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이저우에 있는 교회.JPG) 윈난 소수민족 거주지의 기독교 분포상황과 문화교류의 수단이자 매개체인 소수민족 언어문자를 연결해 보면 양자 사이에 적잖은 대응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활동과 언어문자의 연계는 기독교가 소수민족 사이에서 전파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소수민족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소수민족과 언어문자상황 및 교회분포의 관계 윈난 소수민족의 지리적 분포는 문화배경 및 계통의 다양성과 대응되어 언어문자의 분포와 사용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남아시아어계와 알타이어계인 뿌랑(布朗)족, 더앙(德?)족, 와(?)족 및 멍구(蒙古)족, 만(滿)족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장어계(漢藏語系)의 장면어족(藏緬語族)에 속한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더라도 분포지역과 갈래가 다르기 때문에 언어에서 지역적 차이가 드러나며 이는 기독교의 분포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남아시아어계 맹고면(孟高綿)어족의 와족과 한장어계 묘요(苗瑤)어족의 먀오(苗)족 및 장동(壯?)어족의 다이(?)족을 제외하면 윈난 소수민족 사이에서 기독교는 주로 한장어계 장면어족인 이(?)족, 하니(哈尼)족, 리쑤(??)족, 징포(景?)족, 라구(拉古)족, 두룽(獨龍)족, 누(怒)족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동일어족의 소수민족 내부에서도 지역 및 갈래의 차이가 커서 같은 민족임에도 지역과 갈래에 따라 방언, 차(次)방언, 토속어 지역이 나뉘게 된다. 이와 함께 기독교 역시도 소수민족의 지역분포에 따라 각각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먼저 이족, 먀오족, 하니족, 다이족, 징포족과 같이 민족 내부의 언어 차이가 큰 민족에 전래된 기독교는 언어의 불균형적인 대응관계가 확연히 드러나 교회가 특정 언어지역에만 주로 분포되고 그 외의 지역에는 개종자가 극히 적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먀오족 내부에서는 쓰촨(四川), 꾸이저우(?州), 윈난 방언 구(區)의 동북쪽 차방언 지역, 이족에서는 6대 방언지역 중 윈난 동북쪽과 북부지역을 위주로 한 동부권, 하니족에는 주로 비카(壁?) 방언지역 중 비웨(壁約)와 카둬(?多) 두 토속어 지역, 다이족에게는 시솽반나(西雙版納) 방언 중 다이야(?雅)어 사용지역, 징포족에는 징포방언 사용지역 내에 기독교가 주로 전해되었다.
또한 리쑤족, 라구족, 와족, 두룽족과 같이 민족 내 언어 차가 적은 민족에는 교회도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었다. 예를 들어 리쑤족, 라구족, 와족에는 교회가 넓은 지역 내에 조금씩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물론 집중적으로 분포된 지역도 있으나 언어와의 대응관계는 명확하지 않고 현지 사회의 상황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두룽족 지역에서도 교회의 분포와 두룽어 사용인구 분포 사이에 대응관계가 있지만 그보다는 타 지역, 타 민족 문화의 영향을 받아 결정된다.
자민족 내부의 언어에도 차이가 크고 다른 민족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누족 등은 교회가 다른 언어로부터 받은 영향 및 언어의 통일 정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누족은 주로 누강(怒江)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리쑤족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다. 리쑤어의 사용이 제법 보편화되어 현지의 기독교 상황과 리쑤족의 분포가 대체로 일치하며 단지 북쪽 끝 지역만이 티베트족의 영향을 받아 티베트어 경전과 불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윈난 소수민족 사이에서 기독교의 전파와 언어 사이에는 명확히 대응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에 그친 채 언어의 범위에서만 논한다면 편향된 관점에 불과할 따름이다. 앞에서 몇 차례 강조했던 사회상황의 결정적 영향 외에 언어와 관련된 문자 상황 역시도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다.
윈난 소수민족은 역사적, 사회적 제약 때문에 다이족이나 티베트족, 나시족 등을 제외하곤 자민족의 문자를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물론 이족이나 먀오족, 리쑤족, 두룽족은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지만 이족이나 먀오족 같은 경우 언어 갈래가 너무 많고 차이가 커서 통일이 어려웠으며 리쑤족이나 두룽족의 경우 역사가 짧고 보편화되지 못해 발전이 힘들었다. 따라서 기독교가 윈난 소수민족에 전파되면서 발전하던 중 소수민족의 문자를 만들고 보편화시키는 데 독보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전반적으로 극소수 지역을 제외하고는 윈난 동북쪽이나 북부 먀오족 지역, 서북 리쑤족 지역, 서쪽 징포족 및 서남쪽 라구족, 와족 지역 등지에서 교회가 민족의 문자를 만들어 주고 보급하면서 활동을 해왔으며 이것이 기독교 발전에 큰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윈난에서 선교사들이 만들고 보급한 소수민족의 문자들은 모두 병음의 형식으로 만들어져 사용범위와 소수민족들의 언어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생겼다. 윈난의 소수민족은 갈래가 많고 분포된 지역이 넓어 언어의 지역차가 크다. 이는 그간 교회의 언어 창제와 전파에 장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표음 문자라는 간편성 때문에 빠르게 대중화되었으며 교회의 발전과 현지 사회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가져왔다. 교회의 문자 창제와 보급 선교사들이 선교활동 초기에는 각 소수민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중시했으나 문자가 사용되면서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한자나 다이어, 미얀마어, 베트남어, 라오스어 등 다른 민족의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점차 소수민족의 언어를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20세기 들어 각 교회에서 적극 활용하는 방식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소수민족의 문자를 만들면서 훈련반을 만들고 종교서적을 번역해 소수민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기독교의 빠른 발전을 도왔다. 현행 자료에 따르면 20세기 이래 선교사들이 만들어 보급시킨 소수민족의 문자는 다음과 같다. 1) 먀오문(苗文) 먀오족은 일찍부터 자신들의 문자가 있었지만 문자 자체의 발전 및 보급, 사용에는 한계가 많아 사실상 문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교회가 빠르게 성장함에 비해 문자 전파수단은 열악해 어떻게든 먀오문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 선교사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1906년 영국의 선교사 폴라드가 꾸이저우 스먼칸(石門坎) 지역에 선교를 하면서 현지의 한족과 먀오족 지식인들의 도움에 힘입어 먀오어 윈난 동북 차방언의 발음을 기초로 라틴 대문자 자모와 먀오족의 꽃무늬 장식 변형을 참조해 먀오어의 병음문자안을 마련했다. <먀오문기초(苗文基礎)>, <먀오문원시독본(苗文原始讀本)> 등의 교재를 펴냈으며 1915년에는 먀오문 성경을 번역해 출판했다. 이 문자는 ‘폴라드 먀오문(Pollard Script, 폴라드 주음자모)’라 이름이 붙여져 윈난, 꾸이저우, 쓰촨 세 성의 접경지역 먀오족 사이에서 넓게 퍼졌다. 멀리 떨어진 윈난 남부지역의 원산(文山), 카이위엔(開遠) 일대까지 퍼져 먀오문이 선풍적 인기를 끌며 빠르게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먀오문이 만들어져 보급되면서 서남부 소수민족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먀오문 생성방법은 다른 문자에서 많이 차용되었으며 먀오문의 주음자모는 다른 소수민족의 문자 생성이나 성경 번역에 그대로 사용되었다. 나시족의 나시어 마가복음(1932), 윈난 북부 라자(喇家)어 마가복음(1912), 요한복음 두 권과 북부 산악지역 커보(柯波)어 마가복음(1913), 동리쑤어 성경 단권 4종, 요한전서(1951), 서리쑤어 성경 단권 4종(1921-1932) 등이 모두 폴라드 주음부호를 사용해 번역된 것이다. 2) 징포문(景?文), 와문(瓦文) 징포문의 형성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1876년 미국 선교사 추샹(庫森, Cushang)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는 오랫동안 중국과 미얀마의 접경지대인 징포족 지역에서 활동하며 천 여 개가 넘는 징포어 어휘를 수집해 미얀마어의 병음표기방식을 합쳐 징포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만들어진 징포문이 많은 징포어를 다 표기할 수 없어 실패로 돌아갔다. 1890년 미국 선교사인 한슨(漢遜, O.Hanson)이 미얀마 빠모(八莫)지역에서 만 여 개에 달하는 징포어 어휘를 수집해 1892년 1차 수학교과서를 만들었다. 교과서는 1895년부터 빠모와 미즈(密支) 지역의 교회학교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 뒤 1915년 영국인 임란(英若, Imram)이 한슨의 교과서를 기초로 수학 교과서 4권을 펴내고 미얀마 정부의 승인을 거쳐 정식으로 보급하게 되었다. 그 후 교회의 세력이 윈난 징포족 지역에 점차 확장되면서 징포문 역시 윈난 징포족 지역에 펴지기 시작했다.
징포문이 보급되는 과정에서 징포족 내의 자이와(載瓦) 계통과 징포계통의 언어 간 차이가 많았기 때문에 1918년 프랑스 선교사 윌리엄이 미얀마 자이와 거주지에서 라틴어 대문자의 자모와 그 변형 부호로 자이와 표음문자를 만들었다. 그는 이 문자로 미국에서 교재를 편찬한 뒤 현지 성경학교에 제공했다. 1927년 미얀마 자이와인인 춘레이농라(春雷弄拉)가 교재를 편찬하면서 성경 등 종교서적을 번역해 현지의 교회학교에서 사용했다. 자이와 문자는 그 후 윈난의 일부 교회학교에서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다지 많이 알려지진 않았으며 영향력도 적었다. 3) 리쑤문(??文) 선교사들이 윈난에서 만들어 보급한 리쑤문은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의 두 종류로 나뉜다. 그 중 호주 선교사가 먀오문의 영향을 받아 윈난 우딩(武定), 루취엔(祿勸) 등의 방언으로 먀오문 자모와 비슷한 리쑤족의 표음문자(동리쑤문)를 만들었다. 동리쑤문은 현지 리쑤족 교회에 보급되었지만 사용범위와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동리쑤문으로 1912-1951년 사이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등 성경을 단권으로 4종류를 출판했고 신약전서의 역본도 나왔다.
그 외 윈난 서북지역의 리쑤족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영국인 선교사 프레져와 미얀마 커룬족 선교사 바슈(Rev. Bathow)가 1913년 새로운 라틴 자모와 변형 형식의 리쑤족 표음문자(서리쑤문)를 함께 만들어 윈난 서북부 리쑤족 거주지에 보급했다. 1921년에서 1950년 사이에 마태복음 등 성경 단권을 4종 출판했고 신약전서 역본 및 신약과 시편을 함께 펴내어 많은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4) 이문(?文) 교회에서 이문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족에겐 천주교 선교사들이 만들어 낸 지역 문자를 비롯해 이미 여러 가지 이족 문자가 존재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언어의 편차가 심해 함께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17년 영국 국적의 한 호주 선교사가 ‘폴라드 주음자모’를 기반으로 루취엔현의 싸라오우(撒老塢) 이족지역에 이족의 표음문자를 만들어 찬송가인 송주성가(頌主聖歌)와 신약전서 등을 번역했다. 그러나 영향은 크지 않아 일부 지역의 성도들과 신학교에서만 잠시 사용되었다. 5) 라구문(拉古文), 와문(?文)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라구족과 와족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다이문을 사용했지만 효과가 미미했다. 그래서 징포문이 만들어진 이후 미안마 등지의 라구족 지역 선교사들이 징포문의 형식을 참조해 라구족의 표음문자를 만들었고, 1908년 마가복음 라구문 번역본을 펴내었다. 라구문은 1920년 이후 윈난 라구족 지역의 교회에 보급되기 시작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구문의 성공에 힘입어 미국 선교사들이 와족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와족의 표음문자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했지만, 언어의 편차가 심해 인해 부라오커(布饒克) 방언 지역인 란창현(瀾滄縣)의 상윈(上允), 원동(文東) 지역에 사용이 국한되었고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6) 두룽문(獨龍文) 1917년 즈음에 미얀마 두룽족의 바이지더우(白吉斗)가 라틴 표음문자를 만들어 그 지역의 러왕(日旺)씨족에게 ‘러왕문’으로 불리게 된 것을 후에 미국 선교사 모르스 부자가 적극 보급해 수많은 성경 번역본과 종교서적을 펴내어 윈난 두룽족 지역에 시험적으로 보급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7) 나시문(拉西文) 나시족은 일찍부터 자신들의 문자가 있었으나 사제(東巴)계층에게 독점되어 둥바문(東巴文) 이라 불리웠고 일반인들은 전혀 익힐 수 없었다. 1930년 전후로 네덜란드 선교사가 라틴어의 자모와 그 변형으로 나시족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리쟝 나시족지역 선교에 이용하기 위해 1932년 나시문 마가복음을 펴내었다. 그러나 나시족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무리가 극히 적어 사용된 범위와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8) 화야오다이문(花腰?文) 다이족은 일찍부터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언어 간의 상이성으로 인해 사용범위가 넓었음에도 지역적인 한계로, 여전히 문자가 없는 지역이 많았다. 20년대 초 선교사들은 원강(元江) 일대 다이족 지역에서 라오스 자모 주음방식으로 발음을 표기한 현지 다이어의 표음문자를 만들어 보급에 나섰다. 그러나 효과와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40년대 말 독일의 한 선교사가 신핑(新平)현 모샤(漠沙) 등지의 다이야(?雅) 또는 화야오다이(花腰?)라 불리던 다이족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선교사의 부인과 현지 다이족 지식인 다오피쉰(刀丕訓) 등이 함께 한어의 주음자모방식을 이용해 다이족 문자(신핑다이문(新平?文), 또는 화야오문(花腰文)으로 불림)을 만들어 현지교회에서 사용했다. 그들은 이 언어로 누가복음과 여러 찬미시(讚美詩)를 번역했으며 <노예에서 총리로(요셉이야기)> 등의 종교서적을 편찬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역시도 소실되어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소수민족사회에서 문자가 출현한 것은 소수민족 발전사에 있어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문자들이 비과학적인 측면이 있고 각 민족의 수요를 다 충족시켜주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대대손손 전해 내려온 구전의 역사를 크게 바꾸었고, 글을 나무 등에 새기던 낙후된 상황을 개선해 그리스도교가 윈난의 많은 소수민족에게 가장 장기적이고 심원한 영향력을 끼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문자포교활동의 특징과 영향 소수민족의 자체 문자 생성은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선교적인 측면에서도 넓은 범위의 대규모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전략이 되었다. 교회의 문자교육사업이 추진되면서 교회학교가 대거 생겨나고 많은 지역에 교육의 열풍이 불게 되었다. 민족문자와 교회학교를 매개로 추진된 교육사업은 짧은 시간에 급격하게 퍼져 나갔다. 윈난, 꾸이저우, 쓰촨 세 성의 접경지인 먀오족 지역의 감리교 서남교구는 1950년까지 5개의 중고등학교와 백여 곳의 소학교를 개설해 거대한 교육시스템을 형성했다. 이러한 교회학교들은 30년간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당시 0%에 가깝던 먀오족의 교육수준을 급격히 끌어올려 한족을 제외한 기타 소수민족 중 최고로 만들었다. 20C초에서 1949년까지 우멍산(烏蒙山) 2/3의 먀오족이 모두 4권으로 이뤄진 <평민야과독본(平民夜課讀本)>을 모두 읽을 수 있게 되어 문맹퇴치의 기준이 되었으며 초등교육을 이수한 졸업생이 수천명, 중등교육을 받은 먀오족 학생이 200여 명, 고등교육을 받은 먀오족 학생이 30여 명에 달했다. 그 중 2명은 박사학위까지 수여했다. 웨이닝(威寧)현의 먀오족은 전체 인구의 6%에 불과하지만 해방 초기의 통계에 따르면 웨이닝 현 소학교의 학생 10,066명 중 먀오족이 1,431명으로 전체의 14%를 차지했다. 또한 소학교의 교사 252명 중 먀오족 교사가 58명으로 전체의 22%를 차지했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먀오족 인구의 비율도 한족을 포함한 현지 다른 민족보다 월등히 높았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한족의 비율은 20-30%였으나 먀오족의 비율은 50%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먀오족 뿐 아니라 다른 소수민족의 상황도 대체로 비슷했다. 그 중 징포족 지역의 교회학교가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을 이뤄냈다. 윈난과 미얀마의 접경지대 북부에 위치한 징포족 지역에 피엔마(片馬)에서 미즈 방향으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마을에는 모두 소학교가 위치했고 작은 마을들에도 2-3마을에 학교가 하나씩 있었다. 이들 소학교는 학비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옷과 학용품, 식사까지 제공했다. 교사는 미얀마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징포족들이 맡았으며 교회의 교리 등을 가르쳤다. 누강의 리쑤족과 누족 지역에도 교회학교의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문자보급활동이 효과를 거두면서 민족의 반 이상이 다 글을 깨우치게 되었다.
민족문자의 생성은 소수민족들의 문자교육에 대한 열정을 일으켰고 소수민족 문화교육사업의 전개를 촉진했다. 이에 반해 중국어(漢語)를 위주로 실시하던 학교의 강제교육은 각 소수민족들의 강한 반발을 일으켜 기독교의 민족언어를 매개로 한 교육운동과 선명한 대조를 보였다.
그러나 교회의 문자보급과 학교교육사업이 객관적으로 소수민족의 문화발전을 꽃피웠으나, 사실 선교사들의 본래 의도가 그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소수민족의 문자를 만들어 보급하고 교회학교를 개설한 목적은 모두 이를 통해 선교활동을 추진하고 문자라는 매개를 통해 복음에 대한 의식과 생각을 심어주고, 소수민족 선교사를 양성해 그들 사이에 기독교의 빠르고 효과적인 전파를 위함이었다.
그래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윈난 소수민족 지역에 수백 곳에 달하는 소학교와 중등학교를 개설했으며 여러 형식의 훈련반과 속성반을 만들었다. 학교교육에 대한 각 교회의 태도가 다르긴 했지만 문자교육과 학교교육을 빌어 종교를 전파한다는 목적은 완전히 일치했다. 이러한 점은 일반 학교교육에서 확연히 드러날 뿐 아니라 각 민족들에 대한 훈련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윈난 북부 지역의 먀오족 교회학교에서 궈수이펑(郭水峰)이 먀오문 글자교본을 펴 냈는데 그 1과의 내용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근본이 아버지와 함께 도처에 있더라’이며, 2과는 ‘신은 영원토록 스스로 계신 자시며 태초부터 끝날까지 한결같으신 분으로 전지전능하시며 어디에든 계신 분이다’라는 내용이다. 당시 유행했던 찬미시의 첫 구절 역시 ‘내 집은 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네. 이 곳에서 고통 받는 자 멸망함이 없으며, 이 땅에서 나는 손님일 뿐이나 하늘나라가 내 집일세’이다. 그 다음 구절은 ‘천지가 없을 때부터 하나님이 계셨으니 그는 처음도 끝도 변화도 근원도 없으시며 스스로 계신 삼위일체의 유일한 주재자시라’이다. 마찬가지로 윈난 서쪽의 징포족 지역 교회학교의 커리큘럼을 보면 저학년은 영어와 징포문을 위주로 미얀마어와 성경공부를 부가적으로 배우지만 3, 4학년이 되면 성경공부가 주 교과가 되어 영미 국가의 물질문명을 위주로 한 지리, 서적 등을 교과과정으로 삼았다.
윈난 서부 라구족과 와족 지역에는 미국인 용웨이리(永偉理) 선교사가 6학기(일설에는 5학기)로 이루어진 라구문, 와문 반을 개설했다. 매 학기는 3-6년으로 서로 다르며 각 지역에서 선별된 성도들이 수업에 참여해 졸업 후에 성적이 좋을 경우 미얀마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고 나머지는 각 지역으로 돌아가 문자의 보급과 선교사업에 투입되었다. 이 훈련반은 20여 년간 지속되면서 라구문을 익힌 학생을 천 여명, 와문 학생 500여 명을 양성했다. 그 중 반 수에 가까운 수가 선교에 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 중, 소 세 등급이 다시 교육을 수료한 연한에 따라 나뉘었는데, 이로 볼 때 교회가 문자보급과 선교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이 교회학교사업을 매우 중시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시했던 것은 실제적 ‘선교효과’이다. 따라서 감리교나 독일 내지선교회 등 극소수의 교파에서 신자들의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해 중등학교를 일부 만든 것 외에 대부분은 그저 초등교육에 집중했다.
이밖에 내지나 문화교육이 발달한 지역에 교회의 교육이 종교와는 분리되기 시작했고 학생 중 성도의 비율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학생 중 성도와 비성도 간의 대우차이도 점차 줄어들었고 학교의 교과내용 및 과정 역시 점점 일반화, 규범화 되어갔다. 그러나 윈난의 변두리 소수민족 지역에는 교회의 학교교육이 여전히 종교와 분리되지 않아 교육내용 역시 종교적이거나 민족문자에 관련된 것이 많았고, 교회가 곧 학교이며 학생이 곧 성도인 현상이 뚜렷했다. 그래서 윈난의 선교사들이 소수민족의 문자를 만들어 보급하고, 교육하는 일에 힘을 썼고, 교회 개척도 내지보다 더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동시에 이같이 종교와 문자교육, 학교교육이 일체화되면서 기독교가 윈난 소수민족의 문화발전과정 중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쥔쉐(韓軍學)│중국 현지 사역자 번역│장유리ㆍ자원봉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