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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8.31 통권 127호     필자 : 강인규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런던선교회 최초의 중국 의료선교사 록하트(William Lockhart)

지난 호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글을 연재하지 못해 독자 분들께 깊은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번 호에는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에서 근대중국에 파견한 최초의 의료선교사 록하트(William Lockhart)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1938년 중국에 부임하여, 바타비아(Batavia), 말라카(馬六甲), 마육갑(澳門), 홍콩(香港), 주산(舟山), 딩하이(定海),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 등지에서 20년 동안 의료선교활동을 하면서 근대중국 의료발전과 선교사역에 공헌을 한 중요한 선교사들 중 한 분이다.

런던선교회 중국 최초의 의료선교사
록하트는 1811년 10월 3일, 영국의 리버풀(Liverpool)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더블린(Dublin)의 미트 병원(Meath Hospital)과 런던의 게이스 병원(Guy‘s Hospital)에서 의학과정을 이수하였다. 1833년 약제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그 이듬해에 의대를 졸업한 후, 황실외과의사협회(M. R. C. S.)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그 후로 몇 년 동안 리버풀의 한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런던선교회의 중국 의료선교사 모집광고를 보고 자원하여 중국선교에 헌신하게 되었다.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에는 파커목사(Rev. Peter Parker, 1804-1888)가 광저우(廣州)에서 의료선교를 성공적으로 실행하는 것에 용기를 얻었고, 또 런던선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이 위생시설이 낙후한 중국과 동남아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어, 그들에게 의료적인 보살핌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의료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모집하였는데, 록하트가 스스로 헌신한 것이다. 1838년 7월 31일, 록하트는 런던선교회의 선배 선교사인 메더스트(Rev. Walter Henry Medhurst, ?都思, 1796-1857)와 그의 가족과 함께 조지아 4호(The George the Fourth)에 탑승하여, 선교지인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3개월의 긴 항해를 거쳐, 11월 중순에 마침내 인도네시아 수도인 바타비아(Batavia)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말에 광저우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는 광저우에 도착하자마자 의료선교회(The Medical Missionary Society)에 참여하여 중국 의료선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우리는 록하트의 이러한 행동에서 한 가지 중요한 선교경험을 체득할 수 있다. 록하트는 자기가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왔기 때문에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즉시 의료선교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초기의 중국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 중국선교의 현장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사역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또 이를 위해 많은 준비들을 하고 중국에 왔기 때문에, 시간과 자원을 선용할 수 있어 어려운 환경 중에서도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은 막연히 중국선교를 한다고 중국에 갔지만, 막상 어디에서부터 시작할지 몰라 시간을 낭비하고, 마음고생을 많이 하는 분들을 적지 않게 보았다.

선교의 영역이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각자의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선교에 종사한다면 선교의 효과가 더욱 풍성하리라 믿는다. 록하트는 광저우에서 근대중국 최초의 의료선교사 파커의 건의에 따라 마카오에 가서 파커가 경영했던 병원을 재개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여서 영국인의 거주를 거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6주 정도 활동하다가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야 했다. 록하트는 광저우에 도착하여 계속 중국어를 배우며, 선교를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영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사정이 날로 악화되어 광저우에 계속 거주할 수가 없어 부득이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9월 7일 그는 마카오를 떠나 인도네시아 바타비아로 향했다. 그곳에서 런던선교회의 선배인 메데스트의 지도아래 중국어를 계속 공부하였다. 1840년 5월 록하트는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8월 1일부터 병원사역을 재개하였다. 그가 병원사역을 재개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홉신의사(Dr. Benjaman Hobson)와 다이버의사(Dr. William Beck Diver)가 광저우에 부임하자, 병원을 그들에게 맡기고, 록하트는 북상하여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딩하이(定海)와 주산에서 의료선교를 시도하였다. 1840년 9월 13일, 록하트는 주산에서 병원을 개설하고, 중국인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1941년 2월 22일, 영국군이 철수하자 록하트 역시 2월24일 주산을 떠나 3월 16일 마카오에 돌아왔다. 그는 마카오에 돌아와서, 파키스(Miss Catherine Parkes)양과 결혼하였다.  

록하트와 상하이의 인제의관(仁濟醫館)
1842년 영국과 중국은 아편으로 인한 전쟁이 3년간 계속되다가 결국 중국이 패전하고, 중영난징(南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고, 광저우, 시아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뽀(寧波)와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국부적으로 개방되었다. 중영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함으로 과거 기세가 등등했던 중국은 마치 ‘종이호랑이’ 혹은 ‘잠자는 사자’의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하여 금후 100년 동안 서구열강의 중요한 침략대상이 되어 외교적인 수모는 물론 경제적인 유린을 당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처했다.

이 전쟁은 중국근대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활동에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807년 근대 최초의 선교사 모리슨(Rev. Robert Morrison, 1782-1834) 이후 중국선교를 위해 중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중국에 들어갈 수 없어 동남아 등지에서 중국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려야 했었는데,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5개항구가 개방되자 선교사들은 홍콩과 개방된 5개 항구로 진출하여 중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자 록하트 역시 그 이듬해 봄에 홍콩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병원을 개설하였다. 몇 개월 후 1843년 6월 13일 주산에 다시 돌아와 병원을 개설하였다. 그 해 12월말 록하트는 런던회소속의 선배선교사인 메더스트와 상하이를 2주 정도 방문하며 상하이에서의 의료선교 활동 여부를 살피고, 매우 긍정적인 판단을 하였다. 그는 주산으로 돌아가 그곳 병원을 정리하고, 1844년 2월 중순경에 부인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록하트가 상하이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였고, 또 그들의 도움으로 상하이에 병원을 개설할 수 있었다. 이 병원은 몇 번의 이사를 거쳐, 1846년, 현재의 산동루(山東路)에 정착하고 그 이름을 인제의관(仁濟醫館)이라 칭하였다. 이 병원은 상하이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며, 인제의원의 전신이 되었다. 이 병원은 중국식 2층 건물로 대부분의 건축비용은 영국 상인들과 중국의료선교회에서 헌금하였다. 비록 병원 시설은 간단하지만, 록하트는 이 병원에서 빈민층에게 의료혜택을 베풀 수 있게 된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병원이 개설한 초기에는 중국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여 찾아오는 환자들이 없었지만, 록하트가 거리에서 열심히 홍보하고, 무료로 치료해주어 환자들이 점점 증가했다. 1845년 6월까지 만여 명을 돌파하고, 1846년에는 한 해 동안 19,000명의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는 병원 운영 면에도 현대식 운영제도를 도입하여, 중국근대 병원운영의 새로운 모델을 제공하였다. 또한 영국의 의학계와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여, 새로 발전된 서구 의술을 신속히 도입하여 중국에 응용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1849년 서구에 마취 기술이 발명되자, 록하트는 그 다음해에 이 기술을 도입하여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사용하였다. 록하트는 의료선교사로서의 역할과 신분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병원을 운영하는 목적이 단순한 환자치료만이 아니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최우선이어서,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록하트는 당시의 병원생활을 선교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매일 아침 7시 반에 종을 치면, 병원의 모든 직원들과 걸을 수 있는 환자들이 예배를 드린 후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9시부터 환자들에게 필요한 약품들을 제공해주고, 11시30분에 다시 종을 치면 병원의 일상 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오후 진료가 시작되기 전에 밖에서 대기 중인 모든 환자와 가족들은 병원로비에 모여서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남녀가 서로 나누어져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마치면, 대나무로 만든 번호표를 나누어 주어 그 번호순서대로 진료를 받게 한다.”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들은 반드시 먼저 이러한 종교활동에 참석한 후에야 비로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만약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있으면, 선교사들이 그 환자의 침실로 찾아가 복음을 전하였다. 전도와 설교는 같은 런던회 소속의 메더스트,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와 에드킨스(Joseph Edkins)목사들이 협조하여 번갈아가며 설교를 하였다. 매번 집회 때마다 여성들이 30-60명, 남성들이 50-80명 정도 되었는데, 집회가 끝나면 환자들에게 성경과 전도책자들을 무료로 배포하였다. 그들이 병이 완쾌되어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이러한 책자들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대부분의 환자들과 가족들은 매우 진지하게 집회에 참석하였다. 록하트는 환자들의 치료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병원식당에서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여, 1852년 1년 동안 34,000명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바쁜 가운데서도 감옥을 방문하여 죄수들을 치료해주어 범죄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852년 부인의 건강 문제로 부인은 자녀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먼저 귀국해야 했다. 록하트는 상하이에 계속 체류하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1857년 12월 본인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부득이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1844년 그가 상하이에서 인제의관을 개설하면서 1856년까지 13년 동안 이 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가 150,000명이 넘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하이의 많은 주민들이 편지와 크고 작은 예물들을 보내면서 그의 공로를 치하하고 섭섭해 했다. 영국에 돌아가서도 계속해서 중국선교를 위해 노력하였는데, 특히 그는 영국에서 자기가 중국에서 20년 동안 선교한 경험을《在華行醫傳?二十年》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여, 서방세계에 중국을 소개하고, 중국선교에 많이 참여하도록 간절히 호소하였다.

록하트와 베이징의 협화의원(協和醫院)
1860년은 중국근대사와 선교역사에 또 다른 분수령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1858년 영국은 매 12년마다 조약내용을 수정한다는 난징조약의 규정에 의해 중국에 조약내용의 수정을 요구 했지만, 중국이 이에 응하지 않자, 프랑스와 연합하여 중국을 공격하였다. 이는 중국근대 역사에 매우 중요한 제2차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데, 중국은 이 전쟁에서 또 여지없이 패배하여, 영국, 불란서, 미국과 러시아 등 4개국과 텐진(天津)조약을 체결하였다. 미국과 러시아는 전쟁에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외교방면에 적극 참여하여 덴진조약에 참여하게 되었다. 텐진조약을 체결한 후 그 조약내용을 각 국회에서 비준하고, 이를 서로 교환한 다음에야 비로소 조약의 효력이 나게 되었다. 영프미 대표가 비준된 조약을 교환하는 협상과정에서 청나라 대표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각국대표단을 감금하여 옥에 가두어 갖은 고문을 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영프 연합군은 즉각 군사를 동원하여 베이징을 점령하고 위엔밍위엔(圓明園)의 값진 물건들을 모두 약탈하였다. 시엔펑(咸?) 황제는 러허(熱河)로 피난을 가야하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중국은 전쟁에 패배하여서 또 다시 4개국과 베이징조약을 체결해야 되었는데, 그 조약내용은 텐진조약 내용과 비슷하였다. 중국은 이 두 조약으로 인해 부득이 중국전역을 완전히 개방하고,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도 중국전역에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지방 관리들은 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다. 중국교회사의 권위자인 사시걸(査時傑)교수는 1807년 중국 최초의 선교사 모리슨이 중국에 온 시기에서 1860년까지를 근대 중국교회의 준비기간으로 분류하고, 1860년부터 1900년까지를 중국교회 건설시기로 분류하고 있다. 이처럼 1860년은 중국근대사와 중국교회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였다.

중국이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는 소식은 전 서방세계를 충분히 흥분시키고 남으리라 믿는다. 1807년 근대 중국최초의 선교사 모리슨이 중국에 온 뒤부터 반세기 이상을 중국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던 서방교회 선교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을 다투어 중국 각 지역에 진출하여, 선교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록하트는 영국에서 중영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영국교회에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중국선교를 대대적으로 전개하도록 호소하였다. 런던선교회도 이에 동의하여 특별히 중국선교의 경험이 풍부한 록하트를 초청하여 재차 중국선교에 투입시키고자 하였다. 영국정부는 록하트를 베이징주재 공사관의 주치의사로 임명하여 중국에 파송하였다. 1861년 6월 11일, 록하트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선교사이자, 영국공사관의 주치의사의 신분으로 영국을 떠나 두 번째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7월 15일 싱가포르에 도착하고, 8월 5일 홍콩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20여 년 전 그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는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걸려서 중국에 왔었는데, 이번에는 겨우 2달 만에 중국에 올 수 있어, 그동안의 항해기술이 많이 발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모리슨과 이웃에서 함께 자랐던 스티븐이 발명한 증기기관선이 과거의 범선보다 월등한 성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충분히 입증하였다. 그는 일주일 만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곳을 떠난 지 꼭 4년 만에 다시 돌아와 그의 감는 새로웠다. 상해에서 2주정도 체류한 후 텐진을 거쳐 9월말에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텐진에서 흔들거리는 마차를 타고, 진흙탕 길을 통해 베이징으로 전진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무사히 베이징에 도착할 수 있을지 의심을 했다고 하니 당시 선교환경이나 교통사정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록하트는 베이징에 도착해서, 선교회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선교보고를 선교회에 보내면서 베이징에 대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저는 베이징을 참 좋아합니다. 베이징은 정말 좋은 도시입니다. 비록 길거리마다 놀라울 정도로 지저분하고 먼지가 많지만, 저는 전혀 이에 개의치 않고, 곳곳마다 많은 관심을 갖고 살펴봅니다.

저는 최근에 말을 한필 샀습니다. 이 말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황궁으로 가는 길에도 먼지와 쓰레기들로 지저분하기 그지없고, 거지들이 궁전의 돌계단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대조적입니다. 황궁으로 가는 길은 매우 넓지만, 지저분한 먼지들이 두껍게 깔려있어, 지저분하기 그지없고, 특히 6월에 장마철이 되면 진흙투성이가 되어 걷기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궁전은 매우 웅장합니다. 저는 궁전에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궁궐안의 정원과 동산들을 바라볼 뿐입니다. 저는 베이징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어, 베이징이 제게는 더 없이 어울리는 좋은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베이징에 오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록하트는 영국공사관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음 공사관에서 바로 옆 건물을 구입한 것을 록하트가 세를 얻었다. 단층의 이 건물을 병원 겸 숙소로 사용하다가 환자들을 더 많이 돌보기 위해 자기는 그의 중국인 하인과 같은 방에서 생활하였다.

이 병원이 바로 현재 베이징에서 유명한 협화의원(協和醫院)의 전신이 되었다. 1862년부터 병원을 정식 개설하고,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어느 부인은 그의 수술로 난치병을 완전히 치료받고, 록하트에게 감사하기 위해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록하트는 영국과 프랑스 공사관의 유일한 주치의사이고, 환자진료에 바빠 평소에 별도로 선교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그의 이러한 임상치료의 효과는 환자들의 입술를 통해 신속히 전파되어, 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날로 증가하였다. 병원을 개업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환자들이 점점 증가하여, 하루에 2-30명으로 증가하여, 3개월 만에 등록된 환자가 무려 6,815명, 실제로 이 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환자들은 대부분 서민이지만, 정부의 고관과 부유층의 부녀자들까지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고, 거지들도 이곳에서 따뜻한 치료를 받아서 환자들의 분포가 다양했다. 그가 병원을 개업한지 1년이 지난 후 영국공사 브루스(Frederick Bruce)는 록하트의 병원업무가 공사관의 업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록하트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주 업무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진료대기실은 60명 정도 수용할 수 있었는데, 환자들이 이곳에서 대기하는 동안, 중국조수들은 성경과 전도책자들을 배포하며 기독교를 소개하였다. 어느 환자들은 대기실에서 복음을 접하고,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병원을 개업한 지 1년 후에 티엔진(天津)에서 선교하던 에드킨스(Joseph Edkins,1823-1905)목사가 베이징으로 전임하여 바로 병원 옆에 학교와 작은 집회소를 세우고, 병원과 협조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완벽한 의료선교팀을 형성하였다. 에드킨스는 베이징서부에 또 다른 집회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베이징에 현존하는 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된 항와시교회(缸瓦市??)이다. 이로써 런던선교회는 베이징에서 제일 처음으로 개신교 교회와 복음기관을 창설한 선교회가 되었다. 록하트는 병원업무로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선교보고를 상세하게 했다. 이를 통해 선교회는 중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런던선교회의 베이징, 화중(華中)과 화베이(華北)지역의 업무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협조하여 그들이 각 지역에서 선교의 기반을 신속히 확립하여 좋은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며 협력했다. 1864년 3월, 록하트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을 더드전(John Dudgeon 1837-1901)박사에게 인계하고 그해 4월, 3년간의 짧은 선교활동을 마치고 베이징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노년을 영국에서 보내면서 계속 중국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하다가 1896년 85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맺는말
록하트는 런던선교회가 중국에 파견한 최초의 의료선교사였다. 그는 두 번에 걸쳐 중국에 와서 광저우,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의료선교사로 중국의 의료발전과 선교사역에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중국에서 활동한 기간은 22년 정도지만 중국의 남부, 중부와 북부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런던선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중국 의료선교사답게 중국선교의 모델을 확립하여 발전시켰다. 이전 중국은 선교활동이 금지되어, 주로 번역과 출판사역이 주가 되었었는데, 중국이 점점 개혁 개방되면서 의료선교는 중국선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록하트가 활동한 도시는 남부의 광저우, 중부의 상하이와 북부의 베이징은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도시여서, 록하트는 도시선교의 영역을 개척하고, 또 상하이와 베이징에 최초로 현대식 병원을 세워 중국의 의료발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강인규 |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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