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번역중인 모리슨과.jpg) 독일 경건주의와 영국 복음주의의 부흥은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의 발전과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기독교를 일거에 세계인의 종교로 전환시켰다. 그리하여 아직 중국이 정식으로 문호를 개방하기 이전에 제한된 형태의 무역을 하는 장소에 선교사들이 나타났다. 그곳은 광저우 성루(城樓)에서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주강(珠江) 언덕에 있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The East India Company)와 중국의 십삼양행(十三洋行)이 만나 거래를 행하는 이곳이 곧 선교사들의 최초 거점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개신교 선교사는 런던선교회에서 파송한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羅伯特 馬理遜, 1782-1834)이었다. 모리슨은 1807년 광저우에 도착하여 동인도회사의 직원 신분으로 중국어를 공부하고 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성경 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동인도회사 당국도 싫어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외로운 작업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모리슨은 25년간 중국에서 일하는 동안 21권의 영문서적과 12권의 중문서적을 출판하였다. 모리슨은 채아고(蔡亞高, 1814년)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으며 중국인 최초로 양아발(梁亞發, 1789-1855)에게 안수하였고, 중국어 성경번역을 지도하였으며, 그밖에 교육, 의료사업을 통해 중국선교의 기틀을 다졌다.
로버트 모리슨을 돕기 위해 런던선교회가 두 번째로 파송한 선교사는 밀른(William Milne, 米憐, 1782-1822)이다. 그러나 밀른은 당시 외국인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관계로 모리슨의 전략적 결정에 따라 몇 년 만에 말라카(Malacca)로 후퇴하였다. 따라서 말라카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곳에서 양아발이 밀른을 도와 성경을 번역하면서 세례를 받았고, 영화서원(榮華書院, Anglo-Chinese College), 영화인쇄소(榮華印刷所) 등이 출발하였다. 로버트 모리슨의 아들 존 모리슨(John R. Morrison, 馬儒翰, 1814-1843)은 양아발과 함께 이곳의 영화서원을 졸업한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영화인쇄소에서는 1823년에 드디어 중국어 완역 성경《神天聖書》을 출판하였다.
모리슨과 밀른을 뒤이어 메드허스트(Walter H. Medhurst, 麥都思, 1796-1857) 등의 런던선교회 선교사들이 뒤를 이었고, 독일의 귀츨라프(Karl Gutzlaff, 郭士立, 1803-1851) 역시 초기의 주요한 인물이었다. 특히 미국의 파커(Peter Parker, 伯駕, 1804-1889)는 광저우의 십삼행 구역 안에 최초의 안과병원을 개설하여 의료선교의 문을 열었다. 한편 양아발은 최초의 중국인 전도자로서 헌신적인 선교활동에 비해 별다른 유적을 남겨놓지 않은 인물이지만,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과의 관련성으로 인해 주목을 받는다.
광저우의 문화공원 광저우의 인민남로(人民南路) 서쪽의 주강(珠江) 마루에 있다. 이 일대가 명청시대 이래로 광주 십삼행(十三行) 및 이관(夷館)이 집결해 있던 곳이다. 1861년에 영국군이 사면(沙面)을 점령하여 직접 상업 지구를 관리하기 전에, 거의 모든 양행(洋行)과 이관(夷館)은 이곳에 집결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당시 이곳은 최대의 상업 발달 지구였다. 모리슨, 밀른 등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바로 이곳에서 신분을 감추고 중국어를 공부하며 중국선교를 준비하였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기까지만 해도 그 건축물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 점령시기에 폐허로 변했고, 1956년에 오늘의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문화공원 북쪽에는 십삼행로(十三行路)라는 길이 있어서, 당시의 유일한 흔적이 되고 있다.
마카오의 모리슨 가족묘와 기념교회 모리슨 기념교회는 마카오(白?巢前地)에 있는 것으로, 1821년에 마카오 최초의 교회로 세워졌으며, 1922년에 증축되었고, 현재 성공회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개신교도 외국인의 집회와 장례의식 등을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외곽 담장이 특별히 높은 것은 천주교 지역이었던 이곳 마카오에서 개신교 집회 장소가 외부 세계와 어느 정도 차단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교회당의 창문은 돔형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문 앞에 몇 개의 작은 의자가 있고 주위 환경은 조용하고 온화하다. 교회당 안에는 열 개 정도의 긴 의자만 있고 꼭대기에는 원래의 대들보가 남아있어서 고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리슨 기념교회당 뒤쪽에는 동인도회사가 1814년 모리슨의 부인 메리(Mary)의 묘지로 마련해 준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에 로버트 모리슨 부부와 아들 존 모리슨 등 두 아들의 묘가 있다. 중화기독교회 광동협회는 1934년 8월 1일에 모리슨의 묘 우측 담장 밑에 로버트 모리슨 별세 100주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마카오의 지도당(志道堂) 정확한 이름은 중화기독교회 지도당(中華基督敎會志道堂)이다. 마카오 마대신가(馬大臣街) 5호A에 있으며, 로버트 모리슨에게 중국인 채고(蔡高 또는 蔡亞高)가 최초로 세례 받은 것(1814년 7월 16일)을 기념한 교회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906년 6월 16일(1917년 10월 설도 있음)이며, 안에는 유치원이 있었다. 1988년에는 모금을 통해 학교 건물을 확충하여 모리슨 기념 학교로 발전하면서 중학교, 소학교, 유치원을 모두 유치하게 되었다. 교회당 안에는 “복음이 처음 도착한 땅”이란 뜻의 “福音初至之地”라는 액자가 있다.
홍콩의 영화서원(英華書院) 로버트 모리슨이 밀른에게 위임하여 중국선교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곳으로 원래 1818년 말라카에 세운 학교이다. 유럽의 과학지식과 중국어, 문화를 가르쳤으며, 숙식을 제공했고, 장학제도, 인쇄소를 두었으며, 양아발, 존 모리슨 등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남경조약 이후 런던선교회가 홍콩으로 이전하자 1843년에 영화서원도 홍콩의 모리슨 힐(摩利臣山)로 옮겨짐으로써 홍콩 첫 번째의 서양식 학교가 되었다. 1844년에는 영화신학원으로 개칭했고, 1945년 11월에는 첫 번째의 영국 유학생단을 파송하였다. 1865-1912년 사이에 재정의 어려움으로 중단되었다가 1913년에 복교되었다.
광저우의 손중산 기념의원 박제의원(博濟醫院)의 후신으로, 1835년 미국 선교사 피터 파커(Peter Parker, 伯駕)가 광저우에 세운 안과병원으로서, 중국 최초의 서양식 의원이다. 문화공원 근처의 주강(珠江) 옆 연강서로(沿江西路)에서 장제대마로(長堤大馬路)로 들어서면서 곧바로 찾아볼 수 있다. 손문(孫文)이 이곳에서 의학을 공부한 인연으로 손중산 기념의원이 되었다. 지금도 박제의원이라는 명패의 흔적이 있는 건물이 남아있다.
김병태 | 배재대학교 복지신학과 교수 · 교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