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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4.30 통권 113호     필자 : 전순동 프린트   이메일 
[중국사의 한 장면]
명대 왜구 퇴치에 명성을 떨친 명장 척계광

부친의 직업을 세습한 척계광
중국의 명대는 ‘북로남왜(北虜南倭)’라 불리듯이, 북방의 몽골족과 남방 해안의 왜구의 출몰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척계광은 이러한 국정 혼란의 시기에 동남 해안의 왜구를 토벌하여 강남 지방을 안정시킨 명장으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척계광은 장량이나 제갈공명에 비견될 정도로 중국 사람들에게 민족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명대 인물이다. 

척계광((戚继光, 1528-1587)은 산둥성(山東省) 덩저우(登州, 현 蓬萊) 사람(일설에는 조상의 원적이 안후이성(安徽省) 딩위엔(定遠)이라고도 함)으로 알려져 있다. 1528년 11월 12일(嘉靖 7년 윤10월 1일)에 산둥성 지닝(济寧)에서 태어났는데, 자는 원경(元敬), 호는 남당(南塘), 맹제(孟諸)이며, 시호(諡號)는 무의(武毅)이다. 

척계광은 어렸을 때부터 의지가 강한 무인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를 잃은 척계광은 이민족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을 일생의 천직으로 삼았다. 척계광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청렴결백하고 패기 있는 무장이 되었다. 그의 집안은 덩저우에 주둔하던 세습 무관직이었다. ‘세습’이라는 함은 북쪽의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둔전지구를 대대로 세습하여 지키는 임무를 가진 집안이라는 뜻으로, 그의 집안은 명초부터 5대에 걸쳐 덩저우의 지휘첨사로서 활약하여 온 무관 집안이었다. 척계광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민족과 싸우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셈이었다. 그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중국에 청렴결백한 관리를 형용하는 말에 “淸官騎瘦馬(청렴결백한 관리는 야윈 말을 탄다)”라는 말이 있는데, 척계광의 부친 척경통(戚景通)은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의 부친이 척계광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물려줄 재산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줄 수 있는 것은 이 땅을 지키는 무관직일 뿐이다.”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척계광이 17살 되는 해(1544), 그의 부친이 덩저우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 왜구들은 늘 해적선을 몰고 중국 연해 일대에서 민가를 습격하여 약탈과 방화를 감행하였는데,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왜구의 만행은 점점 창궐해졌다. 그들의 일부는 중국 연해 일대의 토호(土豪) 간상(奸商)들과 결탁하여 내륙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 만행을 저질렀다. 

1544년, 척계광은 등주위(登州衛)의 지휘첨사(指揮僉事)가 되어 산둥을 지켰다. 이 당시 중국의 북쪽은 알탄칸(阿勒坦汗 또는 俺答汗, 1507-1582)이 이끄는 몽골군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몽골군은 30수년에 걸쳐 산시성(陝西省), 산시성(山西省), 허베이성(河北省)의 각지를 자주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기에 명조는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1542년에는 산시성(山西省)의 대부분 지역이 몽골군에게 함락을 당하여 20여만 명이 살해당하고, 가옥 8만 호가 불에 탔으며, 가축 200만 마리가 약탈당하는 등 피해가 심하였고, 토지도 10만 경에 이르는 넓은 땅이 황폐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550년에는 몽골군이 수도 베이징을 포위하여 크게 위협을 당하는 이른바 ‘경술의 변(庚戌의 變)’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몽골의 침입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던 시기인 1548년, 덩저우에 있던 척계광은 베이징 근처의 요충지인 지먼(蓟門)에 파견되어 몽골의 침입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부터 1552년까지 5년간, 봄에는 덩저우에서 지먼으로 가서 군무에 임하고, 여름에 다시 덩저우로 돌아와 본연의 군무를 담당하였는데, 이것은 몽골군이 침입하기 쉬운 시기에 맞춰 일시적으로 지원하는 형식이었지만,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귀한 밑거름으로 작용되었다. ‘경술의 변’을 포함하여 몽골군의 위협을 직접 피부로 느끼며 국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로 하여금 일생 군무에 충성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신군(新軍)의 창설
1553년 척계광은 산둥의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산둥의 3개 진영(登州營, 文登營, 卽墨營)의 군관구사령관이다. 당시 왜구는 산둥성에도 출몰하였기에 사령관에 발탁된 것이다. 척계광에게 맡겨진 군은 그의 눈에 차지 않았다. 노병이 많았고, 규율도 잘 잡혀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군이나 왜구를 막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척계광은 먼저 군의 규율을 엄격히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훈련을 강화하고 군대의 규율을 엄격히 하였다. 당시 척계광 군대의 엄격한 규율 적용에 관하여 이런 예화가 전해진다. 척계광의 외가친척인 삼촌이 장교로 있었는데, 그 장교는 친척이라는 것을 빌미로 함부로 하고 있었다. 유교적인 중국사회에서 인척관계는 큰 힘이 되었다. 설령 군율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조카가 삼촌에게 엄격하게 하는 것은 반 윤리적인 행위로 여겨졌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군의 기율이 엄격히 적용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렇지만 삼촌이라 하여 군율 위반을 피해간다면 규율을 잡아가기가 곤란한 일이라 생각하고, 척계광은 많은 군사들 면전에서 삼촌의 군율위반을 엄격히 다루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 삼촌을 사령부로 불러 조카로서의 결례를 빌었다. 이렇게 군율을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그의 군대는 기강이 잡혀갔고, 왜구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워나갔다. 

2년 후인 1555년(嘉靖 34년), 산둥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은 그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저장(浙江) 지구로 전임되었다. 닝보(寧波), 샤오싱(紹興), 타이저우(台州) 등지를 관할하는 지역 사령관직에 임명받았다. 이 지역은 당시 빈번한 왜구의 출몰로 명조가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던 지역이었다. 척계광이 저장에 부임하여 보니 군사력이 매우 약한 상태에 있었다. 왜구로부터 자주 노략질 당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척계광은 군 편성을 다시 할 것을 상부에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은 이곳에 부임하여 4년이 지난 1559년 가을이 되어서였다. 척계광은 군대 기질을 갖춘 청년들이 많이 있다고 전해지는 저장의 진화(金華), 이우(義烏) 등지에서 농부, 광부 등 패기 있고 혈기 왕성한 청년 4천명을 뽑아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훈련을 강화하고 엄격한 규율로 강한 군대로 만들었다. 흔히 이를 ‘척가군(戚家軍)’이라 부르는데, 척계광은 이들을 이끌고 중국 남동부의 해안지역에서 밀무역을 하며 노략질하던 왜구 토벌에 나섰다.

 

용맹을 떨친 척가군
새로 편성된 척가군은 기마병(騎馬兵)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북쪽의 몽골군과 맞서 싸우면서 얻은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몽골군이 강한 이유는 보병보다 기동성과 전투력이 훨씬 뛰어난 기마병을 중심으로 한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왜구는 일본 전국시대의 무사 낭인들이다. 그들은 중국 해안가에서 악덕상인들과 결탁하여 해적 활동을 하였는데, 이들 왜구는 중국 동남 해안 지역을 횡행하면서 해안 방비가 허술한 지역을 찾아 상륙하여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사르고, 재물을 약탈해갔다. 기마 중심의 척가군은 이러한 왜구에 대비하여 기마 기초 훈련을 철저히 하고, 연계전술의 기능을 익혀나갔다. 그리고 척계광은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여 막강한 군대로 육성하여 나갔다.  

척가군의 특이한 전법은 ‘원앙진(鴛鴦陣)’이라는 전법이었다. 전투단위의 기본은 12인 1조로 편성하고, 이들이 단결하여 적군에 임하는 전법이다. 그 형태를 보면, 선두에 대장 말이 위치하고, 그 뒤에 10명의 기마가 좌우 2열로 배치되며, 후면에 취사병이 배치되는 그런 형태이다. 10명의 병사가운데 맨 앞에는 방패를 든 두 사람을 배치하고, 그 뒤에 이 지역 특산의 튼튼한 죽창에 날을 꽂은 “낭선(狼筅)”이란 무기를 들고 싸우는 병사 두 사람을 세웠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긴창(長槍)을 가진 네 사람이 서고, 그 뒤로 칼처럼 짧은 무기인 ‘당파(铛钯)’를 소유한 두 사람을 배치하였다. 12명이 1개조가 되어 기동력을 가지고 싸우도록 한 전법이 원앙진의 특징이다. 원앙진 전술 전법은 척계광이 긴 일본도를 들고 달려드는 사나운 왜구들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한 전술 전법이다. ‘원앙’은 암수 한 쌍 중 한 마리가 죽으면 다른 한 마리도 따라 죽는다는 전설이 있듯이, 이 신군의 전법은 만약 전투 중에 대장이 전사하고 패배할 경우, 대장이 전사한 분대의 나머지 생존자들도 모조리 처형당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병사들은 대장이 전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해 적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뜻에서 이 전법을 원앙진 전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원앙진 전법은 개별적으로 전투력이 뛰어난 왜구에 대항하여 기병들이 함께 협력하여 적에 대항하는 전술로, 산이 적은 개활지나 소택이 많은 지형에 따라 작전을 취할 수 있도록 긴 무기, 짧은 무기 등 여러 가지를 준비하여 두고 효율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한 전법이다. 이를테면 선두자들이 긴 창을 가지고 말 위에서 적을 찌르고, 그 후 창에 찔린 적을 그 뒤의 기병이 목을 베는 형식이다. 왜구는 흔히 복병과 돌격작전으로 적진에 쳐들어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이 많았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효율적인 것이 원앙진 전법이었고, 이 전법은 실제 왜구 제압에 커다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1561년 수천 명의 왜구가 타이저우(台州)에 침입하여 타오쭈(桃渚), 치토우(圻頭) 등의 해안지구를 마구 약탈하고 있을 때, 척계광은 척가군을 이끌고 원앙진법으로 대처하여 싸워 크게 그들을 물리쳤다. 그들을 물리치는 데 1개월여가 걸리기는 하였지만, 왜구 5천여 명을 격퇴하였고, 그 이듬해에도 왜구가 원저우(溫州), 타이저우에 침공하여 왔는데, 척가군의 기병대는 이들을 맞아 대승을 거두어 저둥(浙東)에 이른 왜구들을 모두 소탕하였다. 

왜구는 ‘척(戚)’이라 쓴 척계광의 군대 깃발만 보면, 그것을 ‘척호(戚虎)라 부르며 놀라 달아나, 두 번 다시 저장 해안을 넘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때의 전공으로 척가군은 ‘무적의 군대’ 라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그 뒤 왜구는 저장 해안지역으로의 침투를 포기하고, 차차 남하하여 푸젠(福建)성 넝더(寧德)현 가까이에 있는 헝위(橫嶼)라는 작은 섬을 근거지로 삼아 주변 해안지역을 약탈하였다. 왜구는 푸젠의 뉴티엔(牛田), 싱화(興化), 린둔(林墩) 등지에 거점을 확보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에 1562년 이들 왜구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척계광은 곧 바로 헝위로 향하여 내려갔다. ‘광빙(光餠, 광빙)’이라는 빵을 먹으며 강행군을 하였다. 광빙이란 것은 짠 맛이 있는 건빵 같은 것으로 모양은 둥글게 생겼는데, 그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면서 수시로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척계광이 이 빵을 처음 발명하였다고 하여 척계광의 이름 끝 자를 따서 ‘광빙’ 이라 한다. 오늘날도 푸저우(福州)에 가면 그 지역 전통식품으로 이것을 맛 볼 수 있는데, 척계광이 푸저우에 와서 왜구를 물리칠 때 푸젠 연해의 주민들은 척가군의 무용 정신에 감동하여 이런 빵을 만들어 지원하였고, 척계광의 군사들이 이 빵을 먹으며 왜구를 소탕한 것을 기념하여 ‘광빙’이 이 지역 전통적인 식품으로 전해내려 오고 있다. 

척계광은 1562년에 먼저 헝위에서 2천 6백 명의 왜구를 소탕하였다. 이때 린둔 방면으로 도망간 왜구도 있었다. 척계광은 이들을 좇아 린둔에서 하룻밤에 60여개의 진지를 섬멸하였다. 그 후 1563년에 척계광은 선배 장군 유대유(兪大猷, 1504~1580)와 함께 핑하이(平海, 지금의 福建省 莆田), 센요우(仙遊)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였다. 이 때 2천 2백 명의 왜구를 죽이고, 3천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이 때 척계광은 그의 공이 크게 인정되어 도독동지(都督同知)를 거쳐 푸젠(福建) 총병관(總兵官), 즉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도 1564년 광둥 각지에 다니면서 왜구와 전투를 벌여 왜구 잔당을 토벌함으로써 동남 해안 지역을 평정하였다. 척가군이 무적의 군단으로 이름난 것은 척계광의 용병술, 원앙진이라는 전략 전술, 그의 솔선수범과 탁월한 통솔력 때문이었다.

 

몽골족 방어를 위하여 현재의 만리장성 축조
척계광은 동남 해안의 왜구를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유명하나 이 외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은 베이징 이동의 만리장성을 수축하여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다. 왜구를 평정한 후 척계광은 광둥에 남아 있었다. 그런 가운데 1566년 가정제(嘉靖帝,재위 1521~1566)가 죽고 목종 융경제(穆宗 隆慶帝, 1566∼72)가 즉위하였다. 이와 동시에 융경제의 스승인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은 1567년에 재상이 되었는데, 이 때 장거정은 남방에서 왜구 토벌로 큰 공을 세운 척계광을 불러 들여 북방 방비의 임무를 맡겼다. ‘북로남왜’라 해도 그 위협 면에서 북방은 남방에 비교가 안 될 만큼 피해가 컸다. 규모면이나 피해 면에서 북방 몽골족의 침입으로 인한 위협이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척계광은 다소의 우여곡절 끝에 지저우(蓟州,현재의 蓟縣) 총병관의 직에 임용되었다. 지저우는 장성에 따라 설치된 9진(鎭) 중의 하나로 쥐용관(居庸關) 에서 산하이관(山海關)까지의 지역을 수비 범위로 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베이징 방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어서 창핑(昌平), 빠오딩(保定)의 삼진의 병력을 조련하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그곳에서 16년을 복무하며 병사를 훈련시키고 전술을 개발했다. 이 전술은 그 후임자들에게 충실히 계승되어 흔들리던 명의 북방을 안정시키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20년 만에 다시 장성 방위를 맡게 된 척계광이 와서 보니, 병력의 실태가 너무 열약하여 걱정이 많았다. 이에 그는 조정의 승인을 얻어 착실히 방위력 증강에 힘썼다. 먼저 수비 병력 증강에 힘썼다. 지저우의 주둔군에는 노약한 병졸이 많았고 전의를 상실한 나약한 병사도 적지 않았다. 이에 과거 저장 지역에서 부하로 거느리고 있던 남방 저장의 군사 3천 명을 채용하여 지저우 주둔군의 중핵으로 삼았다. 그들은 왜구 토벌 경험을 가진 용사들이었고, 규율도 엄격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근간으로 기율을 잡아가면서 강력한 군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처음 지주에 온 날은 운 나쁘게 비가 억수로 쏟아진 날이었다. 그들은 척계광의 사열을 받기 위해 꼼짝하지 않고 서서, 시종 군인의 자세를 갖추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현지 병사들은 이 모습을 보고 크게 감복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영향, 척계광의 엄격한 훈련 등으로 주둔군의 기술이 엄격해지며 강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성 수축에 힘을 썼다. 잘 알고 있듯이 오늘날의 만리장성은 거의 명대에 축조된 것이다. 장성의 축조는 영락제(永樂帝)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산하이관부터 따퉁(大同)에 이르는 구간을 강화했고, 이어 정통(正統) 연간에는 베이징의 정면 부분이 2중으로 축성되었다. 그러나 몽골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가정 연간 이후 대대적으로 개축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동부에서 착수되어 오늘날과 같은 견고한 장성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장성이 완성된 것은 16세기 말이었다. 

오늘날의 장성은 진나라 장성보다 평균 100km 정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성의 규모도 다르다. 명대 이전에는 주로 판축이라 불리는 중국 특유의 토성으로 되어 있었고, 높이도 기껏해야 2.5m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명대에 와서 튼튼한 장성이 되었는데, 만리장성은 베이징에 가장 가까이 있는 빠다링(八達嶺) 부근의 성은 높이가 약 8m, 폭을 보면 지면에 닿은 아랫부분은 8m, 윗부분은 4.5m~6m정도로 이전 보다 규모가 훨씬 크게 되었다. 

척계광은 이어 명대 장성을 수축하면서 거기에 더욱 ‘적대(敵臺)’를 세웠다. 적대는 망루와 같은 것으로, 지형에 맞춰 적당한 곳에 세운 돈대이다, 적대는 높이 5 장(丈)정도로, 내부는 대개 3층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100명의 병사를 수용할 수 있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여 둘 수 있는 공간도 갖춘 본격적인 요새이다. 이와 같은 적대가 1569년에서 1575년까지 6년간에 걸쳐 만리장성에 1,337개나 세워졌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놀랄만한 기술과 저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작전 면에서도 전차, 보병, 기병이 삼위일체가 되어 싸우는 새로운 전술을 연구해냈다. 그것은 기마병에 의존하고 있는 몽골군에 맞서는 전술로, 먼저 전차를 선두에 배치하여 불화살이나 화력으로 응전하게 하고, 보병은 전차를 좇아 행동하게 하며, 기병은 정찰 기습 추격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때 전차는 말이 끌도록 한 것이 아니라 병사 4명이 움직이게 한 것으로, 적이 쳐들어 올 때에 사방에 전차를 늘어세워 놓고 그 안에 병력의 중심인 기병과 보병을 배치하여 두는 전법이었다. 그리고 거마기(拒馬器)라 하는 적의 기마병 돌진을 저지하는 기구 등을 창안하고, 그것을 보병이 소지하도록 하여 몽골군의 기병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척계광이 이곳으로 부임한 이후, 몽골군의 침입이 크게 줄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시의 병력 증강, 장성 수축, 적대 건설, 새로운 전술 전법의 개발 등으로 전투력이 크게 증강한 데 있었던 것이다.
 
불우한 말년
장성의 견고한 수축과 경비로 인하여 몽골군은 무모하게 침입하기 보다는 입공(入貢)하는 법을 택했다. 그리하여 알탄 칸은 입공할 것을 요구하여 왔다. 이에 장거정은 입공을 허락하였는데, 그것은 현명한 대책이었다. 

1571년 명은 알탄 칸을 ‘순의왕(順義王)’으로 봉하여 장쟈코우(張家口)를 비롯하여 3개 지역에 알탄 칸이 요구하여 온 마시(馬市)를 개설해 주면서 그들을 회유하였다. 명으로서는 이미 전쟁을 치를 만한 국력도 약하였고 과거 역사가 말해 주듯이 힘이 있다 하더라도 싸우는 것은 어리석을 일이었다. 그런데 척계광을 후원하여 오던 장거정(『중국을주께로』2007년 11/12호 참고)이 1582년 6월에 병사하였다. 장거정은 강력한 행정개혁을 단행하여 국가 재정을 크게 확보하는 등 명재상으로 이름나 있기는 하였지만, 그가 재상으로 있는 동안 하고 싶은 정책을 펴지 못한 것이 의외로 많았고, 또한 정적도 많았다. 그렇기에 장거정 사후, 그의 정책에 대하여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여파가 장거정이 중용한 척계광에까지 미쳤다. 장거정 사후, 반년만에 척계광은 환관들의 참소로 말미암아 누명을 쓰고 광둥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그의 공적을 시기하는 대신들의 모함이 거세지자, 3년 후에 병을 빌미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년 후인 1587년에 12월 8일에 60세의 나이로 덩저우(登州)에서 죽었으며 그의 무덤은 산둥성 펑라이(蓬?)시 척씨 묘원 남부에 자리하고 있다.

척계광이 중국에서 민족 영웅으로 추앙 받으면서, 관련된 여러 지역에서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 및 동상을 세워 그를 기리며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저장성 타이저우(台州) 린하이(臨海)시 타오쭈(桃渚)진에 가면 “항왜진열관(抗倭陳列館”이 있다. 이것은 명대 왜구를 물리친 명장 척계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지방에 세운 기념관이다. 1993년 4월에 세워졌는데, 면적이 약 900평방미터에 이른다. 입구에는 유명한 서예가 루위에쥔(盧樂群)이 쓴 “도저항왜진열관(桃渚抗倭陈列馆)”이라는 간판이 있다. 진열관 안으로 들어가면 타오쭈 연안의 산수화를 그린 벽화를 뒤 배경으로 삼아 세워 놓은 장엄한 척계광 상이 서 있다. 진열관은 크게 4개의 실로 나뉘어 있다. 동1실은 문물사료관으로 이 지역에서 출토된 고대 벽돌, 척계광 공적비, 군도(軍刀) 원앙진 등이 있다. 동2실에는 명인서화실로 태주 지방의 명인들의 서화 작품이 있다. 서1실은 척계광 태주에서의 왜구 토벌을 20폭의 그림으로 설명해 놓은 곳이다. 서2실은 타오쭈의 아름다운 해안가의 풍경을 채색으로 그려 놓은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산둥성 옌타이(煙臺) 펑라이(蓬萊)에 가면 역시 ‘척계광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안에는 영웅 척계광의 군인으로서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해군사에 관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커다란 기념비에는 ‘충(忠), 효(孝)’ 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척계광의 생애와 사적이 적혀 있다. 만리장성에 가도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만리장성을 수축하는 데 공을 세운 척계광의 동상이 장성의 팔달역 앞에 서있고, 텐진(天津) 지현 타이핑짜이(太平寨)에도 척계광 동상이 서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푸젠의 위산(于山)에도 왜구와 싸워 큰 업적을 남긴 척계광의 영웅정신을 기리기 위한 ‘척공사(戚公祠)’라는 사당이 있는데, 거기에 척계광의 조각상을 만들어 두었다. 이곳에도 왜구와 싸운 척계광의 업적을 참배하러 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척계광은 책 『기효신서(紀效新書)』,『연병실기練兵實紀』등의 병서를 남겼다. 이 두 권의 책은 군사이론서로서 후대 군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높이 평가되고 있는 책인데, “병을 논하는 자 이것을 반드시 준용해야 한다(兵者遵用焉).”라는 말이 있듯이 후대 군사관계자들의 필독서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그 책 가운데에는 훌륭한 장수가 갖추어야 할 4대 조건으로 덕(德), 재(才), 식(識), 예(藝)를 들었는데, 척계광이야말로 이 4대 조건을 잘 갖춘 명장(名將)이라 할 수 있다. 척계광은 명대 북쪽의 몽골, 남쪽 해안의 왜구를 방비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그가 남긴『기효신서』,『연병실기』등의 병서는 중국에서 뿐 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군사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기효신서』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군사제도와 전술 전반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임진왜란 기간 중 명나라 군을 통해 입수되어 조선시대의 군사제도와 전투 방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기효신서 내용을 바탕으로 조선의 전법을 새롭게 편찬한 조선시대의 병서『병학지남(兵學指南)』(17세기 중엽)은 중국, 조선의 전법을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동아시아 군사 문화 이해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척계광은 명대 왜구를 평정하고, 몽골 침입을 막은 명대 장수 일뿐 아니라, 전술과 전과, 그리고 지휘 방법 면에서 세계 역사상 위대한 전략가이자 뛰어난 장군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그동안 연재 해 온 전순동 교수님의 「중국사의 한 장면」은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한결같이 함께 해주신 교수님의 귀한 섬김과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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