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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28 통권 124호     필자 : 김병태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신중국 시기(1949년 이후)의 중국기독교 유적

1920년대에 나타난 토착화운동의 열매는 아주 제한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치리만 현지인에게 맡기고 재정적, 신학적 책임은 계속 서방교회에 남겨졌기 때문이다. 신중국(新中國) 성립과 함께 들어선 공산정권에 의해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는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었고, 기독교는 통일전선의 대오 안에서 사상 개조의 의무가 부여되었다. 험난한 해방운동과정에 동참하지 않았던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민당을 따라가지 않은 일부 기독교인들은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과거 선교사 시기의 기독교와는 다른, 중국기독교의 새로운 운명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오요종(吳耀宗, 1893-1979) 등은 당과 정부의 지지 아래 기독교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 인민이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하는 인민의 교회를 건설하고자 서명운동(약 42만 명이 서명)을 전개하였다. 때마침 터진 한국전쟁 중에 미중(美中) 양국이 상호 재산동결 조처를 취하면서, 조자신(趙紫宸, 1888-1979)은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orld Christian Council)의 주석(主席) 자리를 사퇴하였다. 이어 공산정권은 중국기독교의 보다 철저한 당파성(黨派性)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은 고발운동(控訴運動), 항미원조삼자혁신운동위원회(抗美援朝三自革新運動委員會) 준비위원회의 결성으로 발전하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1954년 7월 베이징의 회중교회(公理宗)에서 열린 제1차 기독교 전국회의를 통해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로 개칭되었다. 사회주의 기독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생산력 수준의 정체가 발견되던 1957년의 정풍운동(整風運動, 反右派투쟁), 1958년의 대약진(大躍進)운동이 시작되면서, 기독교는 한 번 더 개조를 요구받았다. 교회는 연합예배, 합병 등으로 서구의 잔재(殘在)를 청산하고, 교역자는 노동과 학습을 통해 변화되어야 했다. 삼자교회(三自敎會)의 지도자들에게도 제한된 활동만 허용되었다.

곧이어 교회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악몽의 시기가 엄습하였으니, 바로 문화혁명(文化革命)이다. 1966년부터는 종교단체뿐 아니라 종교사무처, 통일전선부(統戰部)까지 해체되었다. 이제 서구 기독교 국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견뎌내야 했다.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체험은, 소위 지하교회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중국 기독교인의 공통경험이 되었고, 진정 중국 현실에 녹아졌다.

 

1978년 공산당 제11차 삼중전회(三中全會)가 개최되면서, 문화혁명의 극좌파적 과오(過誤)가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77년에 종교사무국의 업무가 재개되었고, 종교정책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79년 3월에 당(黨)은 통전(統戰)사업과 종교사업에 대한 '투항주의(投降主義)'와 '수정주의(修正主義)'라는 죄명을 정식으로 씻어주었다. 삼자회(三自會)의 회의가 열리면서 삼자운동의 역사적 성과를 인정하고, 성경인쇄, 교역자 양성, 교회건설, 국제교류 등을 결의하였다.

이어 1980년의 제3차 기독교 전국회의에서는 신중국 이후 삼자회가 성립되면서 중단되었던 중국기독교협회(Chinese Christian Council)의 사무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1981년-1982년에는 각 성, 시, 현의 삼자회 지부(支部)가 속속 재개되었고, 기독교협회 지부도 확대되었다. 이로써 중국기독교는 삼자회와 기독교협회의 양회(兩會)체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종교정책은 헌법 36조에서 규정하는 신앙과 불신앙의 자유, 그리고 국가교육제도의 독립, 외국세력의 비간섭, 사회질서와 공민 신체건강의 보호 등을 기초로 작성되며,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애국세력의 연대라는 관점에서, 국무원과 각 성급(省級) 단위의 종교사무국, 현, 시급(縣市級)의 종교관리 부문이 관리한다. "공무원이 종교신앙 자유를 침해하면 2년 이하의 징역(형법 147조)"을 받게 되지만, 기독교회는 일단 삼자교회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정책은 집회, 결사, 언론, 출판이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해야 한다는 헌법의 제약 안에 놓여 있다.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는 중국헌법의 범위 안에서, 삼자회와 기독교협회는 1986년의 제4차 전국회의로부터 2008년의 제8차 전국회의까지 공동개최하였고, 성경인쇄, 찬양집, 설교집 등 문서출판, 신학교육, 교회건립, 해외교류 등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개혁개방정책의 열매이면서 동시에 비공인(非公認) 가정교회 또는 지하교회에 대한 제재(制裁)와 해외의 종교침투에 대한 견제(牽制)의 이유가 되고 있다.

신중국 초기 또는 문화혁명 시기의 사회적 과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하로 잠입한 교회는 다시 한 번 초월적 순수 신앙을 다짐하고 있고, 때로 외국 종교세력과의 연계로 인하여 당정(黨政)을 긴장하게 한다.
지금까지 7회에 걸쳐, 중국기독교의 역사를 각각의 시대가 갖는 특징과 대표적인 유적을 들어 나누어 설명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전통시대에는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황실의 보호 아래 거점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장안(長安)과 대도(大都)라는 수도의 주변에서 유적이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명청(明淸)시대의 천주교 선교사도 마카오라는 항구를 빼면 주로 난징, 베이징 등의 수도에서 활동하였고, 유적도 그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온 개신교는 다시 마카오를 거쳤지만, 광저우라고 하는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면서 중국선교를 시작하였다. 이곳은 소위 "광동체제(廣東體制)"로 알려진 조공무역(租貢貿易)의 현장으로서, 쇄국 시기의 선교사들이 몸을 숨기고 은밀한 선교활동을 진행한 곳이 되었다. 이어서 난징조약이 체결되면서 기독교의 중심지는 5개 항구로 확대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상하이 중심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불평등조약의 진행과정과 그 영향일 것이다. 그리고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면서부터는 베이징에서부터 전 중국의 내지(內地)로 나아가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과 병원, 출판사 등 규모가 큰 사회적 시설이 전 지역에 세워졌다. 아울러 공세적인 선교는 민중들의 강렬한 저항을 받아 교안(敎案)과 관련된 유적들이 전국적 범위에서 발견된다.

20세기 초에는 다른 차원의 지성적인 반기독교운동과 관련해서 사실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옌징대학, 동우대학(쑤저우대학) 등이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반기독교운동과 기독교에 대한 변증이 모두 이와 같은 대학의 강연이나 출판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교회와 학교, 병원은 계속 발전을 거듭했고, 다만 중국에서의 기독교 연착륙을 위한 토착화의 고민이 여러 수준에서 나타났다. 유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건축물이다. 반제국주의 운동과 국공(國共)내전이 격화되면서 국난(國難)의 극복에 참여했던 상황화(狀況化)의 노력도 있지만, 자료와 연구의 미흡으로 인하여 이번 연재에서는 제외되었다.

마지막으로 신중국 성립 이후 시기의 유적은 베이징과 상하이, 난징으로 구성된 삼자교회 중심지의 유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베이징은 정치 중심지요, 상하이는 교회의 중심지, 난징은 신학과 해외연락창구로 자리 잡았다. 마지막 시기와 관련해서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 있다. 공산정권 이후 가정교회 또는 지하교회와 관련된 역사이다. 이것은 좀 더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교안 또는 반기독교 운동과 관련된 역사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기독교 역사를 교안의 역사 정도로 파악한 중국 학계 분위기의 반영이기도 하다. 사실 교육과 병원, 복지시설 등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기독교 역사유적이 제대로 복원되어 있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어떤 형식으로든 그와 같은 복원 작업의 필요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오요종(吳耀宗) 분묘
 오요종의 분묘는 베이징 북서쪽 서북왕(西北旺)의 베이징교회 능원(陵園) 안에 있다가 지난 2006년 말 상하이로 이장(移葬)되었다. 오요종은 1893년 광동성 광저우시 하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1년 베이징의 기독교청년회에서 주최한 하계수련회에 참석하여 처음 기독교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후 존 모트(John Mott, 1865-1955)의 영향을 받았으며, 1918년(25세) 거듭남을 경험하고 회중교회에 가입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후 경건한 기독교인의 삶을 추구하였으며, 1920년부터는 세무직원 일을 포기하고 기독교청년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주로 옌징대학, 협화의학원, 숭실중학, 회문중학 등의 기독학생회를 도왔다. 1922년 4월 세계기독학생동맹(WSCF) 대회가 칭화대학에서 열릴 당시 오요종은 베이징 기독교청년회 학교부 주임간사였다.

1924년부터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 유학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부인도 드류(Drew)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귀국 후 1927년부터는 청년회 전국협회의 학교부 간사를 맡아 전국을 순회하며 대학 및 중학 내 기독학생회를 섬겼다. 이 당시 학생들과 시대의 문제를 놓고 많은 토론을 벌였으며, 많은 독서를 했고, 사랑의 세계를 만들자는 호소를 하곤 했다. 1931년 일본 침략 시기에도 비폭력 항일운동을 펼쳐 나갔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는 45년까지 내내 성도(成都)에서 집필활동에 주력하였다.


오요종이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게 된 것은 1938년경 부터였으며, 성도에서 반(反)장개석 운동에 참여하고 일본이 패망한 후 상하이에서 기독인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태도를 분명히 해 나갔다. 1948년 발표한 "基督敎的時代悲劇(기독교의 시대비극)"에서 중국의 기독교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를 세워나가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국제관계, 종교계, 학생운동계 등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오요종은 1949년의 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에 기독교 대표로 참석하였고 사회주의 아래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후 애국적 기독교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며, 그 방향이 1950년 7월 28일 발표된《중국 기독교가 신중국 건설 중에 노력할 길》에 실렸고, 삼자운동이 시작되었다. 신중국 건설 초기에 교회와 신학교 건설에 애쓰던 오요종은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학습에 끌려 다니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사인방이 무너지고, 인민대회에 참석하여 종교신앙 자유 관련 헌법 개정을 위해 발언한 직후, 1979년에 장기 입원했던 화동의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979년 9월 2일 상하이 목은당(沐恩堂)의 회복예배를 함께 드리고 난 보름 후였다. 

광저우의 대마참(大馬站) 교회
 임헌고(林獻羔, Samuel Lamb, 1924- ) 목사는 중국의 유명한 가정교회 지도자이다. 임헌고 목사가 이끌며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가정교회는 광저우의 대마참(大馬站) 교회인데, 광저우시 중산 5로(中山5路) 대마참 35호 2층과 3층에 있다. 이곳은 임헌고 목사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으로서, 모임 형태로는 1950년 4월 23일에 시작되었다. 임헌고 목사는 마카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林保羅)은 당시 마카오 백마항(白馬巷) 침례교회(浸信會)의 목사였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아버지로부터 헌고라는 이름을 얻었다. 1936년 홍콩 장주(長洲)에서 침례를 받았고, 1942년 오주(梧州)의 건도성경학원(建道聖經學院)에 입학하였다.

1945년부터는 광저우에서 전도하였으며, 1950년에 대마참교회(大馬站福音會堂)를 설립하였다.
그는 정치 선전으로 인해 순수한 복음이 훼손된다는 이유로 삼자교회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55년, 58년 두 번에 걸쳐 투옥되었다. 대마참 반(反)혁명집단의 두목이라는 죄목이었다. 처음에는 약 1년 4개월, 두 번째는 만 20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후, 78년 5월 29일 만기 출옥하였다. 석방 후 다시 대마참 35호의 집회가 재개되어 어려움 가운데서도 독립적인 형태로 주일예배, 성찬식, 세례준비 학습반, 청년집회, 수요기도회, 목요성경공부, 금요심방모임 등이 발전하였다. 이후 참석인원이 수천 명으로 불어나자 결국 덕정북로(德政北路) 아하당(雅荷塘) 영계리(榮桂里) 15호로 이전하였다. 1979년에『영음소총(靈音小叢)』을 출간한 이후 100여 권의 책을 냈는데, 그 첫 페이지에는 모두 '판권 없음'이라고 적혀 있다. 

베이징의 회중교회 본부(燈市口堂, 미국 會衆敎會 華北敎會 본부)
등시구(燈市口) 29호에 있었던 회중교회는 현재 자취가 사라지고 중학교가 들어섰다. 회중교회가 베이징에 들어 온 것은 미국 보스톤 회중교회 국외선교회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블로젯(Henry Blodget, 白漢理, 1825-1903)이 1854년부터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1864년 브릿즈만(Elijah C. Bridgeman, 裨治文, 1801-1861)의 부인과 함께 베이징에 들어 와서 등시구를 집회 장소로 삼았다. 이곳에 1873년 블르젯이 200명 좌석의 예배당을 지었다.

의화단 난 후에는 배상금을 이용하여 등시구를 남쪽 경계로 하고 삼면(三面)의 도로에 인접하는 대규모 땅을 미국 화북 회중교회 재산으로 삼았다. 그리고 1902년 이곳에 등시구 회중교회 예배당을 지어 1904년 준공하였다. 이 교회는 당시 베이징 최대의 개신교 예배당이었다. 또 유명한 육영(育英)중학, 패만(貝滿)여중이 설치되었다.

1905년부터는 중국인 목사가 담임하였고, 1915년부터는 자립교회를 표방하였으며, 1932년에 왕재중(王梓仲, 1895- )을 목사로 세워 46년까지 담임으로 삼았다.
오요종이 이곳에서 1917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중국기독교 1차 전국회의가 1954년에 이곳에서 열렸고, 이곳에서 1차 삼자회가 성립되었고, 베이징 삼자회 제1차 회의도 1956년에 이곳에서 소집되고 조직되었다.

1958년 이후에는 동당(東堂)으로 이용되다가 1960년부터는 성경회 건물(지금의 兩會본부, 당시 米市堂으로 불려짐)로 예배가 옮겨졌고, 이곳은 학교로 이용되다가 문화혁명 때 철거되었는데, 1981년에 베이징시 부동산국에서 베이징삼자회에 보상하였다. 1990년대 베이징 청하(淸河)의 옌징신학원(燕京神學院)은 원래의 등시구당(燈市口堂)을 모방한 대학교회를 건축하였다. 

상하이의 구(舊) 전국양회(全國兩會) 본부
 중국기독교 전국양회란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 '중국기독교협회'를 가리킨다. 이 양회의 지도를 받는 교회가 곧 삼자(三自)교회이다. 정치적, 문화적 원인으로 인하여 중국 민중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양교(洋敎)'의 별명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중국기독교에 대한 시각은 삼자혁신운동으로 인하여 비로소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 삼자교회의 설명이다. 삼자교회의 제1차 전국회의는 1954년 북경에서 소집되었다.

문화혁명을 거쳐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 동안 삼자교회의 규모는 약 53,000교회(가정교회 포함), 2,000만 명의 신도, 19곳의 신학교로 성장하였다(전국양회 홈페이지 참조).
중국기독교 전국양회의 본부는 지금 상하이 황포구(黃浦區) 구강로(九江路) 219호의 성삼일당(聖三一堂)에 있지만, 최근까지 원명원로(圓明園路) 169호에 있었다. 이곳은 1954년 오요종(吳耀宗)을 비롯한 교계 인사들이 신중국 건설을 기점으로, 토착화(本色化) 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아 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만들고 애국애교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 산실이다. 문화혁명 때에는 폐쇄되었다가 1981년 중국기독교협회가 만들어지면서, 두 기관을 합한 양회의 전국 본부 사무실로 사용되어 왔다. 

난징의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學院) 신구(新舊) 교사(校舍)
오늘날 4년제 본과 과정을 가진, 중국의 유일한 개신교 신학교는 난징의 금릉협화신학원이다. 원래 난징의 대간은항(大鐗銀巷) 17호에 있었는데, 최근에 강녕구(江寧區) 과학원구(科學園區) 강녕대학성(江寧大學城) 안에 새로운 캠퍼스를 조성하였다. 옛 캠퍼스는 1952년 삼일신학원(三一神學院), 중앙(中央)신학원, 중국신학원 등 화동(華東) 지구의 12개 신학교가 연합하여, 구(舊) 난징여자성경학교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문화혁명 이후 1979년 1월에 다시 회의를 열어, 81년 재(再)개교한 이래 오늘날 고등학교 졸업생을 위한 4년제 대학, 3년제 대학원을 두고 있다. 전국에서 학생을 모집하는 유일한 신학교이다. 원장은 정광훈 주교(丁光訓, 1915- )이다. 2005년에 새로운 캠퍼스 조성계획이 확정되어 2008년 완공하고 2009년 4월에 강녕대학성(江寧大學城) 안에서 정식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홍콩과 난징의 애덕기금회(愛德基金會)
애덕기금(The Amity Foundation)은 난징시 한구로(漢口路) 71호에 본부를 두고 있고, 홍콩 사무실은 해외연락을 담당하는 곳으로서, 구룡(九龍) 좌돈도(佐敦道) 4호에 위치해 있다. 애덕기금은 원래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발기하여 1985년 성립시킨 민간단체로서, 해외교회와 협력하여 중국의 우물파기, 관개시설 건설, 발전소 건설, 무의촌 의사 양성, 고아원 운영, 영어교사 양성 등을 촉진시킴으로써, 중국 인민들로 하여금 중국기독교인들의 사회적 기여를 알게 하고, 아울러 국제 교류와 나눔 운동을 증진시키는 데 그 창립 목적이 있다.

부설기관으로 애덕인쇄 공사와 애덕 문화기술경제 교류센터를 두고 있다. 애덕인쇄소는 남경의 동남쪽 교외에 위치해 있는데, 1985년 비정부 민간단체로 애덕기금회가 창립된 이래 가장 중시한 성경인쇄 사업을 전담하는 인쇄소로서 세계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지금까지 1,000만 권 이상의 성경을 보급하였다. 한국교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성서도 출간하였으며, 연간 생산규모는 250만 권 정도이다.


 

 

김병태 | 성화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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