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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30 통권 120호     필자 : 강인규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미국 최초의 한학자(漢學者) 윌리암스

이번 호에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외교관으로, 그리고 또한 한학자(漢學者)로 활약한 윌리암스(Samuel Wells Williams, 1812-1884)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미국선교회에서 문서선교를 위해 중국에 파송한 인쇄기술자였다. 윌리암스는 중국에서 40년동안 활동하면서 선교는 물론 중미(中美)외교와 중국을 서방세계에 널리 소개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였다. 그는 브리즈맨이 창간한 최초의 영문잡지〈중국총보〉의 편집과 출판에 관여하였고, 1858년 중미 톈진(天津)조약 체결시에는 미국측 통역관으로, 후에는 주중(駐中)미국공사의 대리로 중미외교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하여〈중국총론〉을 출판하여 서방세계에 중국을 널리 소개하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중국을 연구한 중국학 전문가가 되었고, “미국의 한학(漢學)의 아버지”로 불려지게 되었다.
 
윌리암스의 생애
윌리암스는 1812년 9월 22일, 뉴욕주의 유티카(Utica)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 로버트 윌리암스는 1637년 영국에서 미국 보스톤으로 이주한 독실한 청교도 신자였다. 처음 로버트 윌리암스가 아내에게 미국 이민을 제의했지만, 아내는 개척 생활이 두려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녀는 많은 목회자 자손들을 양육하고, 또 그들이 미국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 꿈을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계시로 믿고 미국 이민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 꿈은 그녀의 생전에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후대에 그 꿈이 실현되어, 미국의 어느 가정보다 목회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믿음의 가문이  되었다.

윌리암스의 부친 윌리암(William Williams)은 뉴욕주의 유티카에서 출판사업에 종사하는 장로교회의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윌리암스는 14명의 형제자매 중에서 다섯번째로 태어났다. 1832년에 윌리암스는 뉴욕주의 트레이(Tray)시의 렌셀리어 공예대학(Rensselear Polytechic Institute)을 졸업하였다.

1932년 미국장로교회는 인쇄기 한대를 광저우(?州)의 미국선교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ioners for Foreign Missions, 美部會, 이하 미부회)에 기증하고, 윌리암에게 광저우에서 인쇄활동을 할 수 있는 인쇄기술자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윌리암은 기꺼이 자기 아들 윌리암스를 소개해 주었다. 그해 7월 미부회에서는 이를 받아드리고, 윌리암스를 광저우지역 미부회의 인쇄기술자로 정식 임명하였다. 윌리암스는 일정 기간의 인쇄기술을 훈련받은 다음, 1833년 6월에 같은 미부회 소속의 트레이(Rev. Tray, 崔理時) 목사와 함께 모리슨호를 타고, 뉴욕을 떠나 10월 25일 광저우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렇게 윌리암스의 40여 년의 중국선교 사역이 시작되었다.

윌리암스는 브리즈맨을 비롯한 선교사들과는 달리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고, 또 어떤 성직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미부회의 공식 공문에는 그의 신분은 인쇄기술자였다. 이를 오늘날의 선교용어로 말하면 전문인 선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중국에서의 활동과 업적은 여느 일반 선교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고, 실제적으로 많은 장소에서 선교사로 칭함을 받았었다. 윌리암스가 유독 다른 선교사들과 다른 점은 그는 중국의 역사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 도착한 후로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특별히 많은 노력을 투자하였다. 1846년에 윌리암스는 미국동방학회(American Oriental Society)에 가입하였고, 1881년에는 학회의 주석으로 추대되었는데, 이는 한학연구분야에 대한 그의 노력과 성취를 충분히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윌리암스와〈중국총보(中國丛报)〉
윌리암스는 중국에 도착한 후, 마카오에서 동인도공사의 출판업무를 주관하여〈광저우기간(廣州期刊)〉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윌리암스가 중국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매진한 사역은  미부회의 초대 중국선교사 브리즈맨(Rev. Elijah Coleman Bridgman, 裨治文, 1801-1861)을 도와〈중국총보(The Chinese Repository, 中國丛报)〉를 출판하는 것이었다. 

브리즈맨은 1830년 광저우에 도착하여 중국선교를 시작한 근대중국 최초의 미부회의 선교사였다. 당시 청 정부는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 공개적으로 전도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브리즈맨은 미국인 회사인 동부양행(同孚洋行)의 직원으로 활동하고, 무역특설지구에 거주하면서, 마카오와 싱가포르 등을 왕래하며 선교사역에 종사하였다. 

브리즈맨은 문서선교의 필요성이 더욱 증가함에 따라 인쇄소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는 인쇄소를 운영할 수 있는 인쇄 기술자를 미국본부에 요청하여, 윌리암스가 중국에 오게 되었다. 브리즈맨은 그를 마카오에 거주케하고, 그곳에 “브루인 인쇄소(The Bruin Press, 布魯因印刷所)”를 설치하여, 윌리암스로 하여금 이 인쇄소를 책임지고 운영하도록 하였다. 브루인 인쇄소의 모든 설비는 브리커교회(The Bleeker Street Church Society)의 선교단체에서 기증하였는데, 그 기계는 금속활판 인쇄의 최신식 기계였다. 이 인쇄소의 중요한 임무는〈중국총보〉를 출판하는 것이었지만, 그외에도 교회가 사용하는 전도 소책자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윌리암스는 중국에 도착하여 곧 중국어 학습에 몰두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브리즈맨을 도와〈중국총보〉의 출판을 협조하였다. 그러나 광저우에서의 인쇄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여, 1835년 12월, 브리즈맨은 윌리암스를 마카오로 보낸다. 그곳에서 동인도공사의 중국인쇄 활자를 이용하여 출판사역을 계속하였다. 

윌리암스가 중국에 도착해서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중국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당시는 외국인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중국어 교사를 찾기가 어려웠고, 또 참고할만한 교과서나 교재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우는데 어려움이 컸다. 더욱이 인쇄활동의 중심이 광저우에서 마카오로 옮기면서 인쇄소의 직원 대부분이 포루투갈인 이었기에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중국어보다는 포루투갈어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윌리암스는 중국어는 물론 포루투갈어까지 배워야 했으니 그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브리즈맨이 30년간 중국선교에 사역하면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업적 중의 하나는〈중국총보〉를 창간한 일이었다.〈중국총보〉는 브리즈맨이 광저우에서 발행한 월간지로, 이는 중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영문 잡지이기도 하다. 1832년 5월부터 1851년 12월 정간될때까지 20년동안 총 20권, 232기를 발행하였다. 브리즈맨은〈중국총보〉의 주필을 담당하였을 뿐아니라, 원고를 가장 많이 투고한 사람이었다. 20년동안〈중국총보〉에 발표된 문장들이 총 1,378편에 달하였고, 브리즈맨 혼자서 350편의 글을 투고하였다. 이 인쇄소는 아편전쟁이 끝나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면서, 홍콩으로 옮겨 계속 출판사역을 감당하였다.

윌리암스는〈중국총보〉를 출판하는 임무를 담당하면서도, 중국에 관한 문화와 사회전반에 걸친 주제들을 〈중국총보〉에 발표하였다. 윌리암스가 〈중국총보〉에 발표한 두편의 문장은 1834년 2월에 발표한 “중국의 도량형(中國的度量衡)”과 “광저우의 수출과 수입(廣州的進出口)”이다. 그후로 그는 끊임없이 계속하여 중국의 언어, 문화와 사회전반에 걸쳐 모두 77편의 글을〈중국총보〉에 발표하였다. 중국의 정치와 지리에 관한 글이 16편, 그리고 민족성과 민족문화에 관한 글이 21편, 박물학(자연사) 방면이 15편, 과학기술 방면이 11편, 언어와 문학방면이 14편 등이다. 이러한 원고를 발표하는 것은 그가 후에〈중국총론(中國總論)〉을 집필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1853년 윌리암스는 미국 해군 페리장군(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이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킬때, 마카오를 떠나 페리장군의 통역관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중국총보〉는 20년의 역사를 지닌채 정간되었다. 윌리암스는 이후부터 선교활동보다는 미국공사를 도와 통역관으로 활약하다가 후에 미국에 돌아가 예일대학의 첫 중국학 교수로 교육에 종사하였다.
 
윌리암스와〈중국총론(中國總論, The Middle Kingdom)〉
윌리암스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지 11년이 되는 1844년에 처음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는 여정에 애굽, 이스라엘, 시리아와 유럽 등을 방문하고 많은 견문을 넓히기도 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왈워드(Miss Sarah Walworth)와 결혼하였으며, 뉴욕의 연합대학(Union College)에서 법학박사학위(Doctor of Laws)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모교회에서는 그에게 목사안수를 주기로 결정했는데, 윌리암스 자신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이유로 이를 사양하였다.

윌리암스가 미국에 있는동안 전국 각지에서 강연 요청이 쏟아져, 그는 강연을 통해 중국을 소개하기에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귀국하여 2년동안 무려 100회 이상의 강연을 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중국을 올바르게 소개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다. 1846년 그는 강연의 내용과〈중국총보〉에 발표하였던 자료들을 정리하여 출판하기로 하고, 강연 이외의 모든 시간을 원고정리에 몰두하여, 1948년〈중국총론〉을 마침내 완성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는 중국을 잘 이해하지 못해 어느 출판사도 이를 출판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다행히 Wiley & Putnam 출판사를 통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은 미국인으로 제일 처음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영문으로 소개한 서적으로, 윌리암스는 이 책에서 중국은 세계에서 오래전부터 문명이 발달한 문명고국이라고 중국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초판이 발행되자, 예상외로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이후 줄곧 재판되었다. 〈중국총론〉은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물론 일반 학교의 중국문화역사의 중요한 교재로 사용되었고, 독일, 서반어 등으로 번역되어 서구유럽까지 광범하게 영향을 미쳤다.〈중국총론〉은 동서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또 윌리암스가 중국관련 권위자의 위치를 확보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국총론〉은 상하 두권으로 되었고, 1,200페이지에 달하는 장서로, 지리구획과 특징, 동부지역의 성(省)과 서부지역의 성, 속국(屬國), 인구, 자연자원, 법률과 정부기관, 사법, 교육과 과학, 언어구조, 경학, 사학과 문학, 건축, 복식(服飾), 음식, 사회생활, 공예, 과학기술, 편년사, 종교,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파사, 상업, 중외교통사, 중영아편전쟁, 전쟁의 발전과 중국의 개방 등 중국사회의 역사문화 등 전반적으로 폭넓고, 심도있게 서술하고 있다.

윌리암스는〈중국총론〉의 서문을 통해 집필 목적을 ‘서방사람들의 중국인과 중국문명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중국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쁜 인상들을 말끔히 제거하기 위함’ 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과거에 서구인들은 중국인들을 괴상한 의복을 입는 민족, 미신과 불성실, 교활하고 잔인하며, 정부의 전제정치와 사회제도에 무력한 민족이라는 등 모두 부정적으로 중국인들을 이해하여 왔다. 윌리암스는 서구인들이 중국인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바로 무지에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하여 서구인들에게 중국을 객관적으로 소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윌리암스가 이 책을 쓰는 두번째의 목적은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중국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기독교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중국인들을 교화한다면 중국의 정치와 사회적인 혼란은 물론 아편으로 인한 중국인들의 영혼과 육체의 타락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건국 이래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원칙으로 국가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중국선교 사역에 정부의 지원을 얻을 수 없었다. 물론 일부 기업인들이 개인적으로 선교헌금을 하지만, 역시 한계가 있어 많은 도움을 주지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암스는 이러한 계기로 미국 기독교인들이 중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지원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1848년 6월 1일, 윌리암스는 아내와 함께 다시 미국을 떠나 중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9월에 광저우에 도착하여 계속해서 출판사역에 종사하였는데, 윌리암스가 일생동안 저작한 한학서적들은〈간이한어교정(簡易漢語敎程, Easy Lessons in China, 1842)〉,〈중국지지(中國地志, A Chinese Topography, 1844)〉,〈중국총론(1848)〉과〈우리와 중국제국과의 관계(我們與中華帝國的關係, Our Relations with Chinese Empire, 1877)〉등 이다.  
 
윌리암스와 외교관 생활
윌리암스는 마카오에서 일본인 선원들을 알게 되었고,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중에 두명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일본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37년, 윌리암스는 일본인 선원들과 함께 일본 오키나와(沖?) 등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일본의 문호가 개방되지 않아, 그다지 큰 수확은 없었지만 이후부터 윌리암스는 일본에 많은 관심을 갖고, 마카오에서 일본 기독교인들에게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년후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 마태복음과 창세기를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마다않고 용감히 도전하는 윌리암스의 용감한 태도는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에게 귀감이 된다. 그가 열심히 배웠던 일본어가 장래 그를 외교관으로 전환하는 주요한 계기가 될줄 자기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1842년 윌리암스는 홍콩에서 모리슨 교육협회(Morrison Education Society)의 비서로 임명되어 홍콩에서의 선교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853년 미국정부는 페리장군을 일본에 파송하여 통상문제를 교섭하기로 하였다. 페리장군은 직접 마카오를 방문하여 윌리암스에게 자신의 통역관으로 활동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윌리암스는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고, 또 양국의 문화와 풍속 등에 풍부한 견식을 갖고 있어서 미국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었다. 윌리암스는 페리장군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 임무를 잘 완수하여 미국정부의 깊은 신뢰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그의 생애에 큰 변화가 오게 되었다. 1856년, 미국정부는 윌리암스를 베이징(北京)주재 미국외교관 비서로 임명, 그는 23년동안 선교사로 활동한 미부회를 사직하고, 전문외교관으로 활동무대를 전환하게 되었다. 

윌리암스는 1858년, 중미 톈진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통역관으로 활약하면서, 중국정부로부터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1858년 영국과 불란서의 연합군이 소위 말하는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여, 중국은 패전국가로 영국, 불란서, 미국과 러시아 등 4대 강국과 각각 톈진조약을 체결하였다. 윌리암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정부로부터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미국대표에 이를 적극 제의하고, 중국대표와 교섭했지만, 중국측은 양인들이 선교를 빙자하여 중국에서 암암리에 군사나 정치활동을 할 것이 두려워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윌리암스는 이 기회를 놓치게 될까 염려하여 밤을 새워가며 양측대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적합한 조문을 초안하였는데, 다행히 그의 초안 내용이 양국간에 별다른 이의없이 받아들여져, 그의 소망인 중국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는 획기적인 결과를 얻어 내었다. 그 조약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성교와 천주교는 원래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권장하는 종교로,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 사랑하는 것처럼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금후에 합법적으로 기독교를 전도하거나, 개종하는 사람들을 모두 법으로 보호해야하며, 함부로 핍박하거나, 방해해서는 안된다.”
 
이 조약으로 서방선교사들은 마침내 중국전역에서 선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이제는 중국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조약은 근대 중국기독교사에 획기적인 발전이 아닐 수 없다. 1807년 근대중국 최초의 선교사 모리슨이 처음으로 광저우에 온 후로 실로 반세기의 긴 세월을 간절하게 기대하던 선교의 자유가 드디어 실현되었으니, 윌리암스의 숨은 노력의 결과를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윌리암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이후부터 중국기독교는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중국기독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1860년에서 1900년까지를 중국기독교의 건설시대라고 평가하고 있으니 이 조약이 중국기독교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겠다. 1858년 홍콩과 중국의 5개 항구에서 활동한 서방선교사는 겨우 8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1900년에는 130여 개의 선교단체들이 2,000여 명의 선교사를 중국에 보내어 중국전역에서 선교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중국의 신도도 112,808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4대 강국과 맺은 톈진조약은 패전국의 입장에서 열강들과 체결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국제적인 수모는 물론 경제적으로 많은 배상금과 절대적으로 불리한 무역관계를 감수해야 했다. 이래서 이 조약을 학자들은 불평등조약이라 칭하고 있다. 이 때부터 중국은 과거의 당당했던 존엄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한 마리의 잠자는 사자처럼 서방열강들의 업신과 경멸, 심지어는 모욕적인 침략을 당하면서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하였다. 윌리암스는 이러한 조약을 통해 선교의 자유와 보호를 획득했지만, 불행히도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기독교와 제국주의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큰 오해도 불러 일으키게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 혹은 “기독교는 제국주의 꼭두각시”라고까지 오해하여 기독교에 대한 핍박과 압제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1860년에서 1900년 의화단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중국전역에서 발생한 큰 교난사건만 무려 811건에 이르고 작은 규모의 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으니, 그 후유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 론
윌리암스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도, 그의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876년 그는 외교관직에서 은퇴한 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1877년, 예일대학에서(Yale University) 그를 중국언어와 문학교수로 추대하여 미국 역사상 최초의 한학교수(漢學敎授)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는 비록 중국을 떠나 미국에 있으면서도 중국에 대한 사랑을 지속하여서 1880년 미국정부가 중국노동자 제한법을 통과시키려고 할 당시, 그는 이를 가장 강력히 반대하였다. 

윌리암스는 후에 미국성경공회(The American Bible Society)와 미국동방학회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전도와 학술 발전에 끊임없이 노력하다가, 1884년 2월 16일, 뉴해븐(New Haven)에서 향년 72세로 소천하였다. 윌리암스는 선교사로, 외교관으로 그리고 한학자로 평생을 중국선교와 중국을 서방세계에 정확하게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며 아름다운 일생을 바쳤다. 
 

 

강인규│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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