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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31 통권 122호     필자 : 김병태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중국 개신교 성장기(1860-1900)의 기독교 유적

베이징조약(1860)이후, 중국 내륙에서의 기독교는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1860년까지의 선교활동은 주로 언어와 문화 학습, 성경번역, 문서 전도였다. 중국선교 제2기(1860-1900년)의 특징은 불평등조약을 바탕으로 한 전국적, 전면적, 공격적 선교라고 할 수 있다. 통계적으로 보면, 1853년의 중국인 신자 수는 351명인데(외국선교회 22개, 외국선교사 수 150명) 비해, 1865년 약 3,132명, 1900년 약 11만 3천명으로 불어났다. 지역적으로도 양광(兩廣, 광둥성(廣東省)과 광시성(廣西省), 푸젠(福建), 저장(浙江), 장수(江蘇)성과, 산둥(山東), 베이징(北京), 허베이(河北) 지역뿐만 아니라 장강(長江) 유역 및 내륙 깊숙한 곳까지 뻗어나갔다.  

내용적으로는 내지선교회(內地宣敎會)처럼 조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순전히 복음전도에만 전념하는 경우도 생겨났지만, 교육 및 의료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내지선교회의 창시자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戴德生, 1832-1905)는 의료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파커(Peter Parker, 伯駕, 1804-1888), 록칼트(William Lockhart, ?魏林, 1811-1896), 죤 더젼(John Dudgeon, 杜德珍, 1837-1901), 죠셉 엣킨스(Joseph  Edkins, 艾約瑟, 1823-1905) 등이 병원을 통한 선교에 종사하였다. 미국장로교회의 마틴(William A. P Martin, 丁?良, 1827-1916), 성공회의 버든(包約翰, John. S. Burdon, 1826-1907), 쉐레쉐프스키(Samuel I. J. Schereschewsky, 施約瑟, 1831-1906)) 등이 동문관(東文館), 소학교 및 대학 설립 등에 관여하였다. 거의 모든 선교기관들은 병원과 학교를 동시에 운영하였다. 또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회사업을 펼쳐 나갔으며, 나아가서 농업활동이나(John. L. Nevius, 倪維思, 1829-1893) 전족(纏足)반대운동, 아편반대운동(Charles Rogers Mills, 梅理士, 1829?1895) 등의 사회운동, 애국적 사회구제 활동과 문서출판(Timothy Richard, 李提摩太, 1845-1919) 등의 방법으로 병든 사회를 일으켜 살리는 선교사도 있었다.  

한편 이 시기의 특징 중에 중요한 것은, 불평등조약을 통해서 금교(禁敎)가 해제되자, 선교사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내지(內地)선교를 전개하였고, 자기 재산과 사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무리가 생길 때마다 교안(敎案)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천주교에서 과거 200여 년 동안 몰수(沒收)되었던 교회재산이 “환급운동(還給運動)”의 이름으로 귀속(歸屬)되는 과정에서 많은 분쟁이 발생하였다. 1897년의 산둥성 거야교안(巨野敎案)처럼 제국주의 국가가 자기의 침략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한 적도 있다. 많은 경우에는 지방관의 보호를 받는 선교사가 때때로 그것을 특권으로 여기며 현지사회에 군림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교안이 발생했다. 순무(巡撫)처럼 가마를 타고 시가지를 활보한 귀주의 파우리(Louis Faurie, 胡縛理, 1824-1871)가 그 예이다. 중서(中西)문화가 충돌하면서, 또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신사(紳士)계층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교안들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19세기 후반 기독교는 양적으로는 팽창하였으나 질적 하락이 초래되었다. 대량으로 기독교에 귀의(歸依)한 신도중에는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교회의 도움을 바랄 뿐이었기 때문에 “흘교”(吃敎, rice Christian) 또는 “장교”(仗敎)라고 불렸다.

베이징의 영국영사관 
베이징에 처음 들어 온 런던선교회 선교사는 윌리엄 록칼트(William Lockart, ?魏林)였다.  그는 상하이 산동로(山東路) 맥노인거리(麥家圈)에 교회(天安堂)와 병원(仁濟醫院)을 세우는 사역을 했다. 1861년 베이징 동교민항(東交民巷)에 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면서, 수행 의사 신분으로 따라 들어 와서 영사관 옆에 의료실을 세우고 대외 진료를 하면서 중국인을 접촉하고 전도하였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 난 당시 많은 선교사들은 영사관 안으로 피신해 있었고, 특히 1884년 베이징에 들어와서 숭문문 바깥의 동유수정 교회(崇外東柳樹井堂)와 동직문 바깥의 관상복음교회(東直門外關廂福音堂)을 발전시켰던, 스톤하우스(Joseph Stonehouse, 石敦豪)는 당시 영사관 안의 여섯 개 포대 중 하나를 맡기도 하였다.   

베이징의 런던선교회 구지(舊址) 
베이징 동단북대가(東單北大街) 동쪽 동당자 골목(東堂子胡同) 남쪽으로 외교부 거리(外交部街)까지의 일대가 베이징조약 이후 런던선교회가 마련한 선교센터 지역이다. 1863년 후반 금령이 풀리고 공개적으로 선교하면서, 런던선교회는 1865년 미시대가(米市大街, 지금의 東單北大街) 동당자(東堂子) 골목 서쪽입구에 있는 땅을 사서 병원과 학교, 주택, 예배당을 지었다. 당시 이곳은 “쌍기간(雙旗竿) 런던회”라고 불렸으며, 엣킨스 선교사의 책임아래 운영되던 이 기관은 의화단 운동 당시 파괴되었다. 난이 끝난 이후에 다른 교파들과 함께 배상금을 탔으며, 그 재원으로 1901년 코크람(Thomas Cochram, 科令)이 쌍기간 병원을 재건하고 약방도 열었다. 마침 정부고관의 아들을 치료하자 서태후(慈禧)가 은 1만 냥을 하사하여, 1905년 록칼트 기념 의학교까지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시대가 동쪽의 동당자 골목 서쪽 입구 이남부터 외교부 거리 서쪽 이북까지 병원과 학교, 약방, 미시교회(米市堂)까지 집중되었고, 장로교, 북감리교, 성공회, 산시성(山西省)의 내지선교회 등이 이곳 학교에 학생을 보내면서 매년 경비의 일부를 후원함으로써 6개 교파가 연합 운영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후 협화의원(協和醫院), 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이라는 이름 아래 런던선교회가 관장하는 방식이 되었다.

1908년 런던회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성정이(誠靜怡)’ 를 미시교회(米市堂)의 담임으로 초빙하고 이듬해 안수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고, 이후 세계교회와의 협력을 위해 일했다. 한편 1914년 협화의원이 옮겨 갈 때, 원래 자리의 미시교회도, 미시대가 서쪽의 사당(祠堂)을 구입하고 신도가 기증한 그 남쪽 땅을 합한 신 부지에 새로 건축하였다. 신도들의 헌금이 가세하여 1919년에 건물이 완성되었으며, 수덕소학교(樹德小學校)도 함께 세웠다. 이곳이 곧 지금의 동단북대가 43호이다. 개혁개방 이후 현재의 칭허(靑河)로 이전해 오기 전까지 이곳에는 베이징의 옌징신학원(燕京神學院)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필자가 찍어놓은 사진들이 있었는데, 없어져버려 아쉽기만 하다.

베이징의 항와시당(缸瓦市堂)
항와시당(缸瓦市堂, 깡와스교회)는 영국 런던선교회가 개척한 교회이다. 록칼트가 1861년 영국 영사관의 수행 의사로 일하게 된 후, 1863년 런던회는 존 더젼을 다시 베이징으로 파송하고 항와시에 병원과 교회당을 차렸다. 지금의 항와시 교회는 신도 5천여 명으로서, 베이징의 대형 교회 중 하나인데, 1922년에 건축한 건물을 지금도 주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자립, 자양(自養)을 실시하면서 중화기독교회(中華基督敎會)에 가입하였고, 교회 남쪽 정원에는 병원(仁濟醫院)을 세웠으며, 북쪽 정원에는 취문(翠文)소학교 를 세웠다. 교회와 병원, 학교로 구성되는 선교단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1958년 베이징교회가 연합예배를 드리게 되었을 때, 항와시교회는 베이징기독교 서교회(西堂)의 역할을 하였다. 문화혁명 기간에 주민들이 밀고 들어와 사용하면서, 지금 건물은 원래 규모의 2/5로 축소된 것이다. 1993년 이후 10여 년 동안 베이징기독교회 회장이었던 우신립(于新粒) 목사가 담임을 맡았고, 이후 두봉영(杜鳳英, 여) 목사가 현재까지 사역하고 있다.    

상하이의 성 요한서원(聖約翰書院, 현재의 華東政法大學)
성 요한서원은 1877년 상하이의 제1차 중국선교사 대회가 열린 직후인 1879년 미국 성공회 중국지구 주교 쉐레쉐프스키(Schereschewsky, 施約瑟)가 배아학교(培雅學校,1865)와 도은학교(度恩學校,1866)를 합병하여 세운 대학이다. 기독교의 선교 사업을 진일보시키고, 또 근대 중국의 서양식 교육을 일으킨 전형적 교육 사업이었다. 학교 진입로 정면에 있는 도분루(韜奮樓)는 1879년 조가도(曺家渡)에 처음 지었던 성 요한 서원의 건물 중 하나인 사합원(四合院, 중국 전통의 정방형 가옥) 위에, 쉐레쉐프스키(1881년 중풍으로 교장 사임)를 기념하여 1894년에 2층으로 올린 대사합원(大四合院)이다. 건축 당시에 회시당(懷施堂)으로 명명되었고, 영문 이름은 SY Hall인데, SY는 쉐레쉐프스키 이름의 처음과 마지막 알파벳에서 따 온 것이다. 도분루라는 명칭은, 1919년 성 요한서원에 입학하여 공부한 후 탁월한 신문기자, 정치평론가, 출판가로 활동하며 신중국 건설에 공헌한 추도분(鄒韜奮, 1895-1944)을 기념하여 붙였다. 

쑤저우의 동오대학(東吳大學, 현재의 蘇州大學)과 성 요한당((聖約翰堂)
쑤저우대학은 쑤저우 십재가(十梓街)에 위치해 있다. 1899년 미국 남감리교회가 쑤저우의 박습서원(博習書院), 궁항서원(宮巷書院) 그리고 상하이의 중서서원(中西書院)을 합병하여 세운 동오대학(東吳大學)의 후신(後身)이다. 정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동오대학 구지(舊地)였음을 가리키는 옛 정문과 비석(碑石)이 있으며, 그 문을 따라 우회전하면 학교 사무실이나 주택이었음직한 두 건물 사이로 주 건물(主樓)의 후면이 보인다(애초에는 정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 어디를 가도 잔디밭이나 우거진 나무가 자리하고 있어 서양식의 넉넉한 교정을 느끼게 해 주며, 건축양식 역시 유럽식이다. 십재가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쑤저우 제1인민의원(쑤저우의학원 부속의원)’은 박습의원(博習醫院)의 기초 위에 세워진 오늘날 쑤저우 최고의 병원이다. 박습의원 유적(舊址) 옆에 있는 성 요한교회(聖約翰堂)는 박습서원과 함께 1881년에 미남감리교회가 세운 쑤저우 최초의 교회당이다. 쑤저우대학 정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로 개혁개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민간에 개방되지 못했다. 2003년에 활동을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쑤저우의 중심교회로 활약하고 있다. 

광저우의 석실 성심성당(石室 聖心大敎堂, 耶蘇聖心堂)
광저우시(廣州市) 중심가인 일덕중로(一德中路)에 위치해 있으며, 광저우 교구(敎區)에서 가장 웅장하고 특색이 있는 천주교회당이다. 이곳은 원래 청 정부 양광총독부(廣東省과 廣西省의 兩廣總督府)가 있던 곳이었다. 1857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英佛)연합군의 군함이 주강(珠江)에 들어 와 광저우를 포격했을 때 파괴되었는데, 이후 프랑스 정부가 금교(禁敎)시기에 광저우의 성당이 몰수되었다는 구실로 배상을 요구하여, 이 폐허 위에 석실 천주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1863년 6월 28일 성심절(聖心節) 때 정초식을 거행한 이유로 성심대교당(聖心大敎堂)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모든 벽과 기둥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석실(石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당 전면 동쪽 모퉁이돌 위에는 “예루살렘1863”, 서쪽에는 “로마1863”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천주교가 동방의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서방의 로마에서 발전하게 된 것을 표현한 것으로서, 예루살렘과 로마의 진흙덩이 1kg씩을 가져다가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건축 당시 프랑스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세워진 성심당의 건축양식은 고딕식으로 프랑스 파리의 성모원(聖母院)을 본떴다. 정면에서 볼 때 두 개의 석탑이 올라와 있으며, 석탑 위에는 프랑스에서 가져 온 동종(銅鐘)이 있고, 지면에서 탑까지의 높이가 58.5미터인데, 천상을 향해 올라가며 하나님께 귀의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성당 천장은 뾰족한 늑골이 교차하는 돔형으로 되어 있고, 정면의 대문 위와 사방의 창문은 모두 일곱 빛깔 유리로 상감(?嵌)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꽃이나 종교인물을 그려 놓았다. 채색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부드럽고 신비로운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문화혁명 후 1980년에 복당되어, 현재 신도 수는 3천여 명 정도이며, 광저우의 천주교당 3곳 중 이곳이 주교당(主敎堂)이다.

산동의 거야교안(巨野敎案 혹은 曹州?案) 유적

거야교안 유적은 산둥성 거야현(巨野縣) 하관둔향(夏官屯鄕) 마반장장촌(磨盤張庄村) 안에 있다. 교회당과 부속물은 거야교안 발생 후 독일인이 청 정부의 배상금을 이용해 중건(重建)하였으나, 1966년 모두 다시 철거되었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우물 하나뿐이다. 군중들의 기억을 참조하면, 교회당이 1,807평방에 건평 558평방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예배당, 거실, 침실, 탈의실, 수위실, 창고, 주방, 마구간 등이 있었다. 거야교안(巨野敎案)은 당시 마반장장(磨盤張庄)의 독일 선교사 스텐쯔(P. Stenz, 薛田資)가 향리(鄕里)에서 무례하게 행하면서 전토(田土)를 강점하고 부녀를 희롱하여 군중들의 분노를 샀다. 광서(光緖) 23년(1897년) 11월 1일 밤, 20여 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교회당에 진입하여 스텐쯔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마침 양곡(陽谷) 등지에서 사역하던 독일인 선교사 니이쯔(Franz Niez, 能方濟), 호일레(Richard Heule, 理加略)가 들렀다가 참변을 당하였다. 이미 요동귀환(遼東歸還)의 공(功)을 이유로 1896년에 교주만(膠州灣) 조차(租借)를 요구했으나 실현되지 못한 바 있는 독일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청(淸) 정부를 위협하여 광서 24년(1898)에 “중독교오조계조약(中德膠澳租界條約)”을 체결하고 교주만(膠州灣)을 강점, 조계화(租界化, 1899년)하였으며, 교제철로(膠濟鐵路) 건설권을 얻는 등 산동(山東)을 독일 세력범위 하에 두었다. 

허베이성의 관현교안(冠縣敎案) 유적(義和團 운동의 발원지)
의화단은 원래 기독교가 산둥에 들어오기 전에 향토를 보호하기 위한 “향단(鄕團)”으로서 산동, 직예(直隸) 경계지역 등에 이미 존재하였다. 이들은 평소 권법을 연마하다가 때와 장소를 정해 자웅을 겨루는 “양권(亮拳)” 행사를 열곤 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말 외국교회가 산둥 각지에서 세력을 확장해 가자, 바로 “보위신가(保衛身家), 방어도적(防禦盜賊)”의 목표가 생기게 되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의화단 운동의 발원지를 산동 관현 십팔촌(冠縣 十八村)과 직예 위현(直隸 威縣)으로 본다. 관현교안(冠縣敎案)은 옥황묘(玉皇廟)를 교회당으로 개조한 것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 교회당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두 곳은 모두 현재 허베이성 위현(威縣)에 속해 있는데, 최초로 천주교회를 반대하여 3천명 규모의 집회가 일어난 것은 광서 24년(1898년) 10월 3일이다. 그들로부터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구호가 발전하였다.  

이어서 1899년 가을 평원현(平原縣)의 민교(民敎) 분쟁으로 다시 증폭되었으며, 1900년 4월경에는 베이징, 톈진, 바오띵(保定) 지구까지 급속히 발전해 갔는데,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은 연합하여 청 정부에 압력을 가하게 되었고, 청 정부는 마침내 6월 21일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발포하고 의화단에게 공사관 공격을 명하였다. 조정의 승인과 장려를 얻은 의화단은 연합군의 침략에 반대하는 전쟁을 했고, 전국적 규모의 반기독교 운동을 일으켰다. 직예(直隸), 중국 전역에 이르기까지 수개월간 많은 군중들이 분기(憤氣)하였다. 그러나 1900년 7월 연합군이 톈진을 점령한 후, 위협을 느낀 청 정부는 일체의 책임을 의화단에게 돌리고 의화단을 진압한 후, 열강과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하고 말았다. 의화단 난으로 인해 기독교 측에서 피살된 선교사는 134명, 자녀들 52명 등 186명가량이었고, 중국인 신도 1,912명이 살해되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단체는 내지선교회였는데, 전체 피해의 1/3 이상에 해당하였다.




김병태 | 배재대학교 복지신학과 교수 ·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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