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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28 통권 101호     필자 : 전순동 프린트   이메일 
[중국사의 한 장면]
시대상을 그리며 기구한 생애를 살다 간 여류 시인 채염(蔡琰)

한(漢)나라와 흉노(匈奴)
한 나라는 약 4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흉노와의 문제로 고민을 안고 있었다. 한 무제(武帝, BC. 141-87)는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편 황제로 유명하다.

한편 돈과 물자를 주어 달래는 것이 전쟁비용보다 훨씬 경제적이었기 때문에 소위 ‘화친(和親)정책’을 취하는 일도 많았다. 화친정책이란 주지하다시피 곡물 및 각종 물품을 보냄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나라에서 흉노에게 보내는 것 중에는 물품뿐 아니라 흉노의 왕인 ‘선우(單于)’에게 시집가는 황실의 여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여인을 흔히 ‘화번공주(和蕃公主)’라 하는데, 중국과 번국(蕃國)과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공주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흉노에게 보내는 여인을 ‘화번공주’라 하지만 황제의 여식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화번공주를 보내는 것 자체가 결코 대등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국 황제가 자신의 딸까지 보낼 정도로 흉노와 굴욕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흉노도 이점은 양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흉노의 선우도 중국 황실의 공주를 얻었다는 명분만 지녔다면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고 짐짓 모른 척하고 받아들였다. 유목민족은 이런 명분도 명분이지만, 그보다 이들 화번공주가 시집올 때 가져오는 혼수품 및 여러 물품에서 더 실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기구한 운명
중국 역사상 화번공주가 많았지만 한대에는 오손왕(烏孫王)에게 출가한 오손(烏孫) 공주 세군(細君), 흉노에 출가한 채염(蔡琰), 왕소군(王昭君)등이 유명하다. 

채염(蔡琰, 蔡文姬, 177?-239)은 후한(後漢) 말에서 위(魏) 초에 살다간 여류 시인이다. 그의 출생연도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후한 영제(靈帝, BC.168-189) 6-7년경에 천리우위현(陳留?縣: 오늘날의 허난(河南)성 치(杞)현)에서 대학자 채옹(蔡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채옹은 당시 이름 높은 학자였다. 문학은 물론, 서예, 회화, 천문을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나 비파를 잘 탔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채염 역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다재다능하였다. 그녀의 자(字)인 ‘글 쓰는 여인’ 이라는 뜻의 ‘문희(文姬)’가 보여주듯이 그녀는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일생은 기구한 운명 가운데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의랑(議郞) 직에 있었는데 반대파에 몰려 북쪽으로 귀양 가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정계는 환관파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황제를 조종하여 혼란한 정국이었는데 채옹은 이러한 환관의 횡포와 탐관오리의 비리를 바로 잡으려다가 도리어 환관파들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처형될 지경에 이르렀다. 친구의 도움으로 사형은 면하기는 하였으나 그는 변방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후한서』의 ‘채옹열전’에 보면 2년 후 사면되었지만 돌아오는 중에 중상시(中常侍) 왕보(王甫)의 동생인 오원(五原) 태수 왕지(王智)의 미움을 사게 되어 12년 간이나 망명생활을 하였다.

채옹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유랑생활 끝에 낙양으로 돌아와 동탁(董卓)의 권유로 다시 황제의 호위와 궁중의 경비를 맡은 좌중랑장(左中郞將)의 벼슬에 올랐다.
그것도 잠시일 뿐 곧 채옹은 옥사하는 불운을 맞았다. 동탁이 서량(西?)의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헌제(獻帝)를 옹립하고 장안으로 천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동탁이 피살되어 거리에 버려졌는데 동탁 편에 있던 채옹은 동탁의 시신을 안고 부둥켜 울었다는 이유로 사도(司徒) 왕윤(王允)에게 붙잡혀 옥중 생활을 하다가 끝내 장안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인생도 기구했지만 채염 역시 애환이 많았다. 그녀의 고생과 처절한 삶은 아버지의 기구한 운명 탓도 있겠지만 그녀의 수려한 미모도 그녀의 앞길을 험난하게 만들었다.

낙양에 돌아와 비교적 평화롭게 살던 채염은 16세에 하동(河東) 위중도(衛仲道)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행복한 부부 생활도 잠깐 뿐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었다. 남편을 잃은 아픔을 참아가며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던 채염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생활하였다.

그런데 후한 말 동탁의 난이 일어난 직후, 남흉노가 동탁의 잔당을 격퇴하기 위해 낙양에 침입하였는데 이 때 아리따운 채염은 흉노의 기마병에게 납치되어 남흉노 좌현왕(左賢王)에게 바쳐졌다. 남흉노 좌현왕의 첩으로서 총애를 받아가며 12년 지나는 동안 그 사이에 1남 1녀를 낳았다.

조조 덕분에 흉노에서 돌아온 채염
AD 208년에 ‘문희귀한(文姬歸漢)’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흉노에 포로로 잡혀가 좌현왕의 왕비가 되어 12년 간이나 생활하면서 두 자녀를 둔 채염이 다시 한나라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게 된 데에는 조조(曹操)의 힘이 컸다. 후한 말 정권을 장악한 조조가 북방 지역을 점령하고 한의 승상이 되어 문치를 펴고 있을 때 그는 흉노에 붙잡혀간 옛 친구의 딸, 채염이 생각났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채옹이 후손이 없이 죽은 것을 애통하면서 흉노에 잡혀간 채염을 데려오고자 하였다. 이에 조조는 흉노에 사신을 보내 거액을 지불하고 채염과 그 아이들을 데려오도록 교섭하였다. 비록 아이들까지 대동하지는 못하였지만 조조의 도움으로 채염은 한나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유랑과 곤경으로 점철된 그녀의 반평생이 사실적으로 서술된 장문의 시가 바로 유명한 ‘비분시(悲憤詩)’ 와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다.

그 중에서도 비분시는 특히 흉노 왕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와의 헤어짐을 표현한 것으로 천고의 절창으로 알려져 있다.

兒前抱我頸 (아이가 내 목을 끌어안으며)
人言母當去 (사람들은 어머니가 꼭 가야 한다고 하는데)
豈復有還時 (다시 돌아올 날이 있을까요)
阿母常仁惻 (언제나 어질고 정답던 어머니가)
今何更不慈 (이제 무슨 까닭으로 다시 모질어지셨나요)
我尙未成人 (아직은 어린 우리들을)
奈何不顧思 (어찌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지 않으시나요)
見此崩五內 (이를 보니 오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하고)
恍惚生狂癡 (정신이 아득하여 미칠 것 같도다)
號泣手撫摩 (울면서 손을 잡으니)
當發復回疑 (떠나려 하매 다시 망설여지는구나)

이 시는  ‘후한서’(後漢書, 권 84 列女傳 董祀妻傳)에 실려 있는 것으로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환을 잘 그리고 있다. 이 비분시는 후한 말의 혼란한 시대상과 그녀가 흉노로 붙잡혀가서 겪게 되는 고통을, 그리고 후에 돌아와서는 황폐화된 자신의 옛 터전을 보고서는 슬퍼하는 장면을 잘 담아내고 있다.

조조의 도움으로 한나라로 돌아온 채염은 다시 동사(董祀)의 처가 되어 남편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남편 동사가 둔전도위(屯田都尉)의 벼슬에 있을 당시 범법행위로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채염은 다시 조조를 찾아가 남편을 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조는 그를 가엽게 여겨 동사를 사면시키기로 하고 그 대신 친구 채옹의 글을 얻고자 했다. 채옹은 생전에 4천여 권의 장서를 지니고 있었으나, 후한 말 난리로 그의 서적이 거의 소실되었는데 조조는 채염에게 이미 망실된 채옹의 글을 기억하여 써 올리도록 하였다. 채염은 손수 종이 위에 붓으로 기억을 되살려 써 내려갔다. 그 결과 채옹의 저서 4백여 편이 복원될 수 있었는데, 명석하고 뛰어난 그녀의 기억력이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남편 동사도 곧 죽고 말았으니 채염의 일생은 비참의 연속이었다. 그는 세 번이나 결혼을 한 셈이며 그를 만나는 남자마다 죽거나 감옥행이었으니 매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여인임이 틀림없다.

채문희기념관(蔡文姬紀念館)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 란톈(藍田)현 북쪽 1km 지점의 산리(三里)진 차이왕(蔡王)촌에 가면 채염의 능묘가 있고 거기에 기념관이 있다. 란톈은 남편의 고향으로 그가 타향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이 지역 사람들이 그의 가련한 생애에 대한 동정과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능묘를 만든 것이다. 그동안 초라하게 되어 있던 것을 1991년에 사합원의 기념관, 곧 채문희기념관(蔡文姬紀念館)을 세우고 성급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념관의 진열실에는 채염의 일생을 소개한 자료 및 작품, 후한 말기의 사회 풍속, 남전 지방의 문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뻬이랑(秕廊)’이라는 장랑(長廊)에는 채염이 지은 ‘비분시’ ‘호가십팔박’의 석각, 『후한서』 가운데 나오는 ‘동사전(董祀傳)’, 그 지역 출토의 유명 비석 등 여러 석각이 진열되어 있다. 글자가 희미한 비석도 있으나 대개 진본들이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능묘가 나타난다. 원형의 분묘인데, 둘레를 벽돌로 둘렀으며 거기에는 채염의 재능과 업적을 칭송하는 글들이 많이 적혀 있다. 묘비에는 “漢蔡文姬之墓(한채문희지묘)”라고 쓰여 있고, 묘 비석 앞에 돌로 만든 석양(石羊), 석호(石虎)가 있어 묘를 지키고 있다.  

채염에 대한 재평가와 문학적 의의
송대(宋代) 어느 화가가 그려 현재 보스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채문희귀한도(蔡文姬歸漢圖)’ 덕분에 채염의 생애는 서양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백가쟁명(百家爭鳴) 시기인 1959년, 중국에서는 “문학유산(文學遺産)”지를 중심으로 소위 채염의 ‘호가십팔박(胡茄十八拍)’ 논쟁이 전개되었다. 문인들은 그녀를 다시 이 세상에 불러내어 그녀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기 시작했다.
이 논쟁은 후즈(胡適), 쩡쩐뚜어(鄭振鐸), 류따제(劉大杰) 등 유명한 학자들이 ‘호가십팔박’은 채염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당대의 의작(擬作)이라고 한 것에 대해 중국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역사가인 동시에 정치가인 꿔모뤄(郭末若)가 이를 반박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호가십팔박’에 대한 의작설(擬作說)은 문인 소식(蘇植·東坡)이 먼저 제기하면서 송대부터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꿔모뤄는 채염의 생애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며 ‘호가십팔박’의 작자가 채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도 깃들어 있다는 견해도 있다. 꿔모뤄가 조조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흉노에 붙들려 고생한 여인은 채염만이 아니라 당시 도처에 나타나고 있었으며 채염은 이러한 비극적 여인들의 전형적 예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조조는 사적인 감정에서 그녀를 구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문치무공(文治武功)의 위업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른바 ‘조조재평가’(曹操再評價) 운동의 일환으로, ‘호가십팔박’의 작자가 채염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채염은 문학적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는 ‘비분시’, ‘호가십팔박’ 등을 남겼는데 그 의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대에는 조정에서 관의 세력으로 정절을 장려했다. 유향의 『열녀전(烈女傳)』, 반고의 여동생인 반소가 지은 『여계(女誡)』등이 나돌면서 여성의 정절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정작 사회에서는 정절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같다. 그렇기에 채염은 세 번이나 결혼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그녀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채옹문집』을 정리하였으며 『후한서』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니 이것은 중국고전 전적의 보존과 문화보급에 큰 공헌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셋째, 정사나 야사를 막론하고 채염을 당시 최고의 문인, 음악가, 서예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일생을 보면 시대상을 그리며 파란 많은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곧 한말, 삼국 초기의 난세의 시대상을 잘 반증해 주고 있다. 곧 채염은 역대 비극적 여인의 전형처럼 보이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한 시대상을 그리며 문학적 재능을 보인 여류 시인이며 음악가이다.

넷째, 문학적인 재능과 그녀가 남긴 공적은 물론 이민족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화친이 국가의 존망과 직접 결부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하에서 흉노로 인한 희생과 애환을 가진 비련의 여성의 이야기는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려온 중국 사람들의 가슴 속에 애국심의 상징으로 깊이 새겨져 있다.

그렇기에 채염의 인생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이 있다. 베이징 이허위엔(颐和园)의 장랑(長廊)에 그려진 “채문희귀한도”, 꿔모뤄(郭沫若)의 희곡이 유명하며 역사극 『채문희(蔡文姬)』는 인기를 모았던 것이다.

 


전순동 교수/ 충북대 역사교육학 , 본지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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