 이는 부인이 유치원을 운영한다. 원저우에는 성도가 3만 명이나 되는 큰 교회가 있는데, 그곳의 사역자는 사모가 직장 생활을 해서 생활을 꾸려 나간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일까? 위의 모든 사례들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중국의 모든 농촌교회의 보편적인 상황이며 심지어 많은 도시교회와 원저우시 같은 비교적 생활수준이 높은 지역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화교교회도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교회가 중국교회처럼 목회자의 사례비를 소홀히 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중국교회는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기본적으로 성도가 50명 이상이면 교회는 헌금으로 목회자가정에 사례비를 제공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일부 교회는 재정이 매우 풍부한 교회이다.
과거 교회의 좋은 전통을 지키는 목회 중국교회의 기성시대는 힘들고 고된 시기를 지나오면서 아름다운 간증을 남겼다. 그 가운데 교회 안에는 고난을 겪고 가난해야만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고, 목회자나 전임사역자들은 무급으로 일해야만 믿음이 좋다고 하는 전통이 생겼다. 이 문제는 두 가지 위험한 결론을 초래한다. 첫째, 그 어떤 시대와 어떤 공동체도 고난과 역경을 함께 극복하려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이 세상의 물살에 침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이로 인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서 교회가 주의 종들에게 기본적인 생활비조차 공급하지 못 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은혜가 넘치는 분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중국의 목회자나 전임사역자들이 마땅히 사도바울처럼 텐트메이커로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주지 말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30여 명의 성도를 잘 목양 하려면 다른 직업을 가지며 목회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많은 목회자들도 헌신하기 전에는 든든한 직장과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된 이 후에는 기본 생활을 꾸려 나가기에도 매우 부족한 지경에 이른다. 목사나 전도사도 인간이기에 불완전하다. 경쟁이 치열하고 살기 힘든 이 시대에 교회사역에 온 힘을 쏟아 붓게 하고 또 가정의 생계를 위해 목회자들이 신경 쓰게 하는 것이 과연 잘 하는 일인가?
신구약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 어떤 이들은 ‘목회자는 온전히 믿음으로 십자가만 의지해야 하지 않는가? 또 오로지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진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닌가’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조지 뮬러, 허드슨 테일러, 송상절, 왕명도, 오용 장로 등은 모두 믿음정책으로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회에서 공급해 주는 사례비를 마다하고 성도들의 헌금으로 수많은 감동적인 간증을 남겼다. 그들은 성도들의 공급을 통해서 하나님은 진실하고 살아계시는 분, 신실하시고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며, 은혜가 풍성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이처럼 믿음정책으로 교회사역을 한 사람들은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았고 교회도 이 사람들로 인해 많은 복을 받았다. 하지만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만 믿음의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을까? 교회역사를 통해 더 많은 믿음의 선배들 -어거스틴, 칼빈, 마틴 루터, 스펄전, 토저, 안드레 머레이, 마틴 로이드 존스, 그리고 스티븐 탕 등-은 고정적으로 교회에서 공급해주는 사례비를 받고 사역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받은 사례비만 보고 주의 종이 됐을까? 그렇다면 이들은 믿음의 길을 가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이 충성된 종이 아니라서 사례비를 받았는가?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는 원래 고정적인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들어오는 개인 후원금이 너무 많아서 결국엔 사례비를 한 곳에서만 받기로 했다. 우리는 둘 중에 어느 하나만 옳다고 판단할 수 없다. 이는 성령께서 각자에게 주는 감동이며 인도하심이다. 그러나 목회자와 사역자만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가?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 성경에서 개인후원을 받는 방법과 교회에서 공정한 사례비를 받는 것을 양극화 시킨 적이 있는가? 믿음의 길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강조하는 길이다. 그 어떤 세력과 재능을 의지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는 것이다. 구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를 위해 십일조를 했는가?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을 위함이 아닌가? 성도들이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했으면 교회는 마땅히 목회자나 전임사역자에게 사례비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떤 이는 이론적으로 매 10명의 성도가 한 명의 목회자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중에 또 노약자나 아픈 성도, 실업자인 성도들을 고려할 때, 교회 자체에서도 여러 가지 지출이 필요하고 심방과 어려운 지체들을 위해 긍휼 사역비로 지출할 수 있다. 게다가 성도 50명이 출석하는 도시교회(농촌은 100명이고)에서 성도들의 3분의 2 이상이 헌신되고 헌금할 능력이 있으면 목회자나 전임 사역자에게 충분히 사례할 수 있다.
몇 가지 원칙들 : 교회와 모든 성도는 주님의 공의로 행해야 한다 1) 공의는 우리가 은혜를 입었으면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목회자나 전임사역자에게 헌금을 한다고 해도 만약 감사와 사랑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도 주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를 보상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는 주의 종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공의로운 마음이 있어야 하며 결코 은혜를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2) 사역자의 생활수준과 수입이 너무 많으면 악한 동기로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활이 너무 궁핍해서 마음이 어렵고 흔들리면 결국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사역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생긴다. 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사람이 임의로 조종해서도 안 되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교회의 섬기는 분들과 임직원과 집사, 장로가 다 함께 기도해서 성경의 원칙대로 결정해야 한다.
3) 지나친 부와 높은 지위 그리고 높임을 받는 것은, 설령 그 사람이 진실된 주의 종이라 해도 큰 시험 거리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목회자나 전임사역자들이 일부러 가난과 궁핍하게 살아야만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목회자의 사례비는 일반 성도의 평균 수입 보다 조금 더 드리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이 자주 성도들을 대접하고 헌금을 해서 그들이 사역을 인한 실제 지출이 많기 때문이다.)
4) 대체적으로 교회가 목회자에게 드리는 사례비로 그가 그의 가정을 책임질 수 있으려면 그 사례비에는 자녀의 교육비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부모님께 자식의 도리를 하고, 친지 친구들을 대접하며 심방갈 때 필요한 교통비와 심방 비용, 목회자가 자기개발을 할 수 있는 교육지원비와 도서구입비를 제공하면 좋을 것이다.
5) 교회는 일정한 사례비를 마다하고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믿음정책을 추구하는 주의 종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교회가 늘 관심을 가지고 함께 중보하면서 일꾼들의 실제 형편을 살펴야 한다.
6) 지금 막 개척하고 성도들 대부분이 저소득층으로 모인 교회라면 모(母)교회와 재정형편이 부유한 지체들이 마땅히 도와야 한다.
주의 종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주의 종은 마땅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교회에서 일정한 사례비를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과 단체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주의 종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세밀한 공급하심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또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무엇으로 성도들을 섬길 수 있겠는가? 목회자와 모든 전임사역자들은 사례비를 흥정해서는 안 된다. 사례비가 적다고 해서 그만둬서도 안된다. 목회를 계속할 것 인가 하는 것은 부르심이 확실한지 아닌지에 달려있다. 누가 목회자나 전임사역자를 먹여 살리는가? 성도들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은 종종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주의 종의 필요를 채우신다. 그러나 궁극적인 공급자는 하나님이시다.
때로는 더 이상은 주님을 섬기지 못할 만큼 힘든 시기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믿음의 시련인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못 이해 한 건지, 혹은 새로운 길로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타인의 일에 결정권을 행사하지 말아야 하며 그 사람에게 없는 믿음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이든 성도든 두 사람 모두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면에 있어서 평행선 위에 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잘못 서 있으면 그것은 곧 실책과 불충이고 월권행위이다. 성도가 목회자에게 청빈한 생활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를 하면서 고정적인 사례비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는 독선일 뿐이다. 남의 문제점을 보게 될 때는 사랑과 진리로 권면해야 한다. 그러나 선택권은 언제나 당사자에게 달렸다.
헌금에 대한 가르침 성도들은 부유한데 교회는 돈이 없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헌금에 대한 설교를 못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면 종종 갈등이 발생하고 교회가 자신에게 돈을 요구한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헌금에 대해 설교하지 못하는 것은 목회자들의 연약한 부분이다. 마땅히 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치지 않는 것은 엄연한 죄다. 말라기서에 성도들이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고 복 받는 생활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기를 원하신다. 만약 기쁘게 헌금하지 못 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 헌금하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순종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절대로 하나님과 교회를 성도에게 구걸하는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헌금 하지 마라. 만약 당신이 헌금하고자 하는 그 돈이 정직한 돈이 아니라면 헌금해서는 안된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에게 내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가능한 헌금함을 배치해 놓아야 한다. 성도들이 자유롭게 헌금 할 수 있도록 한다. 중국의 상황에서 직접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형편이 되는 교회는 반드시 재정에 투명성을 유지해야 한다. 재정수입과 출납 그리고 감독을 세 사람에게 각각 맡겨야 한다. 그래야만 사단에게 시험 거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사역자의 부르심을 확인한 뒤에 일을 맡겨야 한다 한 교회에 50명 정도의 성도가 있다면 전임사역자 한 사람을 세울 수 있다. 목회자는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다. 교회는 전임사역자를 세울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택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 그 분의 뜻을 나타내 달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더더욱 기도하고 말씀에 근거하여 그 사역자가 과연 확실한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 사역자의 부르심을 확인할 때 참고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출애굽기,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등을 참고)
1. 성경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고 열심을 다해 배우며 진리의 말씀을 매우 갈급해 한다. 2.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며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있고 신앙생활의 여정에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 자기 의(自義)를 버리고, 이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을 알고, 성품이 성령님의 변화를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어야 한다. 3. 대인관계 및 가정생활 가운데 주님을 위한 아름다운 간증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4. 은사가 분명한 사람이어야 한다. 5. 뚜렷한 부르심과 비전,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6. 겸손하고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교회와 성도를 섬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7. 사역에 열매가 있는 사람, 복음전도의 열매가 있고 사람들을 양육해서 믿음을 성장 시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8. 동역자들도 그 사역자에 대한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부르심이 확실해야 한다. 목회자나 전임사역자는 교회의 필요나 타인의 권면, 혹은 본인의 열심 때문에 전임사역자가 될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부르심이 확실해야 한다. 그대는 진정 하나님께 바칠 산 제사로 준비 되었는가? (롬 12:1 ; 딤후 2:21)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고후 13:5),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그러므로 예비 전임사역자나 예비 목회자는 몇 년의 시험 기간을 두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매우 필요하다. 이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머리속에 지식이 우리의 생명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출처 《教会》2011年5月总 第29期 번역 | 차이나·본지번역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