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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6.30 통권 126호     필자 : 쉬쫑마오(徐宗懋) 프린트   이메일 
[차이나 윈도]
중국역사의 전환점인 신해혁명


올해는 중국 신해혁명 100주년이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가? 우리가 행한 옳은 일들은 무엇이며, 잘못 내린 결정은 무엇인가? 역사의 영상을 통해 사람들이 다각도로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탐구하여,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통해 너그럽고 포용하는 민족으로 오늘날 중국근대의 부흥을 함께 이루어 나가기를 희망한다. 

신해혁명이 100주년이 된 2011년, 중국과 대만 양측의 문화계와 언론계에서 앞다투어 각종 역사를 회고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중국인의 100년 삶의 여정을 탐구하고 있다. 과거 중국은 잦은 정권의 교체와 전쟁으로,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경제? 교육?문화와 과학기술이 모두 발전했다. 이제는 중국인으로써 지난 100년간을 과연 어떻게 지내왔을까 라고 자문하게 된다. 중화민족의 끊임없는 발전에는 자아성찰과 되새김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역사에 대한 영상을 수집하고 정리해 왔다. 이 영상들을 다각도로 탐구하여 보다 너그럽고 포용할 수 있는 민족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역사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신해혁명 100년을 기념하는 2011년에 나는 아편전쟁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대한 역사적 영상을 독자들과 함께 나눔으로 이 나와 함께 중국의 부흥의 길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1911년 10월 10일 밤 8시 중화혁명당의 시옹빙콴(熊秉坤)은 우창(武昌)에서 난을 일으키겼다. 쑨쫑산(孫中山)을 높이 추대하고 즉시 거점을 점령하여 당시 후난 광저우 총독인 장삐아우(張彪)가 장강 초우함대로 도주했다. 그 다음날 우창은 혁명당의 소유가 되었으며, 연이어 한양(漢陽)과 한커우(漢口)도 점령을 했다. 모두가 제 21사단의 리위엔홍(黎元洪)을 중화민국 군정부 후베이(湖北)총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이 바로 우창거병(武昌起義) 또는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 

1911년 반세기 동안의 내우외환을 겪고 난 후, 청나라의 위엄은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 통치 구조 역시 더 이상은 중화민족의 진보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청 선통 3년(1911) 청 황조는 백성들의 압력에 못 이겨 내각을 세웠으나 그 중 만주족 황족 대부분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입헌파들은 몹시 실망을 하여 인심은 점점 혁명으로 치달았다. 그 해 청나라 조정에서 쓰촨과 한커우, 광동과 한커우를 잇는 철도를 국가 소유로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 인해 쓰촨, 후베이, 후난, 그리고 광동 등 4개 성(省)에서 철도를 지켜내자는 운동을 벌였다.국민당 측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우한(武漢)의 3개의 군영을 빼앗아 온 나라를 경악하게 했다.  

혁명이 발발하자 청나라 조정은 육군대신에게 후베이성에 가서 반란군을 멸하라는 명을 내렸다. 또한 해군 제독인 싸쩐빙(薩镇冰)에게 장강의 청윈(程允)과 함께 지원하라고 명했다. 청나라 조정의 육군은 총독인 위엔쓰카이(袁世凱)가 지휘하던 부대라 청나라 조정은 다시 위엔쓰카이를 후난과 후베이, 광동과 광시 성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원래 권력이 지나치게 팽창되어서 황족들에게 배척을 당하여 할 수 없이 고향 허난(河南)에서 칩거했다. 그런데 총독으로 임명되는 틈을 타서 정권을 다시 잡아 보려는 속셈에 다양한 요구사항을 내놓는다. 그 후로 윈엔쓰카이는 황제가 직접 파견한 대신(欽差大臣) 의 신분으로 중국 당시의 대세를 휘어 잡았다. 그는 펑궈장(馮國璋)에게 제1 대대를, 뚜안치루위이(段祺瑞)를 제 2 대대를 통솔하게 했으며 이들은 모두 정예부대로써 청나라 조정의 군대 세력이 다시 강대해졌다. 

위엔쓰카이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 오기 전에 혁명군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진입해서 유가묘(劉家廟)에서 장삐아우의 군대와 싸워 크게 승리했다. 이렇게 두 세력의 전투는 왔다 갔다 하면서 황씽(黃興)이 우창에 도착하여 혁명군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을 받고 부대를 지휘해서 청 나라 조정의 대군들과 전투를 계속 해 나갔다. 그런데 양측의 병력 차이가 너무 심해 결국 청나라 조정의 군대가 한 달 만에 한커우와 한양을 점령했고, 혁명군은 할 수 없이 우창으로 다시 후퇴했다. 겉으로 보기엔 청군이 승리했지만, 우창거병의 바람은 이미 온 나라를 뒤덮기에 이르렀다. 각 성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청나라 조정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으며 청 왕조의 통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위엔쓰카이는 무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혁명군에게 평화협상을 청했다. 공화국의 성립은 이미 모든 백성들의 소원이었고 청 왕조의 멸망은 이미 내정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혁명당의 인사들과 위엔쓰카이의 협력이 오늘날의 중화민국을 탄생케 한 계기가 되어 이로써 중국 역사는 고난과 희망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출처 | 亞洲週刊 第 二十五卷 七期
번역 | 차이나  | 본지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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