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을 만드는 죽음 패배한 자국(自國)의 전쟁사(戰爭史)를 영화에 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다큐멘터리로서 피해자의 선(善)을 강조한다. 적국은 비록 강하지만 악(惡)이며, 약하고 세상이치에 어두워서 침공당한 자국은 억울한 희생자일 뿐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일이 다큐멘터리의 본분이지만 전쟁에서 저질러진 자국의 부조리함 보다는 적국의 침공을 악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잔혹한 학살의 현장을 부각시킨다. 없었던 일을 만드는 일이 아닌 이상 그것은 분명 사실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된다. 다만 사실의 어떤 조각들을 맞추어 어떤 형태의 모양을 만들며 무슨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를 선택하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며, 우리는 이것을 사관(史觀)이라 부른다. 적국의 만행을 강조하고 비록 졌지만 자국의 저항은 악에 대항한 선이며 의로운 피해자 신분으로 인식되는 것은 자국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시각의 한 결과다.
패한 전쟁사를 영상에 싣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극영화를 만들되 의로운 죽음을 통해 자국민을 영웅화시키는 일이다. ‘전쟁의 영웅’하면 우리는 적을 물리치고 크게 승리한 장수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패배한 전쟁에도 영웅은 존재한다. 이때 영웅은 비장한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비록 전투에는 졌지만 용맹과 의로움을 간직한 인간으로서 최후를 당당히 맞이하는 모습을 보인다. 적에게 무릎 꿇는 일 없이 죽음을 택함으로서 내적으로는 결코 지지 않았음을 공표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적군은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심리적 공황을 겪을 수도 있다.
영웅의 죽음은 남다르다. 그것은 살려고 발버둥치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수동적이며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니다. 영웅은 죽음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준다. 두려움 없이 죽음 앞에 서는 것이야 말로 적에게 가하는 최후의 공격인 셈이다. 따라서 영웅은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을지라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결코 죽음을 피하는 법이 없다.
루추안 감독의 2009년 신작인 <난징, 난징>은 1937년에 일어난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을 배경으로 의연하게 죽음으로 맞서는 중국의 군(軍)과 민(民)을 그리고 있는 대작이다. 제작비만 약 2억위안(3백5십억원)이 들었고 1930년대의 페허 속 난징을 재현하는데도 성공했다. 이것은 드라마이면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기를 원했던 감독의 연출철학이 낳은 결과였다. 중국인을 감동시킨 세 영웅의 죽음 이미 2007년부터 난징대학살을 다룬 영화들이 네 편이나 만들어졌지만 루추안 감독의 시각은 매우 대중적이며 동시에 애국적이기까지 하다. 사실을 그리되 감동하게끔 그렸고, 진 것을 알면서도 이긴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물론 그것은 앞에서 얘기한 영웅들의 죽음 덕분이다. 그의 영화가 난징대학살을 다룬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국가광파전영전시총국(中國國家廣播電映電視總局)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영화란 사실은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경악할 만한 대학살만을 본 것이 아니라 중국인을 자존심을 충분히 고양시킬만한 인물의 죽음이 존재함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는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 난징에서 갇힌 채 살아가는 인물 중심으로 죽음을 도구 삼는 의연한 투쟁을 보여준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일본군에 맞서 난징을 지키던 국민당군인 루젠슝(유엽劉燁)이다. 그는 이미 전투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몇 명 안 되는 부하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 게릴라전을 통해 잠시나마 일본군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포로가 되고 만다. 그는 ‘죽음과 침묵’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의 커뮤니케이션이란 사실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수만 명의 중국 군인들이 바다 속으로 내몰리고 무차별 사격이라는 야만적 살인행위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움직이려하지 않을 때 그는 ‘중국만세’를 외치며 죽음으로의 행진에 첫발걸음을 떼기도 했다.
영화가 시작 된지 불과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관객은 루젠슝의 죽음을 목도하며 숨을 죽이고 영화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전쟁영화에서 군인의 죽음을 보는 일이란 얼마나 흔한 것인가. 그러나 루추안 감독은 대단히 영민한 연출을 보여주었다. 한사람의 의연한 죽음을 통해 수만 명의 학살당한 군인들을 영예롭게 만든 것이다. 즉 관객들은 관객이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는 수많은 중국 군인들이 죽어가는 장면만을 보여주기 보다는 인상적인 한 인물을 내세워 나머지 전체의 죽음의 가치를 가슴 깊이 새겼던 것이다. 인식되지 않는 많은 죽음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지만 의미 있는 주인공 단 한사람의 죽음은 숫자를 압도할 수 있다.
관객들은 루젠슝에게서 세 가지를 보았다. 첫째는 저항의 정신이다. 최후의 패배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싸우며, 비록 포로가 된 이후라도 죽음을 통해 적과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둘째는 생과 사를 넘나들며 함께한 동지애(同志愛)다. 어린병사 샤오더우쯔가 대학살의 참상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주는 배려는 나이의 차이를 넘어서서 분노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가 마지막까지 동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셋째는 죽음을 피하지 않는 리더십이다. 어쩔 수 없이 죽음과 맞서야 할 때 누군가는 먼저 그 길에 첫 발걸음 떼어야 한다.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모두가 죽을 걸 알면서 먼저 걸어야 하는 그 심정을.
성(性)과 死(사)가 만든 거룩한 충격 남성 군인들의 죽음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는 실감나게 전쟁터의 죽음을 그리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여성의 죽음을 다르다. 죽음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어디 다를까마는 그래도 여성의 죽음은 분명 루젠슝과 같은 의연한 군인의 죽음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여성은 보호받는 약자인 동시에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모성의 상징이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여성은 남성의 성적대상이란 점에서 여성의 죽음에는 성폭력이 결합되기 쉽다. 즉 전쟁과 같은 사회적 질서가 무너지고 윤리와 문화 같은 전통적 가치가 소멸된 공간에서 여성은 가정과 모성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고 오로지 강자의 욕망에 부응해야 하는 성적대상 만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것은 관객들에게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솟구치게 만드는 일이다.
독일인이 운영하는 안전지대에 대피해 있던 여성들은 언제라도 성적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짐승처럼 달려들 일본군인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관객들 또한 일본여성위안부를 통해 목마르면 물마시듯 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는 당시 일본군인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사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예고임이 분명하다. 일본군은 안전지대의 중국인들이 군인들을 숨겨주었다는 사실을 빌미로 대피소에 쳐들어와 그들의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위안부로 삼을 여성 2백 명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한다. 누군가 타인의 생존을 위해서 나서야하는 참담한 일이 또 벌어지는 상황이다. 이때 여성 루젠슝과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극중 배우이자 가수인 샤오장(江一燕)은 짙은 화장과 여성의 매력을 지우지 않으며 생활하는 바람에 눈총을 받았지만, 자신이 먼저 희생하겠다는 의지를 결연하게 보여준다.
성적 유희란 말은 오로지 지배자인 남성의 권한일 뿐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로 자원하는 바람에 철저하게 유린당한 여성성을 바라봐야 하는 시간은 관객으로서도 스크린을 마주 대하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분노와 공포도 사라지고 오로지 숨 쉬는 존재로서만 침대에 누워 일본군인을 상대하는 샤오장의 모습은 모든 성적(性的)인 감각을 지워버리고 그녀가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성적(聖的)인 존재로 변화되었음을 알리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 역시 영웅은 타인을 위한 거룩한 희생을 통해 태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문화가 펼쳐지고 있다지만 강압적으로 희생되는 여성의 성(性)은 여전히 죽음 만큼의 값어치를 지니는 법이다. 여성의 성은 곧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아이를 잉태하고 키우는 생명성 혹은 모성성과 직결되고 있는 까닭에 여성의 성을 훼손시키는 일은 인간성이 소멸된 극악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 쓰이곤 한다. 관객은 영화 끝부분에서 손수레에 가득 실린 벌거벗은 여성의 주검들을 비춘다. 중국인들에게 그들은 난징의 순교자들이며 동시에 민족의 이름 없는 영웅인 셈이다.
누가 이겼을까? 영화 <난징! 난징!>에서 비겁한 자는 하나도 없다. 독일인의 비서로 일하며 가족을 구하려고 일본인의 앞잡이가 된 탕선생 마저도 난징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만을 돌려보낸 채 자신은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 대신 난징의 비극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가해자로서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온 일본군인 가타가와는 전혀 다른 삶을 보여주었다. 위안부를 아내라 부르며 사랑을 시작하지만 그녀는 죽음으로 사라져버리고 그는 비통함에 빠진다. 군대라는 집단 속의 일원으로서 수없이 많은 남의 죽음을 대하는 일은 쉬웠지만, 사랑하는 한 여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일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죽음의 이중성이다. 개인에게 의미되어 있지 않은 죽음은 그저 숫자나 물건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거기다 가타가와는 안전지대를 관리하고 통역을 담당한 쟝슈윈의 죽음을 돕기까지 한다. 그녀는 총살에 처하게 될 중국군인을 구해준 일이 발각되어 강간당할 위기 몰리자 ‘능멸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귀하게 죽겠다’며 가타가와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
가타가와는 영화의 시간이 흐를수록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지는 인물이다. 그는 자살하기 전 자신의 심경을 고백한다.
“여기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어!”
과연 누가 이겼을까? 과거 역사로서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은 전쟁의 승자인 일본의 잔인한 위업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우리는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영웅 그 누구의 이름도 알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 영화에 등장한 크고 작은 중국의 영웅들이 누구인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영화가 역사에 관여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인 것이다. 사실을 보여주고 우리의 영웅을 기억하게 만드는 일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수치를 영웅의 일대기로 바꾼 중국영화감독의 역량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중국정부의 정책에 일조하는 것일지라도 그는 부끄러운 역사를 직면할 줄 알았고 그것을 현실의 세계로 끄집어내어 이기는 법을 온 국민에게 제시해주었다.
역사를 직면할 줄 알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국민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강진구|고신대 컴퓨터영상선교학과교수,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