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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8.31 통권 127호     필자 : 왕광양(王光洋) 프린트   이메일 
[중국 소수민족과 선교]
거부교회 백년사(葛布教会百年史)

I. 거부로의 기독교 전파
거부(葛布)는 청나라 시기에 웨이닝주 구이화리(威宁州 归化里), 오늘날의 허장현 부추향(赫章县 辅处乡)으로 귀속되었다. 지표 분석과 먀오족(苗族) 노인의 서술을 통해 1800년 전 이곳은 초목이 무성하고, 수많은 야생동물이 살던 원시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20년 전에는 이족(彝族)인 궈부(果布)씨네 가족만 홀로 살고 있었기에 ‘거부’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예전 이곳에는 멧돼지가 매우 많았는데 종종 멧돼지들이 농작물을 짓밟는 바람에 농사를 지어도 수확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족은 사냥을 위해 자뤄(渣倮)의 먀오족에게 자주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왕래하던 먀오족은 결국 이곳에 남아 멧돼지를 잡으며 함께 살게 되었다. 그래서 1893년 먀오족 사냥꾼이었던 왕모세(王摩西)도 그의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손자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옮겨와 거주하게 되었다. 오늘날 거부지역은 촌(村)으로 편입되었다. 7개의 촌민조직이 있고, 이곳에는 먀오족, 부이족(布衣族), 한족(汉族), 이족 등 4개 민족이 거주한다. 거부는 인구 약 2천 명, 면적 약 30㎢에 달하는 촌으로 성장했다.

 

 1. 신앙의 기원
먀오족은 수많은 고난에 시달려왔다. 물론 거의 모든 민족에게 전쟁의 역사가 있지만, 먀오족이 겪은 전쟁은 그 기간과 횟수, 규모에 있어 매우 보기 드문 경우이다. 그들은 지난 5천여 년 간, 전체 부락이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이동하기를 반복하다가 최종적으로 윈꾸이(云贵)고원에 정착했다. 우멍산에 기거하던 그들은 남의 집에 얹혀살며 마치 가축처럼 일했다.  그러나 역대 관청에서는 누구도 우매하고 뒤쳐진 채 안정된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민족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 정부는 먀오족을 ‘성먀오(生苗)’와 ‘수먀오(熟苗)’로 구분했다. ‘수먀오’는 도시부근에서 한족에 섞여 살며 한족 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은 먀오족을 가리킨다. ‘성먀오’는 정부관할이 미치지 못하는 변경지역에 살고 있는 먀오족으로 ‘미개인’과도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청 정부는 누군가 성먀오를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셩먀오의 거주 지역을 ‘성졔(生界)’로 지정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했고,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쥐런(党居仁)은 이 법령을 어기고 안순(安順)에서 약 20 마일 떨어진 쉐이시먀오(水西苗) 성졔(生界)에 가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복음은 이 지역 구석구석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1903년 가을, 이마태(李马太), 장마가(张马可), 장야곱(张雅各), 장요한(张约翰)이 덩두이(戥堆)로 사냥을 나갔다. 그들이 푸딩 덩두이(普定戥堆) 마을을 지날 때 마침 덩두이 예배당 공사현장을 둘러보던 당 목사가 기이한 차림새를 한 이들을 보았다. 그는 신기해서 곁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풀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구지? 어디에서 온 건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걸.” 이때 누군가 목사에게 “이들은 웨이닝 고산지대에서 생계를 위해 이곳으로 옮겨온 먀오족 사람들입니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고, 주로 다른 사람 대신 사냥을 해 주며 생계를 꾸려가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지요.”라고 알려주었다. 당 목사는 즉시 그들에게 다가가 자신의 집으로 갈 것을 청했다. 그는 집에서 그들에게 간식을 대접하면서 예수님의 강림, 수난, 부활, 승천, 재림 등을 주제로 천국의 복음을 전했다. 목사는 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자기만 믿고 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당부했다. 또한 먀오족 언어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콤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여러분 모두 많이 드세요. 여러분의 선조들은 먹어 볼 기회조차 없던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마태와 장마가 일행은 이에 “하나님, 당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달고 맛있는 양식을 저희에게 내려주시다니요.”라며 화답했다. 이어서 당 목사는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 전후로 그들에게 셰판스(谢饭诗: 양식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당 목사는 그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그들이 사냥하러 갈 수 있도록 데려다 주고 헤어질 때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여러분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안순으로 저를 찾아오세요. 제가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하루는 그들이 덩두이써써(戥堆啬啬)지역에 사냥을 나가 멧돼지를 한 마리 잡았는데 현지의 투라오족(土老族, 해방 후에는 ‘布衣族’으로 불린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먀오족 몇 명이 당쥐런에게 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 뛰어갔다. 당쥐런은 사건의 전말을 다 듣고 나서 지체 없이 말을 타고 안순으로 달려가 관부에 알렸고, 관부에서 지원한 관원 한 명과 함께 사건을 원만히 처리했다. 먀오족은 당 목사에게 “우리는 사냥을 하기 위해, 또 예수님을 믿기 위해 멀리에서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냥감을 발견한 사람에게도 그 몫을 챙겨주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 규칙에 따라 멧돼지의 반을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매우 정중하게 말했다. 당 목사는 “좋습니다. 여러분의 결정이 매우 합리적이군요. 여러분이 모두 평안하고 화목하게 지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라고 사건을 종결지었고, 모두들 기뻐했다. 이 사건은 푸딩(普定), 랑다이(郎岱), 즈진(织金), 핑바(平坝) 등 먀오족 거주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가 먀오족 사이에 전파되어 안순으로 말씀을 들으러 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예배에 참석하고 세례를 받았다. 매 주일마다 그들은 20-30리의 먼 길을 마다 않고 걸어와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안순에서 먀오족 왕이 났다”는 이야기가 생겨났다.

2. 신앙의 과정
먀오족은 신앙을 갖기 이전에는 소를 잡아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곤 했다. 그것은 그들만의 엄격한 풍습이자 관례였다. 이를 중국어로는 다쟈(打戛) 혹은 간쟈(赶戛)라고 한다.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집은 13년마다 한 차례씩 소를 잡아, 짧게는 5일 길게는 7일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제사 소식을 들은 일가친척 및 부족민은 누구든 각자의 식사를 챙겨 와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03년 10월, 웨이닝(威宁) 싱룽창(兴隆厂)의 루오야보(罗亚伯: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의 이름)의 집이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마태는 루오야보의 부인이 데려온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마태와 장마가 일행도 랑다이 란롱치아오(懒龙桥)에서 싱룽창으로 돌아와 제사에 참여했다. 장마가가 이마태에게 “우리가 안순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가족들에게 전할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마태가 대답하길 “전해야지, 내가 꼭 전할 거야. 무엇이 두려운가? 먀오족도 교육을 받고, 신앙을 가져야 해.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이렇게 해서 이마태는 천 여 명이 모인 제사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안순에서 먀오족의 왕이 나셨습니다. 먀오족에게 사랑과 인자를 베풀고, 먀오족을 형제라 칭하며 가난하고 불쌍한 먀오족을 힘써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한 먀오족을 가르치고, 신앙을 갖도록 하여 저희는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의 사명 중 하나는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여 다른 이를 주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첫째,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사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승천하사 다시 오시리란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우리 먀오족이 5천 여 역사에서 겪은 곤경과 설움에 대한 말씀 같고, 이는 우리가 천 여 년 간 갈망해 오던 것과도 일치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모두 감동했다. 제사가 끝나 이들이 다 흩어진 후에 이 소식은 윈난성 동부방언구의 가족소식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되기 시작해 “먀오족은 하나님을 믿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윈난성 동부지역부터 꾸이저우성 서북부의 각 현으로 퍼져나갔다. 뤄아벨의 큰 아들인 뤄베드로(罗彼得)와 그의 제부 장조상(张朝相)은 이마태를 따라 진리를 구하러 안순으로 갔다. 안순에 도착해서 당 목사를 만났다. 당 목사는 간절히 말씀을 사모하는 그들에게 7일 동안 머물며 말씀을 전했다. 그 후 뤄베드로의 형제인 뤄다니엘(罗但以理)은 장바울, 왕요한 등을 비롯한 열두 명과 함께 안순으로 갔다. 이때 당쥐런이 그들에게 한 달간 말씀을 가르쳤다. 이들은 돌아가서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먀오족 신도들은 당 목사도 놀랄 정도의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말씀을 듣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안순까지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장바울은 매우 감화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가족 및 친척과 이웃을 다 불러 매번 함께 예배를 드렸다. 또 매 주일마다 200-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거부에 와서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불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쥐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번도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곳에서 교회가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마치 들불이 번져나가듯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에 당쥐런은 랑다이(郎岱) 란롱치아오에 있는 장야고보를 거부로 보내 현지 상황을 살펴보게 했다. 당시 장바울은 장야고보에게 그들이 거부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데 당 목사가 이에 동의하시는 지 여쭤봐 주길 청했다. 장야고보는 돌아와 당 목사에게 이를 전달했고, 목사는 교회건축에 바로 동의했다. 하지만 거부가 안순에서 너무 멀어서 교회를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당 목사는 안순으로 말씀을 들으러 온 장바울과 뤄다니엘을 만나 “거부는 자오퉁(昭通)에 조금 더 가까우니 그 곳에 계신 사무엘 폴라드(Samuel Pollard, 伯格理)목사님을 찾아가세요. 그분도 매우 훌륭한 목사님입니다. 여러분이 그 곳에 가서 말씀을 배울 수 있도록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분명히 여러분을 성심껏 도와주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거부로 돌아가고 오래지 않아 뤄다니엘 부부와 뤄베드로, 장자오샹, 장자오수 등이 당쥐런의 서신을 가지고 자오퉁으로 말씀을 청하러 갔다.  1904년 7월 20일, 먀오족 신도 뤄다니엘 일행은 당쥐런의 서신을 가지고 자오퉁에 도착했다. 사무엘 폴라드 목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중 종환란(钟焕然, 한족, 교사) 를 만났다.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이요?” “우리는 폴라드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책을 읽으러 왔습니다.”그들이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묻기를 “지금까지 먀오족 사람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당신들이 어떻게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오?” 뤄다니엘은 품속에서 책 두 권, 즉 ‘송주성시(颂主圣诗)’와 ‘진리입문(真理入门)’을 꺼내 보이며, 안순에서 당쥐런 목사를 만나 하나님을 믿게 된 과정과 그의 추천으로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모두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듣던 중 환란은 그들을 폴라드 목사에게로 인도해 주었다. 폴라드 목사는 그간의 사정을 다 듣고는 그들을 환대하며 이틀 동안 머물게 하고, 복음을 전했다. 또한 “돌아가 먀오족 동포들에게 이곳으로 와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하시오.” 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안순, 자오퉁에서 당쥐런 목사와 폴라드 목사를 만난 이야기를 먀오족 사람들에게 전했다. 먀오족 사람들은 기대 이상의 좋은 소식에 기뻐했고, 이때부터 자오퉁의 폴라드 목사를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40명 미만으로 시작했으나 한 달 정도 지나자 그 수가 크게 늘어 백 명이 넘지 않는 날이 없었다. 폴라드 목사와 교회 관계자들은 몰려오는 신도를 보며 놀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많은 먀오족이 자오퉁으로 폴라드 목사를 찾아왔고, 마르지 않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그 행렬이 이어졌다. 폴라드 목사는 이런 글을 남겼다. “하루는 20명의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그 다음날에는 50명이 왔고, 이어서 100명, 200명, 500명으로 늘어갔다. 심지어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고, 하얀 눈이 대지를 온통 뒤덮었던 겨울날에 천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대문을 두드렸다.” 「좁은 문 앞의 스먼칸(窄门前的石门坎)」이라는 책에 기록된 것처럼 전파 역사가 2천 년에 달하는 유교와 20년 밖에 안 되는 기독교를 그 신자 수에서 비교해 보면 너무나 놀랍다. 바로 이점 때문에 먀오족의 기독교 신앙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며, 연구하고 토론할 가치가 있는 문화적 과제인 것이다.

II.  교회의 건립과 분포
1. 거부교회의 건립
장바울(张保罗)에 의해 자생적으로 교회가 조직되면서 거부는 꾸이저우(贵州) 서북부 지역 먀오족 교회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4년 거부교회가 생겨났기 때문에 ‘용의 해에 진리를 얻었다(龙年得道)’고 일컬어졌다. 거부교회는 이미 100여 년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난 백 년 동안 거부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하심으로 여러 환난과 시험을 이겨내며 승리하는 교회, 영광의 교회, 은혜 입은 교회, 사랑 받는 교회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먀오족이 스스로 개척한 첫 번째 먀오족 교회, 즉 거부교회를 지원하기 위해서 그 해 말, 당쥐런은 안순 지부(知府:명, 청대의 ‘府’단위 일급수장) 취홍시(瞿鸿锡)와 웨이닝 지주(知州: 명, 청대의 ‘州’’단위 일급수장) 덩쉰칭(邓循卿)을 대동하고, 거부로 예배당 건축부지 실사를 나갔다. 거부지역은 가구 수가 적으므로 예배당을 커러(可乐)에 짓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쥐런은 거부를 건축부지로 확정했다. 부지를 확정한 후에는 주와이투무(朱歪土目)의 안캉닝(安康宁), 뤄무(倮母)의 쟈안진(戛安斤) 등 지방 토호들과 상의 끝에 주와이투무의 안캉닝이 거부에 지니고 있는 토지 일부에 교회를 짓기로 하고, 왕요한이 헌납한 집 앞의 땅도 교회부지에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건축부지 관련 조사를 다 마친 후에는 건축시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건축비용의 일부는 먀오족 신도들의 성금으로 마련하고, 나머지 비용의 대부분은 ‘선교사 파견회(差会)’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목재와 노동력은 신도들의 헌납과 자원봉사로 충당하기로 했다. 1905년 초에 시작된 예배당 공사는 약 1년여의 시공을 거쳐 1906년 봄, 천 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목조 예배당이 완공되었다. 작은 산촌마을에 이러한 예배당이 건축된 것은 이는 우멍산 지역에서 유례가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2. 교회의 분포
거부교회는 건립 이후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단기간에 여러 현으로 넓게 확장되었다. 먼 지역의 신도들을 돌보고 여러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 끝에 거부교회는 신도가 비교적 집중되어 있는 5개 지역에 각각 지부를 설립하기로 했다. 지부 설립을 시기 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8년 지에거우(结构) 지부 등, 1909년 싱룽창(兴隆厂), 다송수(大松树), 위치우완(渔秋湾),신루팡(新炉房) 4개의 지부가 세워졌다. 지부 설립 이후 총회는 연락망을 강화하고, 각종 활동 추진을 도왔으며, 각 교회에 장로와 집사를 세우고 함께 교회의 사무를 논의하였다. 이후에는 장로, 집사회의가 매년 두 차례 열렸는데 한 번은 거부에서, 나머지 한 번은 각 지부에서 돌아가며 진행하였다. 

III. 교회의 흥성과 쇠퇴 그리고 부흥
1. 교회 흥성기 (1904-1919)
1903년 10월 이마태와 장마가가 처음으로 싱룽창에 복음을 전한 이후 우멍산의 먀오족은 새로운 문화방식으로 우멍산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맹렬한 기세로 번져 나갔다. 1904년 봄, 당쥐런도 이러한 전도열풍을 직접 확인한 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904년 겨울, 당 목사는 처음으로 거부교회 신도들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학교를 운영 계획을 공고하였다. 이 훈련모집에 등록한 사람의 수가 백 명에 달하였고 배우고자 하는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단기 성경학교에 참여한 이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로 훗날 하나님의 교회들을 세우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처음으로 안순에서 말씀을 배운 것은 바로 교회 배가운동의 시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교회의 기둥이 되었던 사람들이 말씀 공부를 마치도록 도왔고, 각지의 교회로 흩어졌다. 그 후 각 교회가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복음의 열매가 맺혔다. 당쥐런이 교회의 첫 번째 세례예식을 위하여 거부를 찾았을 때, 총 140명의 신도가 세례를 받았다. 거부에서 세례를 받은 신도 중에는 왕베드로, 메이리, 왕요한, 룻, 장요셉, 마리아 등 6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6년 여름, 거부 복음당이 완공되었고, 당쥐런과 페이중쳰(裴忠谦) 목사는 헌당 감사 예배에 참석하였다. 세례예식에 앞서 사흘간 세례학습반을 개설하여 초신자들에게 ‘교리문답(要道问答)’을 가르쳤다. 학습기간을 다 채우고 시험을 거쳐 합격을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8일 간의 세례예식이 시작됐다. 이 기간 동안 매일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매일같이 시험과 평가가 있었다. 페이 목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성스러운 일을 전담하였다. 페이 목사는 처음으로 거부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 그는 거부교회 초기의 부흥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오전 내내 먀오족 사람들이 찾아왔다. 예배당은 천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교회에서 예식을 마친 후, 강변으로 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3천 여 명이 자리에 함께 했고, 전도사 한 명이 나를 도왔다. 우리는 강에 들어가 서 있고, 다른 전도사 하나는 명부를 들고 강변에 서 있었다. 이름이 호명되면 세례자는 두 명씩 강으로 걸어왔고, 우리는 세례를 베풀었다. 8일 내내,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세례자들의 교리문답과 시험을 진행했고, 그 후 세례예식이 이어졌다. 저녁을 먹고 나면 저녁 예배를 드리고, 저녁 교리문답이 이어져 자정 혹은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이런 일정은 우리 행사의 규칙처럼 굳어졌다. 8일 동안 세례 받은 사람이 무려 969명에 달했다.” 1912년 거부총회와 각 지부는 전도팀을 구성하여 그들을 비지에(毕节), 다딩(大定, 오늘날의 다방:大方), 나용(纳雍), 쉐이청(水城) 등지의 먀오족 거주지에 파견하여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게 하였다. 전도팀으로 파견된 사람은 거부교회 왕디모데, 싱룽창의 뤄느헤미야, 뤄나다니엘, 다송의 왕여호수아, 장아나니야,옌토우상의 마여호수아, 마스바냐,마오포의 타오아몬 등 8명이다. 전도 중에 마스바냐가 나용 파커어(发科俄)에서 병사했고, 뤄느헤미 야역시 타지에서 병사했다. 전도를 통해 먀오족 거주 지역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1918년 웨이닝과 허장(赫章) 일대에 큰 수해가 났다. 연중 내내 흐리고 비 오는 날씨와 저온현상으로 인해 곡식이 익지를 못해 농사를 지어도 수확이 없었다. 겨울이 되자 밥 지을 쌀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재민을 안정시키고, 재해복구를 돕기 위해 페이 목사는 교회의 각 지부에서 총 24명의 목회자를 선발, 이들을 마구(妈姑)의 아웨이자이(阿维寨)와 주시허(珠市河), 웨이닝의 다반디(大板底) 일대의 이족 마을로 보내어 재난구호양식과 소금, 돈과 같은 물자를 전달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 전도방법은 효과가 매우 좋았다. 왕밍다오(王明道), 이자오양(李朝?)의 공저「웨이닝, 허장지역으로의 기독교 전파가 이족과 먀오족 문화에 미친 영향(《基督教出入威宁、赫章对彝苗文化的影响》」”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허장의 아웨이자이, 주스허, 눠수(诺素), 반팡(板房), 저라오허(者老合), 라오디거오(捞地沟), 파워자이(发窝寨), 차수(茶树), 핑즈상(坪子上), 마췐옌(马圈岩), 룽징(龙井), 웨이닝의 다반디(大板底),뤄부잉(倮布营), 하이쟈(海戛), 쟈니콰이(戛泥块), 신관자이(新官寨), 무청(木城), 서가이구(色该古), 무청(木城)의 줘니우(左?) 등 이족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수가 매우 많았다. 바로 이 때가 교회가 거부의 먀오족 지역에서 이족지역으로 확산된 기점이었으며 이후 매년 발전해 나갔다.” 

2. 교회의 쇠퇴기 (1920-1931)
교회의 쇠퇴기에 예배당은 대규모로 파손되었고 신자 수는 크게 줄었다. 거부교회의 쇠퇴 요인은 크게 내재적 요인과 외재적 요인으로 압축할 수 있다. 당시 거부교회는 역사가 오래지 않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와 같았다. 안정적으로 걸을 수 없고, 시련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외부의 공격에 큰 타격을 입은 교회는 한동안 마비상태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1) 대규모 기독교 파괴의 외부요인
사천성, 꾸이저우성, 윈난성에 살고 있는 먀오족은 유일신 사상을 지니고 있으며, 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그래서 어떤 소식이든 민족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가며 그 속도와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외부적 요인의 예로 다음과 같은 상황이 있다.

*자오통(昭通)과 스먼칸(石门坎)지역에서 류정쿠이(刘正奎), 류정궈(刘正国) 등이 앞장서서 ‘반항양교(反抗洋教)’, ‘소멸토목무장(消灭土目武装)’의 기치를 들고 곳곳에 있는 예배당을 부수고, 교회를 박해하는 등 신도와 교회를 괴롭혔다. 이 와중에 스먼칸 창하이(长海) 인근의 먀오족 지역 예배당 두 곳이 큰 타격을 입었다. 1931년부터 외국 선교사들이 예배당 재건에 나섰다. 다수의 예배당이 파손되고, 많은 신도들의 신앙이 약화된 상태였다. 몇몇 교회는 회복의 희망조차 없었다.
* 강제 활동 중지 명령이 내려진 양안산(杨鞍山-시에수저(邪术者))에서는 홍등교(红灯教) 이진산(李金山)의 군대를 선동하여 핑즈(坪子) 교회를 공격했다. 그들은 예배당과 마을 주민들의 집을 불태우고, 신도를 구타했고, 금품을 빼앗았다.
*당시 거부지역에 일어난 사회혼란으로 교회는 관원, 지주, 토적이라는 3대 세력의 박해를 동시에 받았다. 이로 인해 거부교회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2) 대규모 기독교 파괴의 내부요인
‘개량회(改良会)’의 부작용으로 먀오족 기독교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먀오족 지역에 전파된 후, 당 목사와 전도사들은 먀오족의 전통 풍속이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 목사는 당시 정부 관련인사에게 도움을 청해 총 10개의 먀오족 풍속 ‘개량회’를 조직했다. 1910년 겨울 안순, 3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량회’가 발족되었고, 집행위원회에서 ‘개량회’ 규정 초안을 제정했다. 이 규정들은 갈대, 생황, 퉁소, 커우시엔(口弦)등의 먀오족 전통악기 연주와 과도한 혼인예물 등을 모두 금지했다. 규정위반자는 위반사안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내거나 태형 혹은 제명에 처해졌다. 소위 ‘개량운동’이 거부까지 번져가면서 각 촌과 부락의 신도들은 적극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통악기를 쌓아놓고 기도와 찬송을 한 후에 불로 모두 태워버리는가 하면, 촌락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제사 지낼 때 사용되는 ‘셴산린(献山林)’이라는 거목을 베어버리기도 했다. 그들은 온 마음을 다해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던 것이다. 무속인의 기독교 파괴도 심각했다. 무속인은 섬기던 신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속임수를 썼다. 겉으로는 기독교에 귀의한 것처럼 위장하고, 속으로는 교회를 파괴할 속셈이었다. 그들은 기독교 의식을 모방해 자신이 임의로 세례를 준 후 값비싼 비용을 청구해 기독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또는 선지자를 사칭해 마치 자신이 높은 영성이 있어 천사를 통해 그 메시지를 듣는 것처럼 떠벌리고 다녔다. 익명의 서신을 이용한 기독교 파괴도 있었다. 1921년 거부 하계 대 집회 기간의 일이었다. 우편대행사무소(邮政代办所)의 러우윈보(娄云波) 주임의 아들인 러우위핑(娄玉平)이 익명의 서신을 하나 받았는데 “주 예수님께서 1921년 7월 15일 재림하신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서신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낭독했고, 재림 날짜가 집회기간이었기 때문에 이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다들 짐을 꾸렸다. 온갖 의견이 난무하며 혼란에 빠졌다. 예배시간이 되어도 예배당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어찌할 줄 모른채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웨(岳)목사가 이런 상황을 보고는 왜 그런지 물었다. 누군가 문제의 서신을 건네주었고, 이를 본 목사는 강단 위에 올라가 회중 앞에서 서신을 찢어 버렸다. 그는 러우위핑과 교회 직분자들을 질책했다. 그는 이어서 마태복음 24장 20절과 36절을 반복하여 강독했다. 또한 앞으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집회 참가자들이 안정을 되찾았다. 교회 내부의 갈등과 분열도 문제였다. 웨커둔(岳克敦) 목사가 교회를 이끌어 가던 시기에 교회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웨 목사가 교회내부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일체 관여하지 않았던 탓에 몇몇 시비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그 결과 교회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웨 목사는 낙심하지 않았고, 주일 저녁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시 부흥시켜 주시리라고 굳게 믿었다. 앞서 살펴본 원인들 때문에 거부교회는 크게 퇴보했다. 촌락 단위로, 가족단위로 대거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먀오족은 언어를 중심으로 종교와 민족의 유대관계를 이어가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성,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 해도 같은 민족어만 사용한다면 한 형제요, 동족이었다. 그래서 가족과 친지들을 통해 퍼져나간 소식은 좋은 일든 나쁜 일이든 매우 큰 반향을 불러왔다. 꾸이저우 서북지역만 해도, 크고 작은 촌락 17개가 모두 교회를 떠났다. 거부지역 신도들의 기독교 귀의와 탈퇴는 모두 놀라울 만큼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3. 교회의 부흥기(1932-1955)
1932년 내지의 교회에서 영국 국적의 선교사 라오푸캉(饶富康)과 저우헝스(周恒士)를 안순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거부교회 신도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가 쇠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선 부흥사역을 담당할 목회자 양성에 힘쓰기로 결의하고 핑바(平坝)에서 단기 신학과정을 개설했다. 신학 과정을 수료하면 각기 본 교회로 돌아가 부흥사역을 펼쳤다. 당시 거부 교회에서 참가한 사람은 왕밍룬(王明论)이었다. 두 번째 해에도 안순에서 신학과정이 열렸고, 이에 참가한 사람은 거부교회 전도사인 왕밍룬과 싱룽창 교회의 전도사 주원정(朱文正) 이렇게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학습내용은 주로 전도사의 영성을 배양하여 교회를 부흥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단기 신학과정을 통해서 성령충만을 체험했고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들은 곧바로 교회로 돌아가 열정적으로 부흥사역을 했다. 이때 부흥사역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며, 회개하고 죄를 시인하며 거듭나 영적 성장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었다. 부흥사역은 거부를 기점으로 각지의 교회로 퍼져나갔다. 당시는 그야말로 거둘 곡식은 많은 데 일꾼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왕밍다오(王明道)와 왕밍원(王明文)을 거부교회에 속한 촌락으로 보내어 사역하게 했다. 부흥사역 중에 목회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죄를 시인하였으며, 무리하게 개량운동을 펼쳤던 우를 범한 것을 인정했다. 이러한 부흥사역을 통해서 교회간의 단결을 강화했으며 교회를 떠났던 신자들 중에 다시 돌아온 이도 적지 않았다. 1938년 하계 대집회 시기에는 서북 션자오훼이(神召会)에서 부흥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는 량펑즈(梁鹏志) 목사가 거부교회에 와서 삼일 간 집회를 인도했다. 량 목사는 강단에서 십자가 구속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전달해 회중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울먹이며 세 곡의 주제 찬송을 불렀다. ‘십자가 십자가, 보혈의 십자가(十架十架染血十架)’, ‘주 예수 십자가 고난을 받았네(主耶稣受十架苦刑)’, ’하나님의 아들 예수, 보혈 흘렸네(神子耶稣受膏主)’. 그의 간증과 찬송은 신도들의 마음을 십자가 발 아래로 향하게 했다. 량 목사 설교의 주제는 ‘주 예수의 고난과 우리 생명의 관계’였다. 그는 매번 설교를 마친 후 모든 신자들이 일어나 함께 기도하도록 했다. 대표기도 중에 그는 자주 “할렐루야!”, “아멘!” 을 외쳤고, 때로는 “주여 이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오순절 사건처럼 할렐루야!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성령의 불로 세례를 주소서! 아멘!”이라고 기도했다. 짧은 찬송이 어우러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집회가 끝난 후에는 상찬예식을 거행했다. 떡과 잔을 들고 축복할 때에 량 목사는 목이 메었고, 그 모습을 본 회중들은 감동을 받았다. 집회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고개 숙여 눈물 흘렸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묵상하며 기도했다. 1945년 8월, 목사 두 명이 쓰촨(四川)에서 비지에로 와 집회를 열었다. 거부교회도 이들에게 집회를 열어주길 청했다. 한 명은 충칭(重庆) 구이거후이(贵格会)의 목사 리지안(李既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뉴질랜드 국적의 목사 허쟈저(何嘉辙)였다. 이 두 목사가 거부교회에 와서 ‘부흥 대성회’를 열었는데 리 목사는 독특한 예지력과 설교의 은사가 있었고, 허 목사는 활달하고 낙관적이며 찬양의 은사가 있어 부흥회 인도에 능했다. 두 사람은 팀워크가 매우 좋았다. 부흥회에서 허 목사가 선곡한 주제찬송은 ‘오직 예수, 영원히 예수(惟耶稣,永远耶稣)’, ‘예수예수, 지존하신 이름(耶稣耶稣,至宝贵遵命)’, ‘나 주안에, 주는 내 안에(我属我主,我主也属我)’이 세 곡이었다. 리 목사의 설교 주제는 ‘예수님의 생애’로 예수님의 신성, 예수님의 인성, 세상에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가난,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 부활승천, 재림과 왕 되심 등 8개로 나눠 설교했다. 이 집회로 인해 거부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일게 되었고, 신도들 모두가 성령충만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거부를 비롯한 각 지역의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성령과 은혜로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왕광양 | 중국 현지사역자
번역 | 이보람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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